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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18. (土曜日) “당신은 중풍병자中風病者입니까?”

2025.1.18. (土曜日) “당신은 중풍병자中風病者입니까?”

     

오늘은 <마가복음> 줌수업 세 번째 시간이다. 2장에 등장하는 중풍병자를 치유하는 것으로 시작혔다. 중풍병은 요즘말로 말하면 뇌졸중환자다. 이 병은 1장에 등장하는 나병과 다르다. 나병은 자신의 겉모습을 치장하기 위해, 날마다 타인을 흉내를 내고 시기하는 사람에 대한 상징이다. ‘중풍병자’를 의미하는 ‘팔랄뤼티코스’παραλυτικos를 분석하면 그 상징을 알아낼 수 있다. 중풍병자는 하나에 집중하지 못하고 ‘사방으로’(para-) ‘흩어진’(루오) 사람을 의미한다. 신체적으로는 신경조직이 손상되어, 뼈를 감싸는 근육을 느슨하게 만들어 몸을 전혀 가눌 수 없는 병자다. 그는 이동을 위해 누군가의 힘을 빌려야한다. 중풍병자는 자기-신뢰가 부족하여 자립하지 못하는 우리들이다. 누군가의 명령으로 제한된 공간에서 움직이며, 그 안에서 오감을 자극하는 반복된 행위가 만들어주는 중독이 유일한 쾌락이다. SNS와 인터넷에 중독된 현대인들의 초상이다. 하루종일 방에서 나오지 않고 인터넷 서칭이나 게임에 탐닉하고 배달 서비스를 통해 음식을 배달시켜 먹습니다. 종종 주식 그래프를 읽는 것도 놓치지 않는다.

     

이들이 치유를 받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여기 그의 처참한 운명을 자신의 불행처럼 여기는 친구 네 명이 있다. 이들은 예수가 나병환자를 보았을 때처럼, 친구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공감했을 뿐만 아니라, 친구의 치명적인 질병을 치유하기 위해, 그를 들것에 매고 예수를 찾아온다. 자비慈悲란 상대방의 처지를 완전히 개선할 때, 완성되는 인간의 최고의 가치입니다. 예수는 친구들의 믿음을 보고, 친구 중풍병환자를 치유한다. 다음은 <마가복음> 2장 1-5절 그리스어 원문, 히브리어 번역, 그리고 나의 번역과 해설이다:

     

1. Καὶ εἰσελθὼν πάλιν εἰς Καφαρναοὺμ δι’ ἡμερῶν ἠκούσθη ὅτι ἐν οἴκῳ ἐστίν.

ויהי מקץ ימים בשובו אל כפר נחום וישמעו כי הוא בבית׃

“수 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셔서, 한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났다.”

(해설)

예수가 가버나움에서 갈릴리 지역을 여행하시고 다시 가버나움으로 돌아온다. 가버나움은 예수가 유대북부지역 선교의 중심지였다. 아마도 이곳은 베드로와 안드레의 집(1.29)이 있었을 것이다. 그가 나병환자를 고쳤다는 소문이 돌자, 그의 기적을 목도하기 위해, 수많은 병자들과 사람들이 베드로 집에 왔다.

     

2. καὶ συνήχθησαν πολλοὶ, ὥστε μηκέτι χωρεῖν μηδὲ τὰ πρὸς τὴν θύραν,

καὶ ἐλάλει αὐτοῖς τὸν λόγον.

ויאספו רבים מהרה עד אפס מקום לעמד אף מחוץ לפתח וידבר אליהם את הדבר׃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되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도道를 말씀하셨다.”

(해설)

예수는 집안에서 대중들이 바라는 기적을 행하지 않고 대신 스스로 삶의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도를 말씀하신다. ‘도’란 무엇인가? 지하철에서 만는 그 사람이 말한 말이 도인가? 마가복음 저자는 이 복음을 그리스어로 ‘로고스’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도란, 명상을 통한 생각훈련, 대화와 연설을 통해 말훈련, 그리고 생각과 말을 반드시 행동으로 옮기는 언행일치의 훈련을 통해 완성된다. 언행일치는 교리를 믿거나 의례를 행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삶의 문법을 매일 매일 조금씩 삼가 행동으로 옮겨 거룩한 습관이 되어, 자신이 될 때, 그는 도가 된다. 도道는 목적지가 아니라 언제나 도중道中일 수 밖에 없다. 아마도 로고스는 히브리어 ‘다바르’dabar의 번역일 것이다. 다바르는, ‘말’이란 의미와 ‘사건’이란 의미를 모두 지니고 있다. 말은 사건이 될 때 완성되기 때문이다.

     

3. καὶ ἔρχονται φέροντες πρὸς αὐτὸν παραλυτικὸν αἰρόμενον ὑπὸ τεσσάρων.

ויבאו אליו אנשים נשאים איש נכה אברים וישאהו בארבעה׃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왔다.”

4. καὶ μὴ δυνάμενοι προσενέγκαι αὐτῷ διὰ τὸν ὄχλον ἀπεστέγασαν τὴν στέγην ὅπου

ἦν, καὶ ἐξορύξαντες χαλῶσι τὸν κράβαττον ὅπου ὁ παραλυτικὸς κατέκειτο.

ולא יכלו לגשת אליו מפני העם ויסירו את הגג במקום אשר היה שם ויחתרו חתירה

ויורידו את המשכב אשר שכב עליה נכה האברים׃

“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었다. 그들은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 내렸다.”

(해설)

중풍병자 친구 네 명이 친구를 들것에 매고 예수에게 왔다. 그러나 입구에 사람이 너무 많아 들어갈 수 없었다. 그들은 포기하지 않고 불가능한 일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1세기 팔레스타인 시골집은 흙과 지푸라기를 섞어 만든 단층으로 방이 하나다. 지붕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다. 지붕은 나무 빔을 지푸라기와 진흙을 섞어 만들었다. 그들이 중풍친구를 지붕으로 데리고 올라가, 지푸라기-진흙을 부수기 시작하였고, 예수가 앉았던 집안에는 흙더미와 먼지가 우수수 떨어져 난장판이 되었을 것이다.

‘중풍병자’를 의미하는 ‘팔랄뤼티코스’παραλυτικός를 분석하면 집중하지 못하고 ‘사방으로’(para-) ‘흩어진’(루오) 사람을 의미한다. 신체적으로는 신경조직이 손상되어, 뼈를 감싸는 근육을 느슨하게 만들어 몸을 전혀 가눌 수 없는 병자다. 그는 이동을 위해 누군가의 힘을 빌려 들것에 실려 간다. 중풍병자는 자기-신뢰가 부족하여 자립하지 못하는 대중을 의미한다.

이들이 치유를 받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여기 그의 처참한 운명을 자신의 불행처럼 여기는 친구 네 명이 있다. 이들은 예수가 나병환자를 보았을 때처럼, 친구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공감했을 뿐만 아니라, 친구의 치명적인 질병을 치유하기 위해, 그를 들것에 매고 예수를 찾아온다. 자비慈悲란 상대방의 처지를 완전히 개선할 때, 완성되는 인간의 최고의 가치다.

     

5. καὶ ἰδὼν ὁ Ἰησοῦς τὴν πίστιν αὐτῶν λέγει τῷ παραλυτικῷ·

Τέκνον, ἀφίενταί σου αἱ ἁμαρτίαι.

ויהי כראות ישוע את אמונתם ויאמר אל נכה האברים בני נסלחו לך חטאתיך׃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아들아, 네 죄라는 것이 네 몸에서 빠져나갔다.”

(해설)

믿음이란 무엇인가? 예수는 중풍병환자와 친구들의 무엇을 믿음으로 보았는가? 그들이 친구를 데리고 예수에게 온다면, 친구가 완쾌될 것이라는 상상이 믿음인가? 믿음은 헌신적이며 자비로운 행위를 통해 완성된다. 예수는 친구를 위한 그들의 창의성, 불굴의 의지, 그리고 끝까지 관철시킨 철두철미함을 믿음으로 보았다. 그래서 이 일련의 행위를 마가는 ‘예수가 그들의 믿음을 보았다’라고 표현하였다. 예수는 흙더미 먼지와 함께 천장에서 내려진 중풍병자에게 무슨 말을 했는가? 예수는 ‘내가 너희 중풍병을 치유하겠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예수가 본 것은 무엇인가? ‘그들의 믿음’이란 표현에서 그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중풍병자를 포함한 네 친구들의 믿음이다. 예수는 이 말을 건낸 후에, 중풍병자를 향해, ‘아들아!’(그리스어, 테크논, 히브리어, 비니)라고 부르면서 ‘네 죄가 용서받았다’라고 말한다. 이 말은, 인간의 질병은 본질적으로 신과의 분리와 인간이 자신이 가야할 길로부터 이탈할 때, 등장하는 신체적, 정신적, 영적인 이탈이다. 예수의 치유는 단순히 특별한 자에게 임한 기적을 넘어서, 중풍병과 같이, 고요하지 못해 몸을 계속 떨 뿐만 아니라. 스스로 자신이 가야할 길을 가지 못하는 무능력에 대한 일반적인 병에 적용된다.

     

우리는 중풍병환자다. 스스로 움직일 수 없을 만큼 중환자가 되었다. 자신의 삶에 하나를 찾지 못해 이리저리 기웃거리면서 중풍병환자들이 된 우리를 구원할 체계는 새로운 교육과 종교 체계밖에 없다. 이것을 실험하는 단체가 많이 등장하면 좋겠다. 그 마음을 담아 에밀리 디킨슨의 <희망은 날개 달린 어떤 것>을 번역해 보았다.

     

     

“Hope” is the thing with feathers by Emily Dickinson

희망은 날개가 달린 것, 에밀리 디킨슨

     

“Hope” is the thing with feathers -

That perches in the soul -

And sings the tune without the words -

And never stops - at all -

희망은 날개가 달린 새로

영혼에 앉아있습니다.

가사 없이 곡조를 노래하고

그칠 줄 모릅니다.

     

And sweetest - in the Gale - is heard -

And sore must be the storm -

That could abash the little Bird

That kept so many warm -

모진 바람 속에도 더욱 달콤한 소리가 들리고,

아무리 심한 폭풍이 와도,

많은 이의 가슴을 따스하게 보듬는

그 작은 새는 노래를 멈추지 않습니다.

     

I’ve heard it in the chillest land -

And on the strangest Sea -

Yet - never - in Extremity,

It asked a crumb - of me.

저는 그것을 차디찬 땅에서 들은 적이 있습니다.

가장 괴상한 바다에서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절박해도

저에게 빵조각을 구걸하지 않았습니다.

     

사진

<중풍병자를 고치는 예수>

Bernhard Rode (1725-17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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