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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14. (日曜日) “방황彷徨” (<신곡: 지옥편> 제1노래 1-9행 번역과 해설)

사진

<숲으로 들어가는 단테>

프랑스 삽화가 구스타브 도레

삽화, 1961

2021.11.14. (日曜日) “방황彷徨”

(<신곡: 지옥편> 제1노래 1-9행 번역과 해설)

2021년, 아직도 코라나는 기승을 부리고, 대선을 앞둔 대한민국은 소용돌이도 빠져들고 있는 이때, 나는 대한민국의 좌표를 단테의 <신곡>의 해석을 통해 확인하고 싶다. 단테는 지금 보다 더 혼란스럽고 억압적인 중세기를 절단하고 르세상스와 근대시대를 열기 시작한 시인이다. 그는 오로지 자신만의 심오한 상상력으로 그 길을 열었다. <신곡>은 지옥 34편, 연옥 33편, 그리고 천국 33편 모두 100편으로 이루어 진 시다. 단테는 아무도 가본 적이 없고 누구도 동의하지 내용을 시로 표현하여, 암흑시대에 빛을 선사하였다. 단테 <신곡: 지옥편>에서부터 차근 차근 그 숨겨진 의미를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다.

1-9행: 길을 잃고 어두운 숲속에서 헤매는 단테

1. Nel mezzo del cammin di nostra vita

2. mi ritrovai per una selva oscura

3. ché la diritta via era smarrita


1. 우리가 살고있는 삶이란 여정의 한 가운데서,

2. 나는 내 자신이 어두운 숲속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3. 그곳은 내 삶을 위한 최적의 길이 숨겨진 장소다.

4. Ahi quanto a dir qual era è cosa dura

5. esta selva selvaggia e aspra e forte

6. che nel pensier rinova la paura!


4. 아! 숲이 어떤 곳인지 말하기가 얼마나 힘든지!

5. 그 숲은 야만적이고, 거칠고, 억세다!

6. 생각만 해도 무서움이 되살아난다.


7. Tant' è amara che poco è più morte;

8. ma per trattar del ben ch'i' vi trovai,

9. dirò de l'altre cose ch'i' v'ho scorte.


7. 그곳은 너무 쓰디써, 죽음도 그곳보다 더하지 못하다.

8. 하지만 내가 거기에서 발견한 좋은 것을 가지고 올 수만 있다면,

9. 내가 본 다른 것들을 이야기할 것이다.

(해설)


제 1곡은 단테 <신곡>의 첫 번째 책 <지옥>의 시작일 뿐만 아니라, <지옥>에 이어지는 <연옥>과 <천국>을 포함한 전체 <신곡>의 프롤로그다. 단테는 서양 문학의 위대한 경전과 고전의 저자들처럼 무슨 단어로 시작할까 고민했을 것이다. 그는 천지창조를 기록한 구약성서의 <창세기>와 창조의 순간을 묘사한 <요한복음>의 시작처럼, 장소를 의미하는 전치사로 시작한다. 히브리어 ‘버bǝ’와 그리스어 ‘엔en’에 해당하는 이탈리아어 전치사 in으로 시작한다. 첫 단어 ‘넬’nel은 전치사 in과 남성명사 정관사인 il의 합성어다. 전치사 in은 시간명사나 장소명사를 취하여 부사구가 된다. <창세기>의 처음 시작도 의미상으로 유사한 히브리어 전치사 ‘버’bə로 시작한다. ‘넬 메조’nel mezzo ‘한 가운데에서’라는 의미다. ‘메조’라는 명사는 위에서 설명한대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양적인 시간 가운데, 자신의 삶을 획기적으로 전환할 수 있는 절체절명의 순간을 의미한다.

단테는 우리가 이 땅에서 매일 매일 시간과 장소를 통해 경험하는 존재론적이며 사적인 ‘여정’이란 은유를 사용하여 인페르노를 시작한다. 단테는 <콘비비오> 4.12.15에서 인간의 삶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il] nuovo e mai non fatto cammino di questa vita (‘이 삶은 새롭고 이전에 결코 감행해 본 적이 없는 여정’)이라고 정의한다. 단테는 <신곡>을 가상현실로 선정하고 이 장엄한 서사시를 읽는 우리를 독려한다. 그는 우리에게 자신의 여행에 동참할 것일 요구한다. 이 여정을 떠난 사람은 무수하지만, 길은 하나다. 인생이라는 여정은 모든 사람이 운명적으로 시공간 안에서 공통적으로 한 가지를 경험한다. 그 길이란 지옥, 연옥, 그리고 천국이다.

이 “어두운 숲속”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변화와 혁신의 장소다. 시의 시작이 특별한 방식으로 전개된다. 시작은 처음이 아니라 중간이다. 그 중간은, 역설적으로 순례자가 길을 잃은 바로 ‘지금 이 순간’의 현실이다. 단테는 인생은 ‘여정’이라고 해석한다. 우리는 어떤 목적지를 향해가는 여정의 여행자다. 그는 어디로 가는지 아직은 모른다. 그는 자신이 한 치의 앞도 볼 수 없는 칠흑과 같은 숲속에서 헤매고 있다고 고백한다. 이 고백은 그가 이미 자신의 길을 찾기 위해 수없이 시도했고 아직도 그 길을 찾지 못하고 헤매고 있다고 말한다. 그가 원하는 곳에 아직 도달하지 못했다. 인생의 여정은 그렇다.

그는 ‘자신의 삶의’ 여정의 한 가운데가 아니라 ‘우리의 삶의 여정 한 가운데’라고 말한다. 단테가 단수가 아닌 복수 일인칭 대명사를 사용한 이유는 무엇인가? 단테는 자신의 여행에 자신에게만 국한된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공유하고 공감할 수 밖에 없는 중요한 여정이라고 말한다. 이 여정은 단테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의 여정이다. 그러나 2행에서는 “나는 어두운 숲속에 있는 내 자신을 발견했다”라고 말하면서 1인칭으로 돌아간다. ‘나 자신을 발견했다’는 뜻은 무엇인가? 내가 비로소 정신을 차리게 되었다는 뜻이다. 인간이 정신을 차리면, 자신이 길을 잃고 이리저리 헤매는 상태라는 사실을 가장 먼저 인식한다. 그것이 깨달음과 해탈의 시작이다. 무지한 사람은 자신이 길을 잃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신생(비타 누오바)>처럼 단테 자신의 여정이라고 말한다. 그는 자신이 어두운 숲속에서 돌아다니는 모습을 독자인 ‘우리’와 함께 관찰하려 한다. 단테는 개인이자 공동체이며, 여행자이자 여행을 관조하는 독자이기도 하다.

2행에 등장하는 “나는 어두운 숲속에 있는 내 자신을 발견했다”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 구절은 여러 가지 은유를 동원하여 알레고리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단테가 무시무시한 숲속에서 길을 잃었다는 점이다. 단테는 자신이 왜 길을 잃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이 상황을 인식하였고, 그는 그곳을 탈출하고 싶어한다. 이 어두운 숲속은 역설적으로, 지름길이 숨겨진 장소다. 단테는 그것을 ‘라 트리타 위아’라고 말한다. 위에서 언급한 ‘캄미노’ 즉 ‘여졍’과는 다른 단어인 ‘위아via’를 사용한다.

‘트리타 비아’는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가는 최단거리이며 최선거리다. 우리는 일생, 삶의 최선이나 가장 효율적이며 경제적인 삶을 추구하고 싶다. 저 시냇물은 바다로 가는 최단거리를 알고 있다. 그렇게 흘러가는 것이 최선이다. 그래서 노자는 인간들이 살아야 할 도를 <도덕경> 8장 첫 부분에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上善若水 水善利萬物 而不爭(而有靜)處衆(人)之所惡 故幾於道

(상선약수 수선리만물 이부쟁(이유정) 처중(인)지소오 고기어도)

“최상의 선은 물과 같습니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지만 다투지 않습다.(왕필본) (고요히 있다 (백서본))

물은 대부분 사람이나 사물이 싫어하는 곳에 머뭅니다.

그러므로 물은 거의 도(인)에 가깝습니다.”

단테는 자기 삶의 최선을 찾아 나섰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마음 속에 존재하는 지옥을 확인하고 차근차근 제거하는 수고를 경주해야 한다. 단테는 지옥 경험이 너무 끔찍하여 기억하는 것이 죽음 자체보다 공포스럽다고 말한다. 그는 시인으로서 일반인들이 말할 수 없고 표현할 수 없는 것을 증언해야 한다.

단테는 이곳에서 역설적으로 ‘최선’을 발견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벤’ben이란 이탈리아 단어는 노자가 <도덕경> 8장에서 말한 ‘선’이며, 미가 선지자가 <미가서> 6장 8절에 말한 선인 ‘토브טוב’이며 아리스토텔레스가 <니코마코스 윤리학> VIII.1248b에서 언급한 최선의 인간이 갖추어야 할 덕인 ‘칼로스 카가쏘스καλὸς κἀγαθός’이며, 스토아 철학자 키케로가 <최고 선악론De finibus bonorum et malorum> 말한 ‘숨뭄 보눔’summum bonum이다. 단테는 지옥에서 자신이 제거해야 할 악을 발견하고 참회하는 것을 최선을 구축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단계로 여긴다. 단테는 숲속이 죽음과 같은 비탄의 공간이지만, 그곳을 빠져나와 좋은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먼저 그곳에서 일어난 일들을 말해야 한다. 자신이 그곳에 어떻게 들어갔는지 말할 수 없다. 자신이 그곳에서 길을 잃었을 때, 자신이 졸린 상태였으며 진리의 길로부터 이탈해있었기 때문이다.

이 시는 처음부터 두 명의 내레이터가 번갈아 가며 이야기한다. 첫 내레이터는 순례자 단테 자신의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사건을 시간 순으로 나열한다. 그 순례자를 이끄는 인솔자는 베르길리우스다. 그러나 베르길리우스는 순례자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지 못한다. 두 번째 내레이터는 모든 것을 인식하고 이해하는 단테 자신이다. 그러므로 단테는 자신의 경험에 의해 장님이 된 경험적인 자신과, 그 자신을 뛰어넘어 천국을 경험한 초월적인 자신, 이 두 목소리를 모두 지니고 있다. 그는 동일한 사건을 이 두 개의 시점에서 동시적으로 보고 이해한다.

인간이 스스로 이 두 가지 시점으로 인생을 관찰하기는 힘들다. 각고의 노력으로 자신으로부터 탈출하여 선정의 상태, 삼매경의 상태로 진입해야. 경험적 자아에서 아웅다웅하는 모습을 연민의 눈으로 볼수 있다. 혹은 그런 자신으로부터 탈출하려는 자신을 응원할 수도 있다. 생각은 갑자기 과거로부터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그런 생각의 한계를 가만히 응시하는 관찰이다.

<신곡> 전체는 이 두 명의 내레이터 축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단테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모든 것을 아는 서술자다. 그는 순례자가 이해하지 못하는 전체 의미를 파악하는 시인이다. 한축은 통시적인 상황에서 여행하는 순례자와 다른 축은 동시적인 시선으로 모든 상황을 이해하는 시인이다. 때로는 이 둘의 시선이 엉켜 분명하지 않은 구절들도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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