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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5.18. (木曜日; 518기념일) “취사선택取捨選擇”

2023.5.18. (木曜日; 518기념일) “취사선택取捨選擇”

하루는 선택選擇이 아니라 취사선택取捨選擇을 수련하는 훈련장이다. 우리의 감정을 요동치게 만드는 뉴스가 TV와 핸드폰을 통해 끊임없이 흘러나온다. 도무지 경청할만한 이야기가 하나도 없다. 신문도 예전만 못하다. 표피적이고 자극적인 내용으로 도배한다. 그나마 한 달에 5불정도 지불한 뉴욕타임즈가 관심뿐만 아니라 유용한 정보를 선물해준다. 어제 크리스티에서 3천8백만 달러, 한화로 오천억원에 낙찰된 Codex Sasson기사가 나를 매료시켰다. 서양문명과 문화의 근간을 이루는 히브리 성서의 가장 오래된 9세기 코텍스가 보존되어 팔린 것이다. 913년 알렙포 코덱스, 그리고 11세기 레닌그라트 코덱스를 능가하는 책이다.

하루는 내가 조각해야 할 작품이다. 이 작품을 아름답게 완성하기 위해서 굳이 알지 않아도 되고, 쓸모도 없고 거추장스러운 정보들을 버리고, 내가 오늘 완성해야할 한가지에 집중해야한다. 이시대 문명의 이기라고 불리는 핸드폰은, 다른 기계처럼, 장단점이 있다. 내가 원하는 정보를, 예를들어 Codex Sasson과 같은 정보를 제공해주기도 하지만, 굳이 알지 않아도 되는 가상화폐와 그것에 중독된 환자에 대한 이야기가 사생활을 쉴 새 없이 침범한다.

내가 하루를 경계警戒하지 않으면, 뉴스로 위장한 폐기물들이 내 생각을 오염시켜, 내가 올곳이 가야 할 길을 방해하고 희미하게 만들 것이다. 나를 구태의연하고 창피한 어제의 나로 되돌릴 것이다. 나는 오늘 로마 황제 아우렐리우스가 삶의 원칙으로 삼았다는 ‘헤게모니콘’hegemonikōn, 즉 자신의 삶을 관찰하고 검토하는 이성으로 나에게 물밀 듯 다가오는 만사를 제어하고 관찰할 것이다.

무엇을 선택한다는 말은, 무엇을 버린다는 말과 같다. 선택은, 깊은 생각을 통해, 그 과정과 결과를 상상하고 예측하여, 지금을 대하는 정교하고 엄격한 삶의 태도이다. 지금-여기에서 나에게 최선인 것을 알아내는 능력이 안목眼目이며, 그 혜안을 감히 실행하려는 행위가 용기勇氣다. 자신에게 최선이 무엇인지 고민한 적이 없는 사람이 언제나 무식無識하다. 글을 몰라 무식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스스로 돌보는 훈련을 받지 않기 때문에 무식하다. 배운 사람, 학력이 좋은 사람일수록 무식한 경우가 많다. 자신이 과거의 알고 있는 내용이, 진리라고 착각하고 타인에게 우기기 때문이다. 유식有識은 즉흥적이며 포용적이다.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이, 자신이 앞으로 깨달을 지식에 비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그(녀)는 언제나 겸손謙遜하다. 그는 자신의 말과 행동이 최선이란 사실을 알기 때문에 동시에 거침이 없다. 그의 언행은 처음이자 마지막이며, 수단이자 목적이다.

여기, 한 순간의 취사선택을 통해 그리스도교라는 웅장한 건물의 틀을 잡은 사람이 있다. 아프리카 알제리출신 신학자이자 철학자였던 어거스틴이다. 어거스틴은 흑인이었을 것이다. 예수는 앞으로 등장한 ‘그리스도교’의 청사진을 찍었고, 바울과 베드로는 그리스도교의 터전을 마련했으며, 어거스틴은 그리스도교의 외벽을 건축하였다.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는 입시를 앞둔 한국의 어머니처럼, 아들을 성공을 위해 일생을 헌신하였다. 그녀는 어거스틴을 싸가스테Thagaste라는 시골이 아닌 카르타고Carthago라는 로마식민지의 번화한 도시로 유학 보냈다. 어거스틴은 로마도시의 방탕한 생활을 즐기면서도, 동시에 로마제국이 멸망한 이유를 찾고 있었다. 그는 지적으로 군사적으로 월등한 로마제국이 북에서 몰려오는 고트족의 침입에 힘없이 무너지고 있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가 학생시절부터 삶의 모델로 삶았던 키케로의 ‘호르텐시우스’라는 책을 통해 이성이 야만을 이긴다고 신봉해왔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플라톤철학으로 대변되는 이성철학이 실제의 삶에는 적용되지 않는 탁상공론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 대안을 찾았다.

그를 지적으로 유혹한 사상은 로마 군인들이 파르티아를 침공하면서 알게 된 ‘마니교’였다. 마니교는 그리스도교, 유대교, 이집트 종교, 힌두교, 신플라톤주의를 융합하고, 극도의 이원론을 기초한 종교였다. 그는 9년 동안 마니교에 심취하였다. 마니교는 세상에는 악의 세력과 선의 세력이 다투고 있으며, 세상에 일어나는 불행은 악한 세력의 독자적인 활동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던 중, 마니교 최고 지식이며 사제인 파우스투스Faustus를 만난다. 어거스틴은 그의 겸손함에 매료되지만, 자신이 알고 싶은 로마멸망의 원인에 대한 해답을 얻지 못해, 실망하여 마니교를 떠난다.

어거스틴은 당대 모든 지식인들이 흠모하는 이탈리아 밀란의 수사학 교수 자리를 차지하였다. 그는, 어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 밀단 성당에 다녔다. 그곳에서 대주교이자 당시 최고의 신학자였던 암브로시아Ambrosia의 설교를 듣기 시작한다. 어거스틴은 자신이 매료된 그리스-로마 철학서적에 비해 그리스도교 복음서는 수준이 낮다고 여겼다. 그는 수사학교수로서 암브로스가 설교를 전개하는 수사학적 기술을 높이 평가며 즐겼다. 어거스틴은 남들이 부러워하는 밀단대학의 수사학교수였지만, 그의 삶을 지루하고 신명神明이 없었다. 수사학이라는 분야가, 자신이 처한 로마제국의 위기를 설명하지 못했다.

어거스틴은 386년, 밀라도 대학에서 수사학을 가르치던, 무료한 교수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 알리피우스와 밀란의 한적한 교외에 있는 빌라로 들어가 이집트 사막에서 홀로 수도 생활한 성 안토니우스의 자서전을 읽는다. 안토니우스는 그리스도교 수도원을 창시자다. 어거스틴은 이 빌라의 정원으로 들어갔다. 어거스틴은 건물에서 멀리 떨어져 동산 중앙에 앉았다. 그는 이 순간을 이렇게 묘사한다. ‘나는 나 자신 안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그는 자신을 응시하기 시작하였다. 그 후 자신의 상태를 이렇게 설명한다.

“나는 내자신을 깊이 응시하여, 나의 가장 깊은 은닉된 장소에서 창피한 기억들을 모두 꺼냈다.

내 마음이 볼 수 있도록 진열하였다.

그 순간 거대한 폭풍이 바로 그 기억들을 강타하였다.

내 눈에서 눈물이 한없이 흘러나왔다.

나는 그 기억들을 구역질하듯 모두 토해냈다. 옆에 있었던, 알리피우스부터 급히 뛰쳐나왔지만,

나는 울기 위해서 혼자 있어야만 했다.

나는 더 깊은 곳으로 떨어져 이동하여, 그의 존재가 나를 방해하지 않았다.”

<고백론> 8권 28단락a

어거스틴은 한참 울었다. 어찌나 울었든지 자신의 과거 행위에 대한 깊은 회한으로 역겨운 눈물이 날 정도였다. 그 순간, 어거스틴은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정원에 딸린 집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소리였다. 그 목소리가 소녀의 목소리인지 아니면 소년의 목소리인지 구분되지 않았다. 어거스틴은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었다. 그는 이제 자신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희미하게 울려오는 섬세하고 미세하지만 강력한,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를 소유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눈으로 자신의 심연을 응시할 수 있었고 자신의 귀로 내면의 소리, 침묵의 소리, 정적으로 소리를 경청하게 되었다. 이 목소리는 엘리야가 들었다는 ‘섬세한 침묵의 소리’였다. 그가 들은 이 목소리는 이것이다.

‘톨레 레게’tolle lege.

이 라틴어 표현은 ‘취하여 선택하여라!’란 의미다. 취사선택하라는 신의 목소리이자 동시에 눈물로 정화되고 변화된 어거스틴 자신의 목소리였다. ‘톨레’tolle는 고속도로의 톨게이트tollgate에서도 알 수 있듯이, ‘벌금을 부과하다; 사용료를 지불하다’란 의미다.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가기 위해, 특정한 고속도로를 상용했기 때문에, 그 사용료를 지불해야한다. 라틴어 ‘톨레레’tollere는 ‘선택하다; 집어 들다;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지다’란 의미다. ‘레게’lege는 ‘읽다’란 라틴어 동사 ‘레게레’legere에서 파생한 단어로 더 근본적인 의미는 ‘선택하다; 추리다’란 의미다. ‘톨레 레게’tolle lege를 번역하자면, ‘(한 가지 원칙을 선택하여) 집어 들고 (그 선택한 것을 너의 삶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말로 알려라!’란 의미다.

어거스틴이 자신의 양심의 소리를 듣고 분연히 일어섰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들었는지 기억할 수 없었다. 더 이상 눈물을 흘리지 않고, 기뻐 날뛰었다. 그는 신적인 무엇이 그를 움직인다고 생각하여, 성서를 ‘들어올려’ 아무렇게나 펼쳐진 성서의 첫 문장을 ‘읽었다.’ 그는 사막의 수도자 안토니우스도 이런 식으로 소리를 들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였다. 안토니우스가 들은 소리를 이것이다. ‘너는 모든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고 나를 따르라!’였다. 어거스틴이 성경책을 들고 펼쳐 읽었다.

“낮에 행동하듯이, 단정하게 행합시다.

호사한 연회와 술취함, 음행과 방탕, 싸움과 시기에 빠지지 맙시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으십시오. 정욕을 채우려고 육신의 일을 꾀하지 마십시오.”

그가 읽은 내용은 <로마서> 13.13-14였다. 어거스틴이 이 구절을 읽자, 빛이 등장하여 그를 감쌌다. 어거스틴은 과거의 어거스틴이 아니라 미래의 어거스틴이 되었다. 그의 삶은 단정端正해졌고, 타인과 경쟁하여 제압하려는 삶이 아니라, 더 나은 자신이 되기 위해 투쟁하고 수련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이제 신의 의복을 입은 자로, 신처럼 행동하게 되었다. 그는 서양의 고대를 마감시키고 중세를 일으키는 사상적인 토대를 마련하였다. 나는 나에게 주어진 삶에서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나는 무엇을 버릴것인가? 그리고 나는 무엇을 집어들 것인가?

사진

<어거스틴의 회심>

이탈리아 화가 프라 안젤리코(1395-1455년)

템페라화, 1435, 21.8 cm x 34.2 cm

프랑스 북서부의 항구도시 셰르부르 옥트빌 토마장리 미술관Musée Thomas-Hen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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