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그리스어로 ‘쪼온 폴리티콘zoon politikon’ 즉 ‘도시 안에 거주하는 동물’로 정의하였다. 인간은 문명과 문화의 가시적인 공간인 ‘도시’안에서 다른 인간들과 유기적인 관계를 맺어 공동체의 일원이 될 때, 그 존재의미를 확인한다. 개인과 그(녀)가 속한 공동체의 관계는 상호보완적이다. 개인은 독립적인 존재이면서 동시에 동료인간들과 협동하고 의존하는 존재다. 인간이 자신이 속한 공동체 안에서 온전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 먼저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가 무엇인지 깨달아야한다.
인류의 성현들이 남긴 경전과 고전에서, 그 임무를 깨닫는 공간을 ‘광야’ 혹은 ‘사막’이라고 말한다. 오합지졸이었던 히브리인들을 신이 선택한 선민으로 훈련시키는 공간과 시간이 ‘광야 사십년’이다. 히브리인들은, 사회학적인 용어로, ‘타인에 의해 인위적으로 강요된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사람들’이란 뜻이다.
기원전 12세기 이집트는 먹을 것이 풍부한 축복의 땅이었다. 나일강은 자연의 순환에 맞추어 일정한 기간 범람하였고, 농부들은 그 비옥한 땅에서 농사를 지었다. 이집트 전체를 고공촬영하면, 굽이치는 나일강 주위만 검은 색이다. 고대 이집트어로 ‘검은 색’을 의미하는 캐메트’kemet는 농경지를 의미한다. 고대근동에서 떠돌아다니던 사람들, 즉 ‘히브리인’들은 먹을 것을 찾아 이집트로 들어와 임시노동자로 연명하였다. 파라오는 일거리를 찾아 몰려오는 히브리인들을 피라미드 건설이나 수로건설과 같은 대규모 공동 사업에 동원한다.
<탈출기>에 의하면, 모세는 히브리인이지만, 파라오 공주의 양자가 되어 이집트 왕자로 살게 되었다. 모세가 어른이 되면서 외국인 노동자로 연명하는 동료 히브리인들이 이집트인에게 학대당하는 것을 보았다. 그는 그 이집트인을 죽여 모래 속에 묻어버렸다. 모세의 정의감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다음 날 그가 다시 나가서 보니 이번에는 동족인 히브리 사람 둘이 서로 싸우고 있었다. 모세가 싸움을 중단시키려 하자 그중 한 히브리인이 “누가 당신을 우리의 지도자와 재판관으로 세웠단 말이오? 당신은 이집트 사람을 죽이더니 이제는 나도 죽일 작정이오?”라고 말했다.
모세는 자신이 이집트인을 살해한 사실이 알려진 것을 알고사람들이 거의 거주하지 않는 사막과 화산 지역인 미디안 평원으로 도망친다. 며칠을 도망쳐 미디안 평원에 있는 우물가에 도착한 모세가 잠시 쉬고 있는데, 일곱 명의 여자 목동들이 물을 길어 양떼에게 먹이려 했다. 여자들이 사막을 돌아다니는 일은 매우 위험하므로 이들은 일곱 자매가 함께 뭉쳐 물을 길러 온 것이다. 이때 남자 목동들이 등장해 그녀들을 내쫓자, 파라오 궁궐에서 무술을 단련했던 모세는 남자 목동들을 혼쭐내 쫒아버리고, 일곱 자매를 도와 양떼에게 물을 먹였다.
일곱 자매의 아버지 호밥(다른 사본에서는 이드로)은 미디안 지역의 제사장이었다. 그는 갈 곳 없는 모세를 양자로 삼고 자신의 딸 십보라와 결혼시켜 양을 치게 한다. 모세의 기나긴 40년의 목동 시절이 시작된 것이다. 그는 그동안 ‘게르솜’이라는 이름의 아이도 낳았다. 그 이름의 의미는 ‘거기에서 나그네가 되었네’이다.
기원전 14세기경 시내 반도 미디안 지역은 끝없이 펼쳐진 사막과 태고에 일어났던 화산 활동으로 만들어진 가파른 산이 전부였다. 그는 더 이상 이집트의 왕자가 아니라 살인자이며 떠돌이 히브리인일 뿐이었다. 지난 40년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아침이면 양떼를 몰고 ‘광야曠野’로 나가 산으로 올라갔다가 저녁이면 돌아오는 것이 그의 일과였다. 무명으로 아무런 희망도 없이 지내는 자신이 한심하기도 했다. 모세는 산속으로 들어가 끝없이 펼쳐진 사막과 거친 화산을 보면서 자신의 내면을 보기 시작했다. 그를 단련시킨 스승은 바로 ‘고독孤獨’이었다.
모세는 양떼를 몰고 광야와 산에서 자연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시절에 따라 변화하는 자연을 감지하는 것이 목동인 모세에게는 필수였다. 모세는 점점 자연과 자신에게 몰입하기 시작했다. 저녁이 되어 양떼를 몰고 집으로 돌아오면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고민했다. 우리가 속한 사회의 미덕은 순응이다. 자신만을 의지하고 스스로 새로운 일을 도모하는 일은 사회에 대한 반감이며 반역이다. 사회는 규율과 습관, 네트워킹을 원하지 현실을 직시하는 용기나 창조자들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모세를 영웅으로 훈련시킨 장소는 ‘사막’이다. 사막의 히브리어는 ‘미드바르(midvar)’인데 ‘바람으로 단단히 다져진 장소’라는 의미도 있지만 ‘신의 말씀’(다바르)이 있는 장소’라는 의미도 있다. 신은 인간과 일대일로 소통하고 싶어 한다. 신은 인간이 사회에서 풍문으로 들은 지식으로 신에게 접근하는 것을 혐오한다. 신은 신에 대한 담론, 신에 대한 이론, 신을 위해 만든 종교보다 크기 때문이다. 신은 종종 인간이 부수적인 모든 것을 버리고 자신에게 온전히 집중할 때 ‘말씀’을 들려준다. 40년 동안 사막에서 목동 생활을 하면서 이제 모세는 결단의 시간이 오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어느 날 모세는 마음먹고 사막의 언저리를 지나 끝까지 가보기로 했다. 그는 지난 40년간 훈련해온 사막을 건너간다. <출애굽기> 3장 1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다:
“모세는 미디안 사제인 장인 이드로의 양떼를 치는 목자가 되었다.
그가 양떼를 이끌고 광야(미드바르)를 지나 하느님의 산(하르) 호렙으로 갔더니”
바로 모세의 이러한 결심이 신을 만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한다. 위 문장에서 “광야를 지나서 뒤편으로”라는 표현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사람들은 광야자체가 신을 만날 수 있는 장소라고 생각하지만, 모세는 그 광야를 훨씬 지나 더 이상 갈 수 없는 곳,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장소로 간다. 다시 말해 그는 자신의 목숨을 내놓고 죽음의 장소로 간 것이다. 처음으로 와본 사막을 지나 언저리의 언저리, 바로 그곳에 있는 지상에서 볼 수 없는 아주 높은 산으로 들어갔다. 이 산이 “신의 산, 호렙”이다. 여기서 ‘신의 산’이란 신만이 들어갈 수 있는 거룩한 산이다. 자신의 모든 욕망을 버리고 오랜 수련을 거쳐 자연과 신의 섭리를 감지해 거의 신적인 경지에 도달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곳이 신의 산이다. 모세가 이 산에 들어갈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신만큼 고양되어 있었고, 신과 같은 경지에 이른 자만이 신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온전히 몰입할 수 있는 공간인 ‘미드바르’, 즉 ‘광야’는 모세를 그 누구도 진입한 적인 없는 가장 높은 ‘산’으로 인도하였다. 당신은 자신에게 미드마르를 마련하십니까? 그 곳에서 신을 만나는 여정이 시작됩니다.
사진
<시내광야 아카시아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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