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7.23 (水曜日, 204th/365) “상심傷心”
- Chulhyun Bae

- 7월 24일
- 5분 분량
2025.7.23 (水曜日, 204th/365) “상심傷心”
예수가 인간으로 태어났지만 그리스도라는 명칭을 부여받을 수 있었던 이유가 있다. 그가 맨 처음부터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통해 태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삶의 어려움이나 치명적인 질병이나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한 친구의 죽음을 자신의 어려움, 자신의 질고, 자신의 죽음처럼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컴패션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고 태어난 예수가 동료 팔레스타인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고 거절 당했지만, 그의 마음속에 있는 생명을 불쌍하게 여길 뿐만 아니라, 그 존재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행위로, 그는 가난뱅이 양부 목수의 아들에서, 하나님의 아들, 아니 하나님이 되었다. 신의 가장 큰 특징은 애통哀痛이다.
산천초목을 마음대로 훼손하는 자연이 애통하여 한 순간에 많은 비를 내렸고, 그 자연의 위력 에 인간 만든 도로와 가옥 뿐만 아니라, 산천초목이 넘어지고 소중한 생명들이 물과 함께 쓸려내려갔다. 어제 아침에 내 눈앞에 등장하는 연인산부근 마일리 광경은 충격 이었다. 눈앞에 펼쳐진 장면은, 전쟁터를 방불했다. 샤갈과 나는 차를 몰고 공무원들과 경찰들이 진입을 막는 현장을 갈 수 있는데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내가 2달전까지만해도 거주하는 조종면에서 연인산까지 거리는 6.5km다. 우리는 거의 3년동안 매일 아침 이 길을 따라 연인산 근처로 가서 주차를 하고 연인산 계곡과 그 지류 야산들을 등산하였다. 우리가 개발하는 등산-산책 길만 8개였다. 이 길을 따라 올라가면 40년전까지만해도 거주한던 화전민터가 등장한다. 이 곳에 앉아 이제는 떠난 그들의 삶을 기억하고 전나무 사이로 기꺼이 우리를 찾아오는 태양 광선을 온몸으로 맞으며 감사기도를 올렸다.
길을 따라 올라가면서 도로는 유실되고 다리는 파괴되고 시냇가에 옹기종이 건축되었던 팬션들은 무너져 흐르는 시냇가에 거꾸로 쳐박혀 있었다. 우리가 지나가면 진돗개 두 마리가 사납게 짖던 오두막집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진돗개는 자신의 집을 잃고 나와 샤갈을 물끄러미 보며 살려달라고 말한다. 지난 5일동안 먹지 못해 심하게 야위었다. 우리가 아직 넓은 쉘터를 마련하지 못해, 그 개를 데리고 가지 못해 가슴이 아팠다.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성서를 펼쳤다. <마태복음> 5장 4절이다:
μακάριοι οἱ πενθοῦντες, ὅτι αὐτοὶ παρακληθήσονται.
אשרי האבלים כי הם ינחמו׃
“복이 있는 사람은 누군가의 죽음을 보고 슬픈 감정을 표현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자신이 슬픔을 경험할 때, 타인이들이 와서 그를 위로할 것입니다.”
이번주 토요일 복음서 줌수업에서 <요한복음> 11장, 라나로의 부활 이야기를 공부한다. 베다니에 있는 마르다와 마리아의 동생 라사로가 죽은 지 사흘이나 지났다. 에수에게 라사로가 특별한 이유가 있다. 라사로의 누이인 마리아가 예수가 이 세상에서 이룰 수 있고 이루어야만하는 유일무이한 임무에 대해 아는 유일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와 동행한 남자 제자들은 아직도 예수가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른 상태였다.
예수는 마리아의 동생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베다니로 달려간다. 그를 마중하러 나온 마리아가 우는 것을 보고 우신다. 이 장면을 요한복음 11장 33절은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33 Ἰησοῦς οὖν ὡς εἶδεν αὐτὴν κλαίουσαν καὶ τοὺς συνελθόντας αὐτῇ Ἰουδαίους κλαίοντας, ἐνεβριμήσατο τῷ πνεύματι καὶ ἐτάραξεν ἑαυτόν,
예수께서 그녀(마리아)가 우는 것과 또 그녀와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셨다.
그의 심령이 성난 말처럼 분노하였고 몹시 괴로우셨다.
예수는 마리아가 우는 것을 보시고, 그의 영혼이 요동치기 시작하였고 마치 성난 말처럼 씩씩대며 분노를 내뿜었다. 예수는 스스로를 자제하지 못할 정도로 괴로웠다. 그리고 마리아와 그녀를 따라온 유대인들에게 물었다:
34 καὶ εἶπεν Ποῦ τεθείκατε αὐτόν; λέγουσιν αὐτῷ Κύριε, ἔρχου καὶ ἴδε.
그가 말씀하셨다. “그를 어디 두었습니까?” 그들이 말했다. “주님, 당신이 직접 오셔서 보십시오.”
예수는 라나로가 매장된 장소가 어디인지 묻는다. 그들은 당신이 직접 그 무덤으로 오셔서 그가 붕대로 감긴 채, 죽어 누워있는 것을 두눈으로 확인해야한다고 말한다. 예수를 라나로가 정말 죽었다는 사실을 이들의 말을 통해 확신하여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을 느꼈다. 그는 이 감정을 말로는 표현할 수 없었다. 입과 눈을 닫았다. 예수는 눈물을 주룩 흘렸다:
35. ἐδάκρυσεν ὁ Ἰησοῦς.
예수께서 우셨다.
<요한복음> 11장 35절은, 예수가 전한 최고의 복음이다. 그 복음은 머리에서 만들어져 입을 통해 나오는 말이 아니라, 그의 오장육부가 찢어지는 고통이 심장을 통해 눈으로 전달되어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이었다.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생명이 죽었을 때, 가장 고통스러워했다. 마치 어린아이를 잃은 어머니처럼, 그 모성애를 자신의 눈물로 표현하였다. 예수는 우는자와 함께 울었기 때문에 메시아가 된 것이다.
예수가 메시아인 이유를 예언자 이사야는 <이사야서> 53장 4-5절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נִבְזֶה֙ וַחֲדַ֣ל אִישִׁ֔ים אִ֥ישׁ מַכְאֹבֹ֖ות וִיד֣וּעַ חֹ֑לִי וּכְמַסְתֵּ֤ר פָּנִים֙ מִמֶּ֔נּוּ נִבְזֶ֖ה וְלֹ֥א חֲשַׁבְנֻֽהוּ׃
“그는 사람들로부터 멸시당하고 거절당했습니다.
그는 질고疾苦가 무엇인지 아는, 고통의 화신입니다.
그는 우리가 만나면 얼굴을 돌릴 그런 사람입니다.
그는 세상에서 멸시당해서 우리는 그를 중요한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אָכֵ֤ן חֳלָיֵ֙נוּ֙ ה֣וּא נָשָׂ֔א וּמַכְאֹבֵ֖ינוּ סְבָלָ֑ם וַאֲנַ֣חְנוּ חֲשַׁבְנֻ֔הוּ נָג֛וּעַ מֻכֵּ֥ה אֱלֹהִ֖ים וּמְעֻנֶּֽה׃
“그는 실제로 우리의 질고疾苦를 자신의 몸에 지고
우리의 고통을 자신이 달고 다닙니다.
우리는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손찌검을 당하고 매질을 당해
고난을 당한다고 생각합니다.”
상심傷心은 우리 삶을 인도하는 본질이다. 그러나 우리의 심장에 상처를 두는 일들을 대하는 두가지 방식이 있다. 하나는 새로운 삶을 위해 우리의 과정을 부수는 행위이거나, 다른 하나는 심장을 더욱 날카롭게 쪼개 더 많은 상처를 유발시키도록 허용하는 것이다. 산산조각난 심장은 수 천개 파편이 되어 더 큰 고통을 유발한다. 그러나 이 고통은 우리의 심장을 더욱 튼튼하고 고결하게 만드는 담금질이 되기도 한다. 상심을 통해 고결한 인간으로의 변신은 성인의 전유물이 아니다. 우리는 종종 주변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자들이 부활하여 신인이 되는 기적을 목격한다. 애통하고 상심하는 자는 자신의 마음을 자비로 개간하여, 어떤 어려움이 와도 극복할 수 있는 자신만의 해소책을 지닌 자다.
여기 애통하고 상심하는 우리를 위한 칼릴 지브란의 시가 있다.
A Tear and A Smile, Khalil Gibran
눈물과 미소, 칼릴 지브란
I would not exchange the sorrows of my heart
For the joys of the multitude.
And I would not have the tears that sadness makes
To flow from my every part turn into laughter.
저는 심장이 에이는 슬픔을
대중의 기쁨과 바꾸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슬픔이 제 모든 부분에서 흘러내리도록 만드는
눈물이 실없는 웃음으로 변질되는 것을 방치하지 않겠습니다.
I would that my life remain a tear and a smile.
A tear to purify my heart and give me understanding
Of life's secrets and hidden things.
A smile to draw me nigh to the sons of my kind and
To be a symbol of my glorification of the gods.
저는 제 삶이 눈물과 미소로 남았으면 좋겠습니다.
제 심장을 정화하고
삶의 비밀과 숨겨진 것들을 이해하는 눈물.
미소는 저를 동료인간들에게 다가 가게하고
미소는 제 방식으로 신에게 영광을 올리는 상징입니다.
A tear to unite me with those of broken heart;
A smile to be a sign of my joy in existence.
I would rather that I died in yearning and longing
than that I live Weary and despairing.
눈물은 아픈 심장을 지닌 자들과 저를 하나로 만듭니다.
미소는 제 존재 자체를 기뻐하는 표식입니다.
저는 차라리 지치고 절망하며 사는 것보다,
그리워하고 바라다 죽겠습니다.
I want the hunger for love and beauty to be in the
Deaths of my spirit, for I have seen those who are
Satisfied the most wretched of people.
I have heard the sigh of those in yearning and Longing,
and it is sweeter than the sweetest melody.
저는 제 영혼의 깊은 곳에서 사랑과 아름다움에
굶주리길 원합니다. 왜냐하면 저는 삶에 만족한 사람들이
가장 불쌍한 사람들이란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리워하고 바라는 사람들의 한숨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 소리는 가장 달콤한 선율보다 달콤합니다.
With evening's coming the flower folds her petals
And sleeps, embracing her longing.
At morning's approach she opens her lips to meet
The sun's kiss.
The life of a flower is longing and fulfilment.
A tear and a smile.
저녁이 다가오면, 꽃은 자신의 그리움을 껴안고,
자신의 잎을 접고 잠에 듭니다.
아침이 다가오면, 그녀는 잎을 열고
태양과 입을 맞춥니다.
꽃의 삶은 희구와 성취입니다.
눈물과 미소입니다.
The waters of the sea become vapor and rise and come
Together and are a cloud.
And the cloud floats above the hills and valleys
Until it meets the gentle breeze, then falls weeping
To the fields and joins with brooks and rivers
to Return to the sea, its home.
The life of clouds is a parting and a meeting.
A tear and a smile.
바다의 물은 수증기가 되어 올라
함께 모여 구름이 됩니다.
그리고 구름은 친절한 산들바람을 만날 때까지
언덕과 계곡 위에 둥둥 떠 있습니다.
그런 후 들판 위로 울면서 떨어져 시냇물과 강물과 합류하여
바다로 돌아옵니다. 바다가 고향입니다.
구름의 삶은 떠남과 만남입니다.
눈물과 미소입니다.
And so does the spirit become separated from
The greater spirit to move in the world of matter
And pass as a cloud over the mountain of sorrow
And the plains of joy to meet the breeze of death
And return whence it came.
마찬가지로 영혼도 위대한 영혼으로부터 분리되어
물질세계로 움직입니다.
구름으로 슬픔의 산을 지나고
기쁨의 평원을 지나 죽음의 산들바람을 만나
자신이 온 곳으로 돌아갑니다.
To the ocean of Love and Beauty-to God.
사랑과 아름다움이란 바라로, 신으로 돌아갑니다.
그림
<라사로를 살리심>
두초 디 부오니세나(1255-1319)
템페라화, 1311, 43 x 46cm,
텍사스 Kimbell Art Mus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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