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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이 『내가 만난 개』

대화는 눈과 마음으로 하는 행위다. 그래서 대화의 시작은 말이 없다. 자신의 생각을 가다듬고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리는 침묵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대화는 자신의 생각을 즉흥적으로 쏟아내는 성급性急이 아니다. 대화는 자신의 고착화된 편견을 전시하는 자랑이 아니다. 대화는 상대방보다 자신이 더 낫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한 자기도취도 아니다. 나는 어머니와의 통화 후에 항상 후회한다. 어머니의 진심眞心을 헤아리지 못하고 퉁명스럽게 반응하는 경우가 있다.



삼년 전 이맘때쯤 일이다. 오늘처럼 늦은 눈이 내려와 제법추운 봄날 오후였다. 우리 시골집을 지켜주는 샤갈과 벨라가 갑자기 대문을 향해 짖기 시작했다. 누군가 낯선 이가 밖에 온 것이 분명하다. 우편배달부가 오거나 길을 잘못 찾아 우연히 온 사람이 아니라면, 이 아이들이 그렇게 짖어댈 리가 없다. 나는 집밖에 벌어진 광경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읍내에 나갔던 아내가 조그만 용달 트럭과 함께 집에 도착했다. 용달 트럭 뒤 짐칸엔 개 하나가 제대로 서있지도 못한 채 벌벌 떨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이토록 처참한 모습의 개를 본적이 없었다. 온몸에 핏물이 흐르고 털은 진물로 굳어 있으며 목은 상처로 깊이 패여 있었다. 백구이지만 깡마른 하이에나처럼 보였다. 그 순간, 나는 아내를 쳐다보았다. 아내가 먼저 눈으로 말을 걸어왔다. 나는 그 눈길을 매정하게 피했다. 집안으로 들어와 옷을 주섬주섬 입고 차를 몰고 서울로 가버렸다. 나의 첫 번째이자 마지막 가출이다. ‘정적’ ‘수련’의 삶을 실천하기 위해 시골로 이주해온 내 삶에 이 존재는 폐가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 다음날 아침 조용히 집으로 돌아왔다. 집이 고요했다. 그 유기견은 집에 없었다. 아내는 조용히 컴패션에 대해 말하기 시작하였다. 타인의, 타동물의 고통을 이해하고 감지하는 마음이 위대한 가르침의 핵심이다. 모든 생명은 지구라는 터전에서 자신의 고유한 위치를 찾기 위해 ‘고통’을 받는다. 영어단어 ‘패션’passion은 흔히 ‘열정熱情’으로 번역되는데, ‘고통의 받다’라는 라틴어 단어 ‘파티오르’patior에서 유래했다. 다른 존재의 고통(passion)을 민감하게 자신의 고통으로 함께(com) 여기는 마음이 ‘컴패션’compassion이다. 우리 주위의 고통을 받는 이웃, 더 나이가 고통 받는 동물에 대한 경각심이 ‘컴패션’이다. 패션과 컴패션은 인간의 품위를 지켜온 문법이자 혁신의 발판이다.



컴패션을 한자로는 표현하자면 ‘자비慈悲’이다. ‘사랑 자’慈는 상대방과 나와 간격이 가물가물해져 사라지고, 내가 상대방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배려다. 가물가물하다는 의미를 지닌 ‘현’玄이 두 개나 있다. 사랑은 내가 상대방한데 나의 감정을 토로하는 폭력이 아니라, 상대방의 처지를 깊이 헤아리고, 상대방이 행복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헌신이다. ‘슬플 비’悲는 상대방의 슬픈 처지와 운명에 악어눈물을 잠시 흘리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온전히 자신의 일을 찾아 행복할 수 있도록 애쓰는 마음이다. 그 사람은 내가 삶이라는 비행을 위해 꼭 필요한 다른 날개非이기 때문이다. 아내는 유기견을 보는 나의 시선이 반인문학적일 뿐만 아니라, 반종교적이며, 반인륜적이라고 말했다. 나는 유기견의 처지를 자비의 마음으로 볼 추호의 여지도 두지 않고 도망가 버린 비겁자卑怯者다. 아내의 말은 언제나 맞다. 자신과 운명적으로 만난 그 유기견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여겼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에서 자신의 생명을 구해준 유대인(벤 킹슬리)가 쉰들러(리암 니슨)에게 건내 준 반지에 새겨진 탈무드 문구가 생각났다. “한 영혼을 구하는 것이 온 세상을 구하는 것이다.” 이 문구에서 ‘영혼’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네페쉬’로 사람뿐만 아니라, 생명이 부여된 모든 생물을 의미하는 단어다.



3개월이 지났다. 아내는 그 유기견 이야기를 다시 꺼내었다. 그동안 아내는 나 모르게 이 아이에게 ‘예쁜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치료하며 줄곧 돌보아주었다. 그리고 이제 집으로 데려오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동의하였다. 예쁜이가 진돗개 두 마리와 한집에 살기 시작했다. 한동안 서열을 중요하게 여기는 샤갈과 벨라에 숨겨진 늑대 본능이 한 동안 이어졌다. 나는 이 상황을 염려하기 시작하였다.



어느 늦은 밤, 아내가 누군가와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아내는 샤갈-벨리와 대화하기 시작했다. 이 광경 또한 나로선 기이한 일이다. 그녀는 언제나 그랬듯이, 교황이나 대통령을 만난 것보다, 더 진지하고 진심으로 이야기를 하였다. 예쁜이가 가족이 되었기 때문에, 그들이 이젠 마음을 바꿔 그녀를 받아주어야 한다고 샤갈-벨라를 설득하고 있었다. 단지 몇 개의 단어로 천개의 상황을 진심을 담아 전달하고 있었다. 샤갈과 벨라도 또한 무언가를 눈빛으로 쏟아 내며 대답하였다. 마치 영화 <ET>에서 주인공 소년 엘리어트와 ET와 대화하는 것 같았다.



그 이후, 사실 이 일을 내가 동의했던 기적보다 더한 기적이 일어났다. 샤갈과 벨라의 변화다. 샤갈-벨라가 예쁜이를 받아들이기 시작하였다. 7살이 되어 몸의 움직임이 줄어든 벨라와 샤갈은 예쁜이와 함께 어울려 놀며 다시 운동량이 늘고 건강해졌다. 예쁜이의 얼굴에는 과거의 어두운 그림자는 사라지고 영민함과 존엄함이 깃들기 시작하였다. 예쁜이는 온 몸에 소나기처럼 쏟아지던 통증을 휘어 감고 거리에 버려진 채 얼어붙은 스티로폼을 뜯어먹고 있던 한 생명이었다. 아내는 예민한 예쁜이를 능숙하고 간결하게 다룬다. 항상 상대방의 입장에서 바라보기 때문이다. 상대의 통증과 역사를 추리해보면, 그 판단을 빠르다. 모든 동물의 감정과 고통이인간과 동일하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소통이 가능하다. 예쁜이는 한껏 마음을 열었다.



예쁜이는 누군가의 자비로 인하여 언제나 품위를 유지한 채가 내 옆에 다소곳하게 앉아있다. 예쁜이의 고통passion은 내 아내의 컴패션compassion을 묵묵히 기다리고 있었다. 이 둘이 조우할 때 기적이 일어난다. 예쁜이는 내안에 존재하는 신성인 ‘캠패션’을 일깨우기 위해 스스로 고통을 견뎌낸 신적인 존재다. 예쁜이는 오늘도 나의 마음가짐과 행동가짐을 가만히 지켜본다. 대화는 진심이 만들어준 선물이다. 오늘 나는 눈과 마음으로 말할 것인가? 아니면 입으로 말할 것인가? 고통 받고 있는 생명을 외면할 것인가, 돌볼 것인가?


 

오늘 아침, 내 삶에 들어온 유기견 예쁜이를 다시 생각해 보았다. 내가 이 시골에서 읍내에 떠돌던 예쁜이와 같이 살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무슨 인연이길 래, 우리는 같은 집에서 살고 있을까? 항상 두 손을 앞에 가지런히 놓고 앉아 나를 응시하는 예쁜이는 나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내가 눈길을 주기만하면, 꼬리를 살살 흔드는 저 고격한 동물은 누구인가?


​예쁜이는 나에게 미물微物이면서 거물巨物이다. 이 나로 하여금 신약성서 <마태복음> 25장 후반부에 등장하는 예수의 파격적인 말을 상기시켰다. 이 말은 예수가 ‘신성모독죄’로 십자가 처형을 받기 전, 제자들에게 당부한 유언이다. 이것이 복음서의 핵심이다. 예수는 인간들의 사후심판을 말한다. 마지막 날에 예수의 자기명칭인 ‘인자人子’가 천사들과 함께 땅에 내려와, 구원받을 사람과 저주받을 사람을 구별할 것이다. 착한 사람을 의미하는 동물인 ‘양’은 오른편에, 악한 사람을 의미하는 동물인 ‘염소’는 왼편에 몰아넣을 것이다.


​그는 왜 착한 사람들이 구원을 받게 되었는지 명료하게 설명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종교의 우월이나 교리 이야기는 없다. 평상시 종교시설에 꼬박꼬박 다녔다든가, 헌물이나 공량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특정 종교를 믿었기 때문에 구원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없다. 그들이 구원받은 유일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내가 배고팠을 때, 너는 나에게 먹을 것을 주었다. 내가 목말랐을 때, 너는 나에게 마실 물을 주었다. 내가 낯선 자(그리스어 xenos)였을 때, 나를 집으로 초대하였다. 내가 입을 옷이 필요할 때, 내가 입을 옷을 주었다. 내가 병들었을 때, 나를 돌봐주었다. 내가 교도소에 있을 때, 나를 면회 와 주었다.”


​그들은 예수의 말을 이해할 수 없어 그에게 묻는다. “우리가 언제 굶주린 당신에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른 당신에게 마실 것을 주었습니까? 우리가 언제 낯선 자된 당신을 보고 집으로 초대하였고, 헐벗은 당신에게 옷을 입혀주었습니까? 우리가 언제 당신이 병들거나 감옥에 감금되어 있을 것을 보고, 당신을 방문했습니까?” 그들은 구원을 받았지만, 아직도 자신들이 왜 구원을 받았는지 알지 못한다. 구원은 은총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종교, 그 종교를 설명하려는 교리, 그리고 교리를 정기적으로 가르치기 위한 공간, 그 공간에서 배운 예수의 모습만이 예수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그 모습은 허상인 경우가 많다.


​예수는 자신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알려준다. “내가 너에게 말하겠다. 너희들이 내 형제와 자매들 가운데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바로 나에게 한 것이다.” ‘지극히 작은 자’에 해당하는 그리스 단어는 ‘작은; 보잘 것 없는’이란 의미의 형용사 ‘엘라퀴스’elachys 의 최상급 ‘엘락시스토스’elachistos다. ‘엘락시스토스’는 크기, 양, 가치에 있어서 가장 미천한 생명이나 물건을 꾸미는 단어다. ‘지극히 작은 자’가 우리 주위에서 아무도 거들 떠 보지 않는 그런 존재들이다. 외국인 노동자, 고아들뿐만 아니라, 고통을 당하고 있는 동물들을 포괄적으로 지칭한다. 그(녀)에게 한 것이 바로 예수에게 한 것이다. 내가 일상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나 동물들을, 그 미물은 그냥 지나치면 나와는 상관없는 존재다. 그러나 나의 관심과 사랑을 쏟으면, 그 대상이 신적인 존재, 즉 거물이 된다.


‘낯선 자’는 나와는 상관없는 사람이나 생물일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나의 안전을 위협하는 원수일수도 있다. 야곱이 얍복강 가에서 만나 밤새 씨름한 무명의 낯선 자는 신이었다. 그는 더 이상 ‘발뒤꿈치; 얌체’를 의미하는 ‘야곱’이 아니라 ‘신과 씨름하여 이긴 자’인 ‘이스라엘’이란 새로운 이름을 부여받았다. 엠마오 출신 두 제자는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죽어간 예수를 보고 실의에 빠져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들을 길가에서 ‘낯선 자’를 만나, 그를 자신들의 집으로 초대하여 음식을 대접한다. 그 낯선 자가 예수였다.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공간과 시간에서만 신을 찾으려는 사람들은 이런 ‘낯선 자’를 무시하거나 적대시하고 ‘지극히 작은 자’를 피한다. 낯선 자중 ‘지극히 작은 자’는 나의 손길이 필요한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며 생명들이다. 이들은 내 안에 존재하는 ‘자비’를 일깨우기 위해, 스스로 고통을 짊어진 생명들이다. 내가 그들의 고통passion에 공감하여 내 안에 숨겨진 자비compassion를 일깨우면, 그 ‘지극히 보잘 것 없는 대상’이 예수가 된다. 그리스도교가 지난 2000년동안 생존한 이유는 이 단순하지만 감동적이며 강력한 명제 때문이다.


​예쁜이는 오늘도 나의 마음가짐과 행동가짐을 가만히 지켜본다. 내가 낯선 자를 어떻게 대하는지. 지극히 미물을 연민의 눈과 자비의 손길로 대하는지. 내가 일상에서 마주치는 미물微物안에서 거물巨物을 발견하는지. 내 안에 숨겨진 보물, 자비慈悲를 발동시키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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