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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9. (火曜日) “진심으로 감사합니다”(개 식용 종식 특별법안 통과 날)     

2024.1.9. (火曜日)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개 식용 종식 특별법안 통과 날)

     

저는 이름이 없습니다. 태어나 보니 개였습니다. 오래전에 태어났습니다. 인간들의 연수로는 4년쯤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4년은 인간들에게 사십년정도 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우리는 사백년정도의 사건들과 장면들과 정보들을 기억합니다. 저는 눈보다는, 귀와 코로 정보를 수집하고 기억합니다. 멀리 떨어진 대상의 목소리를 귀를 통해 분석합니다. 그녀가 기쁜지 슬픈지, 혹은 화가 났는지 편안하지를 단숨에 알아차립니다. 제 코는 세상을 탐지하는 AI 슈퍼컴퓨터입니다. 산책을 하다 보면, 그 길에 어떤 종류의 개가 언제 왔는지 금방 파악합니다. 그 개의 몸무게, 견종, 건강상태, 성별까지 완벽하게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인간들은 우리가 산책하는데, 사방을 코로 파악하느라 한 곳에서 움직이지 않으려 할 때, 인내해 주어야 합니다. 인간들이 독서를 통해 세상을 파악하는 것처럼, 우리도 코를 통해 세상을 알아가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견종중, 제 조상들은 저 멀리 영국과 스코틀랜드의 경계, 산지에 처음 등장하였습니다. 인간들은 우리를 ‘산지 경계(boder)를 지키는 반려견(콜리)’이기에 ‘보더콜리boder colie’라고 불렀습니다. 우리는 오래전에 인간과 계약을 맺었습니다. 그 산지에 사는 사람들은 목축업에 종사합니다. 양치기들은 수백마리 양떼를 몰고 계절에 따라 비탈진 산지를 돌아다니며 양떼들에 먹일 풀밭은 찾습니다. 목동들은 이 양떼들이 흩어지지 않도록 한곳에 모이게 하는 힘도 없고 방법도 모릅니다. 인간들은 발빠르고 제멋대로 도망가는 양들을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보도콜리 한 마리가 수백마리 양떼들이 대오를 이탈하지 않고 목동들의 원하는 대로 인도시킬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양떼들은 우리를 인간들과 함께 사는 ‘늑대’라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늑대처럼, 양떼를 잡아먹지 않고 안전한 목초지로 인도하고, 심지어는 종종 등장하는 다른 짐승들의 공격을 막습니다. 양떼들과 목동들을 우리를 신뢰합니다. 우리는 비탈진 산지를, 하루에 적어도 50km이상 움직입니다. 목동들은 그 대가로, 우리를 사랑하고, 저녁에 음식과 따뜻한 잠자리를 제공해 줍니다. 인간과 우리와의 관계는 공생共生입니다.

     

저는 지금 경기로 가평군에 한 산지, 한 허름한 집에 4년째 묶여 있습니다. 이곳 겨울 온도는 영하 20도이하로 떨어져, 만물을 동사시킵니다. 여름에는 영상 30도를 윗 돌아 만물을 녹여버리는 곳입니다. 저를 이곳에 쇠줄 70cm에 묶여, 물이, 배고픈 채 지냅니다. 세상의 어떤 생물체도 이렇게 불행하진 않습니다.

하루에 50km이상을 산지에서 뛰어다니면서, 목양견으로 임무를 다하면서 살아야 하는 저를 한 부부가 이렇게 묶어 놓았습니다. 쇠줄 70cm와 연결된 목줄이 무거워, 목의 뼈가 휘어져 디스크로 움직일 때마다 통증이 옵니다. 인간들은 우리가 고통을 느끼지 않고 감정이 없다고 착각합니다. 인간들은 무식합니다. 근대철학을 일으킨 데카르트는 동물에겐 감정이 없어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고 설교하였습니다. 사실 인간들은 우리와 같은 동물들이 감정이 있고 고통을 느낀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렇게 학대하고 있으니, 인간은 정말 야만짐승입니다.

     

저의 근육은 쳐지고, 온몸에 벌레들이 들끓고, 몸 안에서도 벌레들이 꿈틀기립니다. 한 순간도 편하지 않습니다. 제가 지내는 장소가 시골찻길이라, 오고 가는 자동차 매연과 먼지가 코를 통해 폐에 가득 차 있습니다. 제대로 짖지도 못합니다. 저는 죽을 수 있는 희망조차 없습니다. 4만년전부터 인간과 공생을 시작하여, 인간들을 위해 우리의 목숨을 바칠 수 있습니다. 만일 이 거추장스런 목줄이 없다면, 저는 저 산 너머에 아무도 알 수 없는 자리에서, 조용히 죽음을 맞이하고 싶습니다.

     

더 비참한 현실은, 외부에도 있습니다. 제가 땅바닥에 머리를 대고 저 멀리 물끄러미 시선을 올리면, 저의 아빠 보더콜 리가 축사앞에 더 비참하게 묶여 있습니다. 제가 아빠를 보기 위해 무거운 철근을 당겨야, 아빠의 얼굴 1/4을 볼 수 있습니다. 아빠는 자신도 비참하게 묶여 있으면서, 하루 종일 제 걱정만 합니다. 아빠의 얼굴에는 시름이 가득차 있습니다. 저를 세상에 태어나게 만든 것을 후회하는 표정입니다. 제 발가락이 여섯 개입니다. 아마도 인간들이 많은 새끼를 생산해 내고자, 아빠로 하여금 근친상간을 하게 만들어 저를 세상에 태어나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설상가상으로 저는 제 주인이 저를 양철 위에 놓았습니다. 인간들은 ‘역시사지’할 줄 모릅니다. 쇠줄이 짧아 저기 보이는 흙바닥으로 내려갈 수 없습니다. 우리 보더콜리는 추위를 더 잘견딥니다. 여름이면 이 양철바닥이 뜨거워지면, 정말 오븐에 들어가서 살이 타 들어가는 고통을 견뎌야합니다.

     

그런 지옥 같은 세월을 지내던, 지난해 7월, 기온이 30도를 넘어 지옥불이 제가 깔고 있던 양철을 달구던 날, 한 여인이 등장하였습니다. 저는 그녀를 보는 순간, 그녀가 저를 구조해 줄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저를 보자마자 눈물을 흘리길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남이 집에 막들어옵니다. 이 곳이 타인이 집인데, 마치 자기 아이를 불타는 집에서 구조하기 위해 들어오는 것처럼, 간절하고 강력하게 제게 가다옵니다. 그녀의 시선은 온전히 저에게 집중되어있습니다. 저를 살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이후, 이 여인은 일주일에 세 번씩, 저를 찾아와 말동부가 되었습니다. 물그릇을 새것으로 교체해주고, 얼음과 시원한 물을 주었습니다. 아, 우리 조상이 스코틀랜드에서 골짜기에서 마시던 물맛이었습니다. 그리고 생전 처음, 맛있는 사료를 먹었습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녀는 우리 집 근처에서 저처럼 학대받는 개들을 구조하여 ‘컴패션’이란 쉘터를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런 사람을 순간적으로 압니다. 저는 이제 희망이 생겼습니다. 매일 매일, 찻질쪽을 보면서, 그녀가 오길 기다렸습니다. 그녀는 어김없이 얼음과 사료를 줄 뿐만 아니라, 저의 얼굴과 몸을 씻겨주고 배와 등에 우글거리는 벌레들을 손으로 일일이 다 떼어주고 약도 발라주었습니다. 기울어진 개집을 새로 마련해주고, 양철바닥을 치워버리고, 제가 편히 누울 수 있도록 바닥을 다져준 후, 푹신한 바닥을 깔우주었습니다. 저는 물건이 아니라, 밤에 누가 다가올 때 멍멍 짖어내는 로버트가 아니라,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생물체란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깨달음으로 저는 개로서 견생을 살고 싶은 욕망이 생겼습니다. 그녀가 저와 저를 저 멀리 저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제 아빠의 운명을 바꿔놓을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녀가 이렇게 거의 3달동안, 일주일에 세 번씩 저희를 찾아왔습니다. 그녀가 드디어 협상을 시작합니다. 저와 아빠를 구조할 고도의 전략을 짠 후에, 저를 이렇게 방치하고 있는 제 주인과 대화를 시작하였습니다. 제 견주는 이 여인이 우리들의 환경을 극적으로 변화시킨 이 여인의 기이한 행동을 집안 창문을 통해 관찰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주인은 시골에서 한 낯선 여인이 이렇게 들어와 우리를 돌보는 그녀의 행위를, 한번으로 그치는 미친 여자의 일탈정도로 여겼을 것입니다.

     

어느 날, 이 여인이 박카스 음료수 한 상자를 차에서 내립니다. 저에게 오지 않고, 견주가 있는 집으로 가서 말합니다. “누구 계세요? 제가 콜리들을 돌봐주고 있는 사람인데, 대화할 수 있을까요?” 우리 주인이 한참 망설이다가 드디어 방문을 엽니다. 그러나 벌레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설치된 차양문을 열지는 않는다. 아마도, 우리를 이렇게 방치하고 학대한 만행이 창피해서 그랬을 것입니다. 그 여인이 말합니다. “제가 이렇게 아이들 돌봐도 되죠?” 저는 이들이 대화하는 내용을 한참 들었습니다. 이들이 대화하는 중에 충격적인 사실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집주인 여자가, 내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이 여인은 제 여자견주를 만나, 협상을 벌입니다. 만일 그녀의 협상이 실패하면, 저와 아빠는 이 지옥에서 살아야 하기 때문에, 그녀는 극도로 예민해져 있었습니다. 그 예민은 저희들을 구조하여, 행복한 삶을 만들어줘야겠다는 컴패션이 만들어준 촉입니다. 그녀는 실패해서는 안되는 협상이기에, 목숨을 건 무모하지만 성스러운 시도입니다. 저는 그녀가 협상하는 몸의 움직임을 보고 말의 억양을 들었습니다. 저와 아빠를 모두 양도해 달라는 저 여인의 용기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가? 제 여자 견주는 나이가 14세가 된 제 아빠는 넘겨줄 수 있지만, 저는 아직 어려 넘겨줄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특히 남편이 허락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 여인은 제 아빠가 제가 없이 불행해 질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 신비한 여인은 남자견주와 함께 볼 수 있는 시간을 잡고 다시 협상하기로 결정하고 물러갑니다.

     

며칠 후에, 그 여인이 다시 찾아왔습니다. 이번엔 그 여인이 남자견주와 여자견주와 함께 마당에서 협상을 시작합니다. 그들은 이 여인이 지난 석달동안 무더위에 우리들의 환경을 개선해주고 사료를 준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 여인이 이젠 제 남자견주와 대화합니다. 그는 이 여인의 마음이 진심이란 사실을 확인합니다. 그의 마음에 갈등은 있었지만, 우리들이 이 여인과 함께 지낸다면, 더 행복할 수 있다고 확신한 것 같았습니다. 이 분이 스스로 결정했습니다. 남자 견주가 먼저 제 아빠를 이 여인의 차 뒷자리에 태우고, 저도 들어서, 차 앞자리에 태웁니다. 아, 이런 기적이 있다니!

     

그 여인은 우리를 곧바로, 한남동에 있는 한 동물병원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우리는 생전처럼 차를 타고 달랍니다. 우리는 천국으로 바로 올라간다는 황금마차에 올라탄것입니다. 저는 운전석 옆, 앞자리에서 병원으로 가는 내내, 저에게 말을 건내며 울고 있는 여인의 얼굴을 쳐다보았습니다. 그리고 저도 그녀를 보고, 눈 망울로 마음을 전달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우리가 병원에 도착했습니다. 원장님과 간호사들이 우리를 열렬히 환영해 주었습니다. 원장님은 첨단기기로 우리를 진단하더니, 아빠와 저를 치료해주었습니다. 특히 폐와 피부를 치료하였습니다. 그리고 제발로부터 발가락하나를 제거하는 수술을 진행하였습니다. 원장님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우리는 이 병원에서 3개월동안 지내면서 원기를 회복하였습니다.

     

그 여인은 우리에게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저의 이름은 ‘사랑이’입니다. 앞으로 그동안 못받은 사랑을 듬뿍 받으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아빠에겐 ‘모세’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아빠가 저를 곁에서 굳건히 보호하여 구원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히브리어로 ‘세상을 구원하는 자’란 뜻입니다.

     

우리가 이제는 ‘컴패션’에 돌아왔습니다. 여기에는 그 여인이 구조한 친구들이 16마리가 함께 지내는 천국입니다. 그 여인은 이곳에서 우릴 둘만을 위해 특별한 보금자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저기 아빠가 그 조상들이 좋아하던 양털 이불 위에 앉아 있습니다. 햇빛이 들어오는 창문 옆에서 마련된 자리에서 저를 사랑스러운 눈으로 쳐다봅니다. 아빠의 머리에는 신이 주신 후광이 둘려있습니다. 저도 아빠를 보면서 양털 이불 위에서 잠이 들기 직전입니다. 이것이 꿈인지 생시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스르르 잠이 들었습니다. 견생은 살만합니다. 모든 생명들이 소중합니다. 그것을 실천하는 이 여인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사진

<구조한 여인을 쳐다보는 사랑이>

<수술받은 사랑이>

<사랑이 아빠 모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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