top of page

2025.7.2. (水曜日, 183th/365) “점점 좁아지는 문”

2025.7.2. (水曜日, 183th/365) “점점 좁아지는 문”

     

우리가 등산하려는 야산을 가기 위해서는 논두렁을 지나야 한다. 한쪽은 논밭이고 다른 한쪽은 강가다. 우리가 움직일 때마다 논두렁에서는 개구리가 펄쩍펄쩍 뛰고 강가 수풀에서는 숨어 있던 오리가족과 물고기가 퍼뜩거리며 도망친다. 야산은 살아 있는 동식물로 가득 차 있다. 나는 샤갈을 앞 세우고 50m 논두렁 길을 간다. 샤갈이 강이나 논이 빠지지 않도록 리드줄을 잡고 적절하게 인도해야 한다. 내게 하루는 이 논두렁을 무사히 건너는 수련이다. 이 길을 지나가야, 야산의 오솔길에 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현대를 연 예언자인 철학자 니체는 인생을 깊은 협곡 위에 위험하게 매달린 흔들다리를 건너는 수련이라고 말한다. 그는 현대인들 위한 새로운 복음서인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서문 4에서 외줄타기 곡예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Der Mensch ist ein Seil, geknupft zwischen Thier

und Übermensch,-ein Seil uber einem Abgrunde.

인간은 동물과 초인사이에 팽팽하게 당겨진 줄타기 줄입니다.

그 줄은 바닥이 보이지 않는 나락 위에 드리워진 줄입니다.

     

Ein gefahrliches Hinüber,

ein gefahrliches Auf-dem-Wege,

ein gefahrliches Zuruckblicken,

ein gefahrliches Schaudern und Stehenbleiben.

저쪽으로 건너가는 것도 위험하고,

도중에 서 있는 것도 위험하고,

뒤돌아 보는 것도 위험하고,

벌벌 떠는 것도 위험하고

가만히 서 있는 것도 위험합니다.

     

Was gross ist am Menschen, das ist, dass er eine

Brucke und kein Zweck ist: was geliebt werden kann

am Menschen, das ist, dass er ein Übergang und

ein Untergang ist.

인간의 위대한 점은, 그가 다리라는 점입니다. 그는 목적이 아닙니다.

인간이 사랑받은 만한 존재라는 것은, 그가 건너가는 존재이자

냐려가는 존재라는 점입니다.

     

인간은 이 흔들다리 위에서 한 걸음 한 걸음, 운명적이며 치명적인 걸음을 시도하는 존재다. 그에게 인간은 쾌락에 중독되어 동물과 같이 살려는 인간과 더 나은 자신이 되려고 끊임없이 자신을 극복하려는 초인이 되려는 인간사이에 평평해가 당겨진 로프라고 정의한다. 그 위에선 성급하게 앞으로 전진할 수도 혹은 뒤를 돌아보며 두려워하지도 못하고 무서워 벌벌 떨지만, 몸과 마음을 진정시켜야하는 진퇴양란의 모순이다. 인간이 곡예사처럼 이 줄 건너편에 있는 지점에 갔다고 임무를 마치는 것이다. 거기에는 더 가느다랗고 더 흔들거리고 더 얇은 다리가 등장한다,

     

<마태복음> 7장에 등장하는 ‘좁은 문’을 <누가복음> 13장 23-24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좁은 문에 들어가려고 시도해도 들어갈 수 없다고 기록한다:

     

누가복음 13:23-24

Ἀγωνίζεσθε εἰσελθεῖν διὰ τῆς στενῆς θύρας,

ὅτι πολλοί, λέγω ὑμῖν, ζητήσουσιν εἰσελθεῖν καὶ οὐκ ἰσχύσουσιν

“여러분은 좁은 문을 통과하기를 애쓰십시오. 제가 여러분께 말씀드립니다.

많은 사람들이 들어가려고 애쓰지만, 들어갈 수 없을 것입니다.”

     

왜 사람들이 좁은 문을 통해 훌륭한 삶을 살려고 해도, 결국 실패하는가? 만일 그 문이 처음부터 비좁아 들어갈 수 없다면, 사람들이 들어가려고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좁은 문은 원래는 넓은 문이었다가 점점 좁아지는 문이다. 누구에게나 훌륭하게 보는 길이지만, 그 길은 매일 매일 자기-수련을 통해 갈고 닦지 않으면 통과할 수 없는 길이다. 우리는 복음서에 대한 좁은 문의 모양과 특징에 대한 설명을 고대 이란어인 아베스타어로 기록된 조로아스터교 경전인 <야스나>에서 찾을 수 있다. 아베스타어는 기원전 12세기에서 기원전 7세기까지 이란에서 사용된 언어다.

     

아베스타어로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의 살아 있을 때나 사후에 가는 길을 ‘친바토 페레툼’chinvato peretum이라고 부른다. ‘친바토 페레툼’chinvato peretum은 ‘분리의 다리’라는 뜻이다. 인간이 생전에 정심, 정언, 정행을 실천했다면, 영원한 세계로 이어지는 ‘분리의 다리’를 건너면, 그 다리는 점점 넓어져 천국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천국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악신인 ‘앙크라 마인유’Angra Mainyu의 거짓말에 속아, 마음과 말과 행위를 수련하지 못한 사람에게 이 분리의 다리는 점점 좁아져, 영원한 지옥으로 떨어지고 만다. 사람들이 도덕적이며 영적인 삶을 추구하기 위해 시도하지만, 그 길에 들어서기 위해서는 자신을 잘 돌보는 수련자가 되어야 하기에, 대부분이 도중에 포기한다. 나는 오늘 좁은 길을 선택할 것인가?

     

 
 
 

댓글


92a545614e1af2fc9cca1dd554463fe7-removebg.png
apple-podcasts.png
png-clipart-computer-icons-logo-facebook-inc-facebook-rectangle-logo-removebg-preview.png
pngwing.com-4.png
kisspng-computer-icons-stock-photography-email-clip-art-simblo-5b4faed2d78991.297649021531

더코라(The Chora)  | 대표 : 이신정 | 사업자등록번호 : 208-64-00343

서울특별시 강남구 봉은사로1길 6, 5층 5276호 | 연락처 : 010-5350-0877

Copyright © 2024 The Chora. All Rights Reserved.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