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8.12.(火曜日, 234/365) “거룩한 독서의 네 단계”
- Chulhyun Bae

- 8월 15일
- 4분 분량
2025.8.12.(火曜日, 234/365) “거룩한 독서의 네 단계”
인생에서 매일 읽고 삶의 위안과 지침을 얻는 친구가 있다면, 얼마나 행복가! 나에겐 샤갈와 성서가 특히 그렇다. 지난 1년동안 줌으로, 매주 토요일 오전 10시에 자신의 삶에 변화를 추구하는 도인들과 복음서를 공부해왔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을 각각 10주씩 할애하였다. 나는 복음서의 핵심내용을 섬세하게 파악하기 위해, 그리스어와 아람어 원문을 읽고 직접 번역하고, 나름대로 코멘트를 달았다. 그리고 단톡방에 수업자료를 올리면, 참여자들이 각자 출력하여 토요일 오전에 만났다.
줌수업은 항상 명상음악으로 시작한다. 우리의 마음을 평화로운 들판으로 진입시키기 위해서다. 예수의 말씀들 듣기 위해서, 사람들이 초원에 좌정했듯이, 나와 참여자들이 음악을 들으면서, 마음을 가지런히 놓았다. 나는 복음서 원문, 번역과 함께 우리의 삶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를 설명한다. 복음서 내용에 관한 설명을 마치고, 그 주제에 관련된 영시를 소개하였다. 영적인 영시는 여백이 특히 커서, 우리 각자의 목소리를 채울 수 있다. 이 줌수업의 부제는 <자기치유를 위한 글쓰기>다. 참여자들은 내가 부과한 주제에 대해 글을 써서 제출하였다. 나는 글을 읽고 코멘트를 써서 돌려주었다. 8월 16일과 8월 23일, 두 번의 줌수업이 남았다.
이번 복음서 공부를 통해, 복음서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예수의 어록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자들이 재구성한 소위 Q문서가 아니라, 그 어록에 담긴, 자신의 영성을 찾아 헤매는 도인들을 위한 씨앗과 같은 핵심이다. 그것을 누군가가 잘 차려서 내 입에 가져다주는 ‘싼 복음의 씨앗’이 아니라, 우리 각자의 심령에 심어, 싹이 트길 바라는 ‘값비싼 복음의 씨앗’이다. 나는 소중한 복음의 씨앗을 현대인의 마음속에 파종하기를 시도한 20세기 최고의 소설가인 레오 톨스토이의 복음서와 그 파종의 과정 적은 ‘렉치오 디비나’로 알려준 수도승 귀고 2세(?-1188)은 네 단계를 통해, 향후 복음서 공부를 지속하고 싶다.
그리스도교가 부활할 수 있을까? 현대문화와 문명과 발을 맞추지 못해, 질식직전인 그리스도교가 재생할 수 있을까? 100년전 러시아 정교회의 몰락을 보고 놀란 톨스토이는 일생 말년에 The Gospel According to Tolstoy라는 책을 썼다. 톨스토이는 복음서 연구를 통해 당시 교회와 신학이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판단하였다. 러시아 정교회는 톨스토이를 파문하였다. 100년이 지난 지금, 톨스토이가 통탄하던 교회는 여전하다. 톨스토이 복음서는 러시아에서 출판이 되기도 전에 금서가 되었다. 왜 그는 <안나 카레니나>나 <전쟁과 평화>와 같은 위대한 소설을 쓰기를 그만두고, 오해의 소지가 있는 <톨스토이 복음서>를 출간했는가?
그는 복음서가 사람들을 개선시킬 수 있는 강력한 힘이 있는 경전으로 여겼다. 그는 예수의 가르침과는 상관이 없어 보는 내용, 특히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새로운 신자를 얻기 위해 만들어낸 기적 야기를 과감하게 제거하였다. 또한 는 만난 적이 없는 바울 서신서와 부활에 관한 이야기도 생략하였다. 그는 알렉산드리아 주교 아리우스(256-336)처럼, 구약성서를 정경으로 수용하기를 거부하였다. 그리고 예수는 스스로 자신을 메시아로 여긴 적이 없기에, 메시아에 관련한 부분을 대폭 삭제하였다. 허무주의, 무정부주의, 공산주의가 팽배한 러시아에서 불의와 맞서 싸웠다, 그는 예수의 말을 통해 러시아 사회가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하였다.
침묵과 묵상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봉쇄수도원인 카르투시오회 수도승 귀고 2세는 <수도승의 사다리>라는 책에서 성경공부를 신과 하나게 되는 중요한 과정이라고 여겼다. 그에게 성서를 깊이 읽고 행동으로 옮기는 영성수련인 ‘렉치오 디비나’는 그리스도교 전통의 대표적인 영성수련 방법이다. ‘렉치오 디비나’는 다음 네 개로 구성되어있다. 네가지는 단계가 아니라 상호부완적인 필요충분 관계다.
영적 사다리의 첫 번째 단계는 ‘렉치오’다. 귀고 2세는 이 책의 13장에서 ‘렉치오’를 이렇게 정의한다:
Est autem lectio sedula scripturarum cum animi intentione inspectio.
“성서 가운데 중요한 구절을 강렬한 혜안을 지닌 영으로 선택하고 읽고 경청하는 과정이 ‘렉치오’입니다.” 성경구절을 선별하고 읽는 행위는 대충 빨리 읽는 것이 아니라, 그 구절의 내적인 의미를 발굴하고 발견하기 위해 천천히 깊게 관철하고 조사하고 고찰하는 일련의 수련이다. 렉치오는 영적인 배고품을 달래기 위해, 자신에게 어울리는 가장 좋은 음식을 선택하고 자신의 입으로 가져가는 과정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독서자가 구별된 공간과 시간을 마련하여 고요를 유지해야한다. <시편> 46.10은 그 마음가짐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הַרְפּ֣וּ וּ֭דְעוּ כִּי־אָנֹכִ֣י אֱלֹהִ֑ים
<시편> 46.10
“고요하라. 그러면 내가 하나님인줄 알게 될 것이다.”
두 번째 단계는 ‘메디타치오’다. 나는 메디타치오를 ‘명상瞑想’이라고 번역하고 싶다. 명상은 자신이 선택한, 혹은 공부공동체의 리더가 제시한 성서본문을 가만히 관찰하는 행위다. 관찰은, 그 구절의 표면적인 의미를 뚫고 들어가 더 높이, 더 깊이, 더 넓게 보려는 엑스터시 연습이다. 명상은 일견이나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내용을 찾아내기 위해, 그 안에 보물이 숨겨있다고 믿고, 그것을 발굴하려는 행위다. 맛있는 음식이 입안으로 들어와 그것을 곱씹는 행위다. 적어도 70번은 씹어야, 그 구절이 지닌 의미를 몸으로 온전히 흡수할 수 있다.
그것은 마치 세례요한이 <요한복음> 1.26에서 말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존재다.
ἀπεκρίθη αὐτοῖς ὁ Ἰωάνης λέγων Ἐγὼ βαπτίζω ἐν ὕδατι·
μέσος ὑμῶν στήκει ὃν ὑμεῖς οὐκ οἴδατε,
“당신들 가운데, 당신들이 아직 알지 못하는 어떤이 서 있습니다.”
명상은, 우리가 그 전에 알지 못하던 의미를 구절을 통해 알아내는 과정이다. 호수에 그물을 던져 예기치 않게 큰 물고기를 건져 올리는 행위다.
세 번째 단계를 ‘오라치오’다. 오라치오는 청결한 마음을 지닌 독자가 간절하게 원하는 것을 신에게 말하는 행위다. 이 기도는 세상 살이를 하면서 편리함을 위해 구체적인 물건이나 성과를 신에게 무례하게 요구하는 협박이 아니라, 자신의 영혼에 어울리는 고유한 임무를 신과의 대화를 통해 자연스럽게 깨닫는 행위다. 수련자는 음식을 입으로 오랫동안 씹고 그것을 목구멍을 통해 내부로 넘기면, 새 힘을 얻는다. 오라치오는 자신이 선택한 말씀을 온전히 소화하여, 일상의 언행으로 표현하기 위한 준비다.
네 번째 단계는 ‘콘템플라치오’contempatio, 즉 ‘묵상默想’이다. 묵상은 자신이 머리로 깨달은 바를 심장으로 내리는 하심이며, 그 하심으로 하루를 사는 행동으로 연결하는 의연이다. 묵상은 사랑을 담은 operatio, 즉 행위로 자연스럽게 표현된다. 이 삶은 귀로 들은 대로 행하는 삶이다.
묵상의 삶을 바울을 <빌립보서> 4.8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ἃ καὶ ἐμάθετε καὶ παρελάβετε καὶ ἠκούσατε καὶ εἴδετε ἐν ἐμοί,
ταῦτα πράσσετε· καὶ ὁ Θεὸς τῆς εἰρήνης ἔσται μεθ’ ὑμῶν.
당신이 내 안에서 배우고, 듣고 본 것을, 행동으로 옮기십시오.
그래야 평화의 하나님이 당신과 함께 깃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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