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9.4. (木曜日, 247th/365) “당신은 무엇을 쓰고 있습니까?”
- Chulhyun Bae

- 2025년 9월 4일
- 4분 분량
2025.9.4. (木曜日, 247th/365) “당신은 무엇을 쓰고 있습니까?”
그림 1
<회개하는 히에로니무스>
유화, 1605, 145 x 101.5cm
바르셀로나 몬트세랏 수도원
기원후 4세기, 영원할 것 같았던 로마제국이 서서히 허물어지기 시작하였다. 게르만 고트족이 천천히 이민자로 가장하여 이탈리아를 침투하여 어느새 로마를 장악하게 되었다. 로마제국은 군사적으로 강력하고 경제적으로 부강하고 철학적으로 뛰어났지만, 자신의 멸망을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었다. 로마는 그 방안을 찾기 시작하였다. 로마제국의 멸망을 이성적으로 설명한 사상가가 아우구스티누스(354-430)였고, 로마제국의 유산을 이어가기 위해 히브리어와 그리스어로 기록된 성서를 라틴어로 번역한 히에로니무스(342-420)가 있었다.
아우구스티누스 로마멸망의 원인을 구약성서 <창세기>에 등장하는 인간의 타락 이야기에서 발굴하였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원죄를 지니고 태어난다. 아담과 이브가 신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훔쳐 먹었기 때문이다. 이 원죄설은 그 이후 서양 종교와 문화의 트로마가 되었다. 이제 로마제국의 얼개가 된 그리스도교의 경전은 라틴어로 번역되어야 했다. 구약성서는 유대인의 언어인 히브리어와 아람어로 기록되었고, 신약성서는 그리스어로 기록되어있었다. 히에로니무스는 어린 시절 로마로 유학하여 문헌학자인 도나투스 밑에서 라틴어, 그리스어, 수사학, 철학, 의학, 법학을 공부하였다. 그는 동방교회 수도사들의 수도 생활에 크게 감동하여 33살에 되던 해인, 375년 시리아 칼키스 사막으로 들어갔다.
히레로니무스는 운명적으로 안디옥에서 온 유대인 사제를 통해 히브리어를 공부하였다. 마침, 교황 다마소 1세의 부름을 받고 그의 비서 사제 노릇을 하며 히브리어로 기록된 구약성서와 그리스어로 기록된 신약성서를 라틴어로 번역하였다. 그는 교황 다마소 1세의 사망한 후도, 그의 번역작업은 진행되었다. 그,는 베들레헴에 수도원을 세워, 예수 탄생 성당 지하동굴에서 모녀지간인 제자 바올라와 제자 에우스토키움과 함께 히브리어 구약성서를 라틴어로 번역하였다. 그는 그 전에 그리스어에서 라틴어로 번역한 신약성서와 함께 ‘블가타’Vulgata라는 라틴어 성경책을 출간하였다. 1546년 트리엔트 공의회는 히브리어 구약성서나 그리스어 신약성서가 아니라, 히에로니무스의 불가타 라틴어 성경을 가장 공신력이 있는 성서로 인정하였다. 1592년 교황 클레멘트 8세의 명령으로 재출판된 <클레멘트 불가타성서>가 가톨릭교회의 가장 권위가 있는 성서 본문이 되었다. 히에로니무스는, 르네상스시대, 루터가 주도한 독일어 성서에 대항하여, 가톨릭 신앙의 원천을 보호하려는 가톨릭 종교개혁의 발판이었다.
카라바조는 이 가톨릭 신앙의 근간이 라틴어 성서를 만든 히에로니무스를 8번이나 그렸다. 그중 3장이 남아있다. 카라바조는 그는 1605년, 로마에 있을 때, 빈센초 지우스티니아니과 그의 동생 베네뎃토의 주문을 받아 <명상하고 있는 히에로니무스> (그림1)을 그렸다. 히에로니무스는 성경을 번역하는 동안 머리카락은 다 빠졌고 턱수염을 흰색으로 변했지만 희미한 후광을 달고 있다. 앙상한 몸은 주름진 살갗으로 아슬아슬하게 덮여있다. 그림의 배경은 암흑이다. 그가 작업하던 성경책, 깃펜, 잉크, 번역을 옮겨적을 종이는 없다. 번역이라는 노역으로 지쳐 왼손으로 붉은 색으로 덮인 책상을 잡고 왼손으로 책상에 팔꿈치를 대고 어느새 길게 자라난 수염을 어루만지고 있다. 왼편으로부터 강력하게 비춰오는 빛은 그의 이마에 내려앉아 이마와 미간에 새겨진 잔주름 고랑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그의 손과 얼굴이 붉게 그을린 이유는, 번역에 몰입하기 위해서는 낮에 수도원 정원에서 노동을 했기 때문이다. 그는 ‘노동이 기도다’(labore est orare)를 실천한 수도자였다. 책상 끝에는 해골이 놓여있다. 인생과 시간의 덧없음을 상징하는 물건이다. 히에로니무스는 시간을 초월하여 우리가 아직 읽고 있는 불가타 성서를 기록한 성인이다.
(그림 2)
<성경을 번역하고 있는 히에로니무스>
유화, 1605-6, 112 x 157cm
로마 로르게제 미술관
이 두 번째 그림은 교황의 사촌인 시피오네 보르게제 주교의 주문으로 그린 그림이다. 첫 번째 히에모니무스는 두터운 성경 사본을 왼손으로 들추며 무엇인가를 찾고 있다. 책상 위에는 사본 두 개가 펼쳐있고 중간에 있는 사본은 덮혀있다. 그림 1과는 달리 그는 오른 손 엄지, 검지, 중지로 정교하게 잡은 붓펜의 끝을 잉크병에 넣고 있다. 이 작업은 그의 육체와 정신뿐만 아니라, 영혼을 소진하는 작업으로, 펼쳐진 성경 위에 놓인 해골만이 그의 노고를 바라보고 있다.
세 번째 히에노니무스 그림은 로마에서 그린 이전 그림들과는 확연히 다르다. 카라바조는 1606년 가을, 자신의 연인이었던 필리데의 포주였던 토마소니를 살해하고 로마로부터 빠져나와 나폴리로 잠입한다. 콜로나 가문의 보호를 받아 나폴리에서 대형 제단화를 제작하며 이름을 날린다. 그러나 토마소니의 친적들이 카라바조가 나폴리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되자 다시 도망한다. 다시 카라바조의 비호세력인 콜로나 가문, 지우스티니아니 주교, 그리고 은행가 옥타비오 코스타의 주선으로 말타 섬으로 이동한다. 자신이 로마에서 저지른 살인죄를 씻을 유일한 방법은 독립국가의 지위를 획득한 말타의 성요한 교회로부터 공식적으로 기사 직위를 획득하는 것이었다. 이탈리아의 시실리와 북아프리카의 트리폴리의 중간에 위치한 섬 말타는 1530년부터 1798년까지 자치정부였다. 카라바조는 말타섬 성요한 기사단 단장인 알로프 데 위나쿠르트이 중재하면, 로마정부로부터 살인죄에 대한 사면을 받을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그림 3)
<성경을 번역하고 있는 히에로니무스>
카라바조 (1571-1610)
유화, 1607, 117 x 157 cm
말타섬 발레타 성요한 주교성당 기도실
말타섬은 오스만제국의 침공을 받은 아픈 기억이 있었다. 오스만제국은 1565년 5월 18일에 몰타섬을 침공하여 거의 넉달동안 장악하였다. 소위 ‘몰타 공성전’이다. 이때 나폴리 출신이며 교황 함대의 제독이었던 이폴리토 말라스피나(1540-1625)가 1565년 대공성전이 끝날 ‘그란데 소코르소’호를 타고 말타섬에 상륙하여 오수만제국과 물리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카라바조는 이폴리토 말라스피타를 위해 <성경을 번역하고 있는 히에로니무스>를 그렸다. 그가 2년전에 린 동일한 제목의 그림과는 완전히 다르다. 이 그림에서 히에로니무스는 성인이라기 보다는 실제 산전수전을 다 경험한 67세 노익장 군인의 모습이다. 왼편에서 조명이 그의 서재를 비춘다. 그 빛은 태양에 그을린 얼굴을 비춘다. 특히 정성스럽게 빗은 머리카락과 이마에 깊게 파인 주름을 비춘다. 그의 귀는 레슬링 선수의 귀처럼, 꽃양배추모양이다. 그의 코는 움푹 파였으며 새부리처럼 생겼다. 구리빛으로 그을린 얼굴과는 달리, 상반신은 창백하다. 그의 몸은 말랐고 갈빗대와 뱃살은 노화로 늘어지기 시작하였다.
책상 위에는 그가 번역하려는 그리스어 신약성서 혹은 히브리어 구약성서가 펼쳐져 있다. 그는 왼손으로는 잉크병을 잡고 펜을 든 오른 손으로 펼져진 종이 위에 라틴어 번역문장을 쓰고 있다. 책상 위에는 히에로니무스의 전설과 관련된 세 가지 물건이 놓여있다. 하나는 주먹으로 쥘만한 크기의 돌이다. 전설에 의하면, 성인은 이 돌로 가슴을 치면서 하루에 몇 번이고 잠을 깨우면서 번역하고 잘못을 뉘우쳤다. 두 번째 물건은 오른쪽으로 넘어져 있는 두개골이다. 눈과 코 자리는 비어있고 치아는 남아있는 치아는 빛을 받아 빛나고 있다. 세번째 물건은 아슬아슬하게 책상에 걸쳐있는 예수가 매달려 있는 십자가상이다. 카라바조의 마음 속에 숨어있는 아슬아슬한 운명의 상징이기도 하다.
성인의 왼편엔 자신의 붉은색 주교 모자가 걸이 못에 매달려 있다. 모든 것들이 그림자에 잠겨있다 성인은 나신으로 허리춤까지 올라온 흰색 내의와 붉은색 천으로 몸을 휘감았다. 이 히레로니무스는 학자라기 보다는 새벽에 그날에 치룰 전쟁전략을 짜는 말라스피나갔다. 그의 목 근육과 어깨뼈는 잔뜩 긴장하고 있다. 왜 카라바조는 성인을 말라스피나의 모습으로 그렸는가? 말라스피나는 유명한 전사였을 뿐만 아니라 가난한 이들, 고아, 과부들을 위해 헌신한 수도자이기도 했다. 말라스피나는 이 그림을 받아 몰타섬 수도인 발레타 공동대성당에 기증했다. 1984년 12월 누군가 스탠리 칼로 그림을 액자에서 도려내 도망갔다. 2년 후, 이 그림이 회수되어 원래의 모습이 복구되어 다시 전시되고 있다.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는 이 인생에서 우리는 무엇을 쓸 것인가? 가슴을 칠 돌과 두개골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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