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2.1. (木曜日) “공포恐怖”
수년전 예술의 전당에서 전시한 자코메티전에 참여하고, 당시 후원사였던 국민일보에 <나는 누구인가? 자코메티의 예술세계>를 20여회 연재하였다. 나는 당시 1940년대 초까지 그의 작품을 다뤘다. 예술가와 철학자의 만남은 상호간의 획기적인 시너지를 낼수 있다. 자코메티는 1946년, 우연히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와 만나면서 그의 작품이 달라졌다.
자코메티와 사르트르의 만남은 우연이면서 필연이었다. 자코메티는 자주 가는 카페 플로르에 앉아있었고 옆 테이블에 앉아 있던 한 낯선 자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저는 여기서 당신은 자주 보았습니다. 오늘 제가 돈을 가지고 오지 않아, 혹시 술값을 내 주실 수 있습니까?” 그가 바로 사르트르였다. 사르트르는 작고 땅딸하고 보기에도 무거운 뿔테 안경을 끼고 오른쪽 눈은 거의 실명하여 사람을 왼쪽 눈으로 비스듬하게 보이게 첫인상은 좋지 않았다. 그러나 부유한 부르주아 집안에서 태어나 일찍이 철학공부를 하고 저서를 통해 유명인사가 되었다. 그 옆에 있는 늘씬하고 아름다운 시몬 드 보부아르가 있었다. 그들은, 이성적인 끌림이라기 보다는 이상적인 끌림으로 환상의 커플이 되었다. 그들은 부르주아이면서, 당시 프랑스의 모든 부르주아적인 관습과 거부하고, 당시 프랑스 사상의 근간이 된, 선과 악의 구분이 상징하는 이원론을 단호히 거부하였다.
사르트르는 당시 자신이 집필하고 있는 <존재와 무>를 그에게 늘어놓았다. 그가 삶의 실존적인 문제, 특히 무에 관해 매료되기 시작한 시점이다. 이 둘의 지적인 교류는, 그의 획기적인 스타일로 조각으로 등장하였다. 문학을 삶을 자세히 설명해주고, 종교는 삶에 희망을 주지만, 예술은, 천재적인 예술가를 통해, 삶을 한 단계 높은 곳에서 응시하게 만든다.
오늘 아침 산책을 다녀 온 후, 새로 시작하는 1월은, 영어단어 January가 뜻하는 것처럼, 새로운 시간으로 들어가는 문자방Janus다. 새로운 시간으로 들어간 후에 해야 할 일은 정화淨化다. 2월을 의미하는 February는 ‘정화의식’을 의미하는 라틴어 단어 fabrua에서 유래했다. 예술은 언제나 나의 마음을 정화한다. 훌쩍 가버린 1월을 아쉬워하면, 자코메티의 조각작품을 다시 들여다 보기 시작하였다. 내가 다시 응시하기 시작한 작품은 그가 1947년에 제작한 <막대 위 머리>다. 그는 이 작품에서 인간이 모두 품고 있는 공포를 표현하였다.
우리는 종종 공포라는 괴물에 사로잡힌다. 괴물은 영화에서 나오는 무시무시한 모습이 아니라, 오히려 모습이 없는 무형無形이라 더 무섭다. 그 괴물이 내는 소리는 귀를 먹게 하는 굉음이 아니라, 모든 소리가 사라지는 심오한 무음無音이다. 감히 그 앞에서 입口이 서질立 않는다. 또한 그 괴물은 빛을 반사하지 않고 블랙홀처럼 삼켜버리는 무색無色이며 암흑이다. 공포는 없음과 있음조차 존재하지 않는 빔이다.
1946년 자코메티는 어두운 빈방에 홀로 앉아 친구들에게 일어난 엄청한 공포를 헤아리고 있었다. 자신은 안전하게 스위스에서 예술 활동으로 연명하고 있었지만, 많은 유대인 친구들은 나치스의 홀로코스트로 가스실에 들어가 숨이 없어 죽고, 다른 유대인들과 함께, 시체 더미에 던져져, 완전연소되어 사려졌기 때문이다. 그는 이차세계대전 후에, 다시 파리로 돌아와 조각을 시작했지만, 도무지,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가 앞으로 20년동안, 죽기 전까지 그의 예술을 펼칠 수 있는 본능적이며 사적인 예술혼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마도,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를 잡은 죄의식때문이었다. 그는 히틀러의 무력 앞에 너무 무기력했기 때문이다.
예술가로서 삶의 의미, 즉 희망의 불씨를 일굴 실마리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전까지 앙드레 브레통의 친구로 1920년대 초 프랑스에서 시작한 쉬르레알리즘을 통해, 인간의 비합리적인 잠재의식과 프로이트와 융이 발전시킨 꿈의 세계를 조각으로 표현해왔다. 그는 이전에 뼛속까지 초현실주의자여였지만, 그는 이제 전쟁후post-war 예술가로 변신한다.
초현실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장 폴 사르트의 영향을 받고, 사르트르는 초현실주의가 지닌 신비주의, 엘리트주의, 비사회적, 비정치적, 비철학적인 분위기와 결별하기 시작한다. 는 세계대전이 모든 사람들을 잠에서 깨어나게 만드는 총성이며, 그 공포는 브레통의 문법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자코메티는 1947년, 자신의 이전 작품과는 다른, 상상력을 기반으로 세 작품을 내 놓았다: 막대 위 머리, 코, 손. 이 작품들은 그가 기고한 “꿈, 술집 스핑크스, 그리고 T(orio)의 죽음”이란 글에 대한 코멘터리다. 이 세 작품은 세계대전의 공포와 그 안에서 생존해야하는 인간의 운명에 대한 명상이다. 자코메티가 1947년에 완성한 <막대 위의 머리>라는 작품은 인간이란 존재가 그 존재의 정반대인 ‘무’와 마주쳤을 때, 그를 사로잡는 가장 원시적인 ‘공포’를 표현하였다. 존재를 기반으로 사는 인간이 ‘없음’을 감지하거나 이해할 수 있을까? 이 작품은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살고 있는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이자, 좀처럼 드리내고 싶지 않는 타부다.
서양철학에서 기원전 5세기 파르메니데스Parmenides는 ‘무’에 관한 탐구를 시작하였다. 그는 ‘무’가 존재할 수 없다고 확신하였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말할 때, 우리는 존재하는 무엇을 언급하기 마련이다. 그것은 과거에 존재했던 어떤 것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과거에 존재하지 않은 것, 비-존재, 혹은 ‘무’가 존재할 수 없다. ‘무’조차 물질로 표현하기 원했던 원자론자들은 만물을 변화하는 존재라고 여겼다. 만물의 움직임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공허’空虛다. ‘공허’는 존재의 반대다. 공허는 ‘비존재’ 즉 ‘무’다.
우주에는 개별 존재와 더불어 물질이 그 안에 충만하여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절대 공간’absolute plenum이 있다. 이런 공간이 수없이 존재한다. 이 공간은 후에 레우키포스의 제자이며 ‘원자론’의 창시자인 데모크리토스 (기원전 460-370년)에 의해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것’이란 의미인 ‘아톰’atom으로 명명되었다. 우주 안에 많은, 원자들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원자와 원자들 사이에 필연적으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빔이 존재해야 한다.
자코메티는 <막대 위에 머리>에서 긴 막대 위에 옆으로 45도 누운 반달 모양의 머리를 끼워 올렸다. 마치 십자가상의 예수와 같이, 자신의 스타일을 적나라하고 보여준다. 입은 반쯤 열렸고, 눈이 존재하지 않는 공허한 눈구멍이, 그 안에 인간의 인식을 가능하게 만드는 뇌를 제거한 해골만이 쇠막대 위에 달려있다. 몸은 이미 잘려 사라졌거나, 고통이 너무 심해, 몸을 감지할 능력이 소진하였다. 그가 할수 있는 일은 입을 벌려, ‘어찌 이런 일이!’라는 외침뿐이다.
목이 없이 머리만 막대 위에 올려져 있다. 이것은 나치스의 만행에 대한 항거다. 인류를 전쟁을 치루면서 자신들이 점령한 도시민들의 사기를 근본적으로 분쇄하기 위해, 높다란 막대 위에 시신을 매달아 전지하였다. 이 조각을 가만히 응시해보자. 몸으로부터 분리된 해골 조각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조용한 비명이 들린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외친 “저들이 하는 일을 저들이 알지 못합니다.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라는 극한의 고통과 동반한 외침이다. 자코메티는 회반죽 얼굴 표면에 황토색 칠을 더해 보는 사람의 감정을 고조시킨다. 그는 청동보다는 회반죽을 이용하여 감정을 좀 더 드러낼 수 있는 표식과 선을 표현하였다. 그가 쳐다보고 있는 허공은 절대적인 부정으로, 사르트르의 허무주의나 도킨스의 무신론이 아니라 오히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형태가 없는 bildlos 삼라만상의 원칙이다. 그 원칙은 모든 영혼들이 마침내 돌아가야 할 고향이기에 그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 ‘순야타’sunyata다.
사진
<막대 위 머리>Tête sur tige
조각가 알베르토 자코메티Alberto Giacometti
색을 가미한 회반죽, 1947, 54 x 19 x 15 cm
자코메티 파운데이션, 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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