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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3.24. (金曜日) “허공虛空”

2023.3.24. (金曜日) “허공虛空”

알베르토 자코메티(1901∼1966)에게 아버지는 멘토 같은 존재였다. 그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예술가의 길에 들어섰다. 자코메티는 1930년대 초현실주의라는 아방가르드 예술에 심취하면서 아버지의 영향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이런 시도는 ‘자유’라기보다는 ‘탈출’이었다. 전통적인 신인상주의 화가였던 아버지는 아들이 초현실주의자들과 교류하면서 지그문트 프로이트 심리학에 심취해 성적으로 노골적인 작품을 만드는 걸 탐탁지 않게 여겼다.

1933년, 65세였던 아버지는 노환으로 요양소 신세를 지게 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코메티는 아버지가 뇌출혈로 쓰려졌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인 스위스 스탐파로 향한다. 하지만 아버지는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 그는 자신에게 예술이라는 일생의 소명을 알려준 아버지의 죽음에 당황했다. 집안의 맏아들로 모든 장례 절차를 맡아야 했지만, 그는 요양병원에서 꿈쩍도 하지 않고 병상에 누워 며칠을 보냈다.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그는 며칠 후 다시 프랑스 파리로 돌아갔다. 왜 자코메티는 이런 기이한 행동을 했을까? 그는 아버지의 죽음 이전까지, 아버지의 예술세계인 자연을 아름답게 모방하는 방식으로부터 강제로 자신을 분리시키는 예술을 시도하기 위해 초현실주의에 탐닉하였다. 그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환자처럼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다. 자코메티는 아버지라는 ‘존재의 기반’이 사라지면서, 자신이 스스로 독립할 수 있는 예술을 모색한다. 자신이 만든 초현실주의 작품들은 아버지 예술에 대한 반항이 만든 작품이지,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 자코메티는 33년 8월 ‘소노(Sonno)’라는 시를 쓴다. 이탈리아어 ‘소노’는 ‘잠’이면서 ‘나는 ∼이다’라는 뜻이다. “나는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전에는 두려웠다. 죽음이 언제나 나를 쫓는다. 지금, 아무것도 없다. 나는 이 고요가 두렵다.”

그는 초현실주의 잡지에 몇 달 전에 아버지를 살해하는 판타지를 기고했는데, 바로 그 아버지는 죽고, 끔찍한 고요만 남은 것이다. 자코메티는 이 편지를 쓰고 아버지를 위한 기념 전시회를 준비했지만, 친구라고 믿었던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은 스탐파로 오지 않았다. 자코메티는 초현실주의 사상과 예술에 실망했다. 그는 허공에서 길을 잃었다. 설상가상으로 33년부터 35년까지 자코메티의 두 삼촌이 연달아 사망하였다. 홀로 남겨진 자코메티는 아버지의 자연주의도 아니고, 초현실주의자들의 추상심리학적인 것도 아닌, 자신만의 예술 형태를 찾아 나섰다. 34년 자코메티의 일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나는 새로운 조각을 작업할 것이다. 나는 새로운 것들을 쓸 것이다. 그것들이 형태를 드러낼 것이다. 종교 국가 자본주의 정치에 대항하여 나는 어떤 새로운 계시를 간절히 원한다. 나는 그것을 소유할 것이다. 새로운, 완전히 새로운 조각을 전시할 것이다.” 그의 견딜 수 없는 외로움은 그가 34년에 남긴 ‘자화상’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그림에는 무엇인가를 아직 찾지 못한 아쉬움과 찾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자코메티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자신만의 예술을 시도한다. 그는 초현실주의 사상과 친구들로부터 자신을 분리시켰다. 시가 초현실주의 사상을 대치하여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는 내면의 세계를 탐구하고 그 결과물을 글로 옮겼다. 처음으로 실물 크기의 나체 여성을 석고로 제작했다. 그런 후에 다시 청동으로 만들었다. 자코메티가 만든 ‘보이지 않는 물건’은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자코메티의 ‘묵상’이라고 할 수 있다. 자코메티는 이 작품을 자신을 혁신하기 위해 만들었다.

‘보이지 않는 물건’은 보이지 않는 어떤 살아있는 것을 보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우리 눈앞에는 실제 크기의 여성이 서 있다. 원래는 그녀의 엉덩이 오른편에 신비한 새를 조각했다 제거했다. 그녀의 사지는 곤충의 사지처럼 가늘고 매끈하고 딱딱하다. 그녀는 자신의 정강이를 직사각형 판자에 기대고 있다. 두 손을 가슴 앞으로 올려 우리는 볼 수 없는 무엇인가를 정성스럽게 들어 올리고 있다. 이 행위로 그녀는 우리의 시선을 유혹한다.

그녀는 우리의 관심을 끈, ‘보이지 않는 어떤 것’에 매료돼 깊은 침묵에 진입했다. 우리가 확실하게 관찰할 수 있는 얼굴 표정에서 그녀는 이 물건의 존재를 우리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그녀는 마치 처형대에서 형벌을 기다리는 것처럼 보인다. 그녀는 앉아 있는 것도 아니고 서 있는 것도 아니다. 커다란 눈은 간절히 무언가를 바라고 있다. 좌절이 얼굴에 드러나 있다. 그녀의 긴 상체는 세 부분으로 구별된다. 정교하고 단단한 가슴, 전체적으로 약간 튀어나온 배, 그리고 가느다랗고 긴 손가락. 손과 팔은 역동적이다. 두 손은 서로 대화하고 있다. 두 손으로 무엇인가를 탐구하고 축복하는 듯하다.

자코메티는 이 작품을 만들 때 자신의 대부인 화가 퀴노 아미에의 ‘희망과 덧없음’에서 영감을 받았다. 아미에는 아내인 안나가 첫 아이를 출산했을 때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들의 아이는 사산아였다. 그림은 아미에의 슬픈 감정을 그대로 드러낸다. 아미에는 이 그림을 침대 위에 두었다. 자코메티는 어려서부터 할아버지와 같은 아미에의 불행을 잘 알았지만 그 의미를 깨닫지 못했다. 그는 아버지가 죽고 나서야 왜 아미에가 이 그림을 침대 위에 달아놓았는지 깨달았다. ‘희망과 덧없음’에는 어머니와 아이가 모두 두 손을 펼치고 있다. 이 그림, 특히 허공을 어루만지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 물건’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자코메티가 ‘보이지 않는 물건’을 석고로 작업할 때엔 만들어 놓았다가 청동으로 제작할 때 제거한 새는 죽음을 상징한다. 아울러 그 새는 바로 아버지를 상징할 수 있고 아버지와 연관된 자신의 과거 예술 세계일 수도 있다. ‘보이지 않는 물건’에서 나의 눈길을 끄는 것은 바로 손가락의 정렬과 배치다. 자코메티는 자신이 표현하려는 대상을 완벽하게 구현하고자 했다. 그는 종종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내 작업실에서 며칠 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내 책상 위에 있는 물건들의 정확하고도 만족스러운 배치를 찾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정말 고통입니다. 내가 그것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나는 방을 떠나거나 약속 장소로 나갈 수가 없습니다.”

‘보이지 않는 물건’은 또 다른 이름이 있다. ‘허공을 잡는 손들’이다. 자코메티는 아버지가 죽은 후 이 작업을 시작하여 1년 만에 이 작품을 완성하였다. 아버지가 떠난 후, 자신을 진심으로 응원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어머니 아네타는 도덕적으로 엄격한 사람이었다. 그는 아버지와 같은 사랑을 자코메티에게 주지 못했다. 자코메티는 처음으로 ‘공허’라는 감정을 깊이 인식했다.

‘없음’은 추상이다. 덜고 덜어 더 이상 남아있는 것이 없는 상태다. 없음은 ‘있음’의 반대다. 역설적으로 있음을 존재할 수 있게 하는 게 없음이다. 책상 위에 볼펜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그 주위에 없음이라는 공간을 전제해야한다. 그러므로 없음이 결코 없음은 아니다. 자코메티는 이 없음을 작품으로 표현하기 시작하였다.

‘보이지 않는 물건’은 없음에 대한 자코메티의 첫 묵상이다. 그는 이제 없음을 기꺼이 수용한다. ‘창세기’ 1장 2절은 우주 창조 이전의 상태를 ‘공허하고 혼돈하다’라고 표현했다. 바로 이것을 뜻하는 히브리어 표현인 ‘호후 와보후’는 히브리어 성서에서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 단어다. 창조 이전의 상태를 표현할 방법이 없어, 의성어로 목에서 밖으로 나오는 숨소리를 흉내 낸 것이다.

자코메티는 존재를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비존재를 묵상하기 시작했다. 그가 인간 존재의 의미를 역설적으로 비존재에서 탐구하면서, 그의 자유롭고 창의적인 예술도 시작되었다.

사진

<보이지 않는 물건: 허공을 잡고 있는 손>

자코메티, 1934. 청동

워싱턴 국립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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