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7.21(火曜日) “능동적선택能動的選擇”

2020.7.21(火曜日) “능동적선택能動的選擇”

선진적인 인간은 자신의 언행을 능동적으로 선택한다. ‘능동’이란 감정에 휩싸이거나 외부의 영향을 받아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의지대로, 자신이 원하는 자신을 만들기 위해 의도적인 자기표현 방식이다. 그런 언행은 자신의 고유한 그리고 섬세한 생각으로부터 등장한다. 내가 평소에 생각을 훈련하지 않는다면, 의도하지 않는 언행을 일삼을 것이다. 내가 생각을 제어하고 완벽한 예술을 만들기 위해 조금씩 조각하지 않는다면, 나는 언제나 넘실거리는 감정이란 파도에서 어찌 할 바를 몰라 실수를 연발할 것이다. 그(녀)는 자신을 스스로 돌아볼 힘이 없어, 그런 실수를 인정하지도 않고 뉘우치지도 못한다.

인간은 ‘그 사람의 생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라는 <전도서>에 등장하는 구절이 옳다. 사람은 그 사람이 평상시에 생각하는 수준이다. 그의 언행은 그 생각의 가감이 없는 표현이다. 생각은 자신의 생각이 적절한지 가만히 보려는 인내다. 혹은 생각이란 생각의 수준을 가름 하려는 수고다. ‘생각하다’라는 고대 히브리어 동사 ‘샤아르’는 ‘새로운 도시로 진입하여 신나는 삶을 시도하는 자신을 성문 위에서 가만히 응시하다’라는 뜻이다. 생각이 없는 사람은,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없는 사람이다.

인간은 자신을 주관적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관찰 할 수 있을 때, 인간은 어제보다 더 나은 존재로 진보한다. 자신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수정하기 위한 체계가 바로 교육이다. 교육이란 자신하고는 상관이 없는 정보를 수용하고 외우려는 욕심이 아니라, 자신을 평가하기 위한 외부의 점검 시스템을 구축하는 일이다.

인간의 수준은 그(녀) 자신의 선택이다. 어렸을 적에는 현재 자신의 쾌락을 자극하는 것들을 선호하지만, 성인이 되면서는 미래의 자신을 위해 발판이 되는 것을 시도하려고 노력한다. 보통 사람들은, 지금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려하지만, 선택된 인간은, 미래 자신을 위해, 취사선택을 한다. 취사선택을 오랜 명상을 통한 자기수련의 결과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최고의 덕목은 습관이다. 인간이 추구해야 할 최고의 삶은 ‘습관’을 통해서만 만들어지고 자신의 일부가 된다. 그는 ‘습관’을 고대 그리스어로 ‘에토스’ethos라고 불렀다. ‘에토스’라는 용어는 수사학에서 시작했다. 어떤 정치가의 연설이 청중들에게 감동과 신뢰를 불어넣었다면, 연설 중 무엇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을까? 연설자가 수많은 청중들의 눈을 보면서, 그들 자신도 잘 알지 못하지만, 그들이 감동할 수밖에 없는 신의 한수를 ‘에토스’ethos라고 불렀다. 에토스는 리더의 카리스마이다. 이 카리스마는 그의 평상시 습관에서 형성되는 선물이다.

어떤 사람의 말은 믿을 만하지만, 어떤 사람의 말엔 미움과 분쟁이 가득 차 감동을 주지 못한다. 그 이유는 그의 일상과 습관이 진부하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아들 니코마코스에게 남긴 <니코마코스 윤리학>이란 책에서 습관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는 <니코마코스 윤리학> III권에서 ‘습관’이 형성되는 과정을 신비한 그리스 단어로 설명한다. 바로 ‘프로하이레시스’προαίρεσις다. 이 단어는 흔히 ‘도덕적 개성; 의지; 선택; 의도’ 등으로 해석된다. 나는 이 단어를 ‘능동적 선택’으로 번역하고 싶다.

‘프로하이레시스’는 두 단어의 융합이다. ‘프로’와 ‘하이레시스’다. ‘프로’는 ‘-를 대신하여’ 혹은 ‘-전에’라는 의미다. ‘하이레시스’는 자기주관적인 선택이다.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자기신뢰를 통해 나온 선택이다. 이 선택만이 후회가 없고 옳다. 인간 사회는 운명적으로 다른 사람들과의 토의를 통해, 그 어중간한 중간을 ‘최선’이라고 착각한다. 서양철학은 플라톤 한 사람에 대한 각주이며, 그리스도교는 예수 생각에 대한 단편적인 이해이고, 이슬람은 무함마드 생각에 대한 다양한 해석일 뿐이다. 인류의 진보는. 한 사람의 깊은 생각에서 출발하였다. 그것이 바로 ‘하이레시스’다.

사람들은 그런 독창적인 선택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희생시켜왔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인들로 구성된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아 독배를 마셨고, 예수는 자신들의 교리를 흔드는 유대인들의 과 로마제국에 의해 십자가에서 처형되었다. 서양에서 ‘하이레시스’는 모든 사람들이 쉽게 인정하는 구태의연한 평균인 ‘정통’orthodox의 반대말인 ‘이단’heresy란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프로하이레시스’는 인간이 어떤 일을 선택할 때, 그것이 옳다면 반복하여 습관으로 만들기 위한 구별된 행위다. 프로하이레시스는 그 행위가가 신을 대신 하여, 혹은 미래에 자신이 흠모하는 자신을 대신하여, 파격적이며 독창적인 과감한 선택이다. 그것이 주위사람들에겐 종종 이단으로 비쳐질 수 있다.

노예였다 스토아철학자가 된 에픽테토스에게 ‘프로하이레시스’는 인간을 다른 동물로부터 구별시켜주는 가장 중요한 덕목이었다. 그에게 본질적으로 선한 것이나 악한 것은 없다. 다만 내가 조절할 수 있는 것과 조절할 수 없는 것이 있을 뿐이다. 그에겐 자신이 조절할 수 없는 것을 하는 것이 악이며 어리석인 일이다. 프로하이레시스, 즉 ‘능동적 선택’은 내가 조절할 수 있는 것 안에서, 나에게 평안을 가져다주기 위한 최선의 선택을 의미한다. 나는 오늘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오감을 자극하는 욕망의 노예가 될 것인가 아니면 ‘더 나은 나’를 위해 능동적인 선택을 감행할 것인가?

사진


<지붕 위 전망>

오스트리아 화가 요셉 킨젤 (1852–1925)

유화, 1907, 96 x 73 cm

개인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