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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9.5.(土曜日) “고질痼疾”


21세기 인류는 한번도 상상해보지 못한 전염병의 포로가 되어, 매일 매일 낯선 시간과 장소로 진입한다. 요즘, 우리 모두가 몸과 마음이 지쳐, 무엇을 왜 그리고 어떻게 진행해야할지 모른다. 그나마 아침 좌정과 샤갈-벨라와의 산책이 지친 육체와 정신을 유지하는 비결이다. 서울산책은 시골 산책과는 달리 반려견들을 차에 태우고 차를 몰고 10분정도 이동해야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거의 8년 동안 진행해 왔지만, 오늘 하루쯤은 선책가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라는 유혹이 언제나 나의 행동을 게으르게 만든다. 정신을 다시 가다듬지 않는다면 나는 원하는 않는 삶을 보낼 것이다, 다행이 반려견들은 나의 이런 낌새를진작 알아차리고 내 옆에 앉아 나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다. 이들의 보챔이 나의 하루를 건강하게 시작하는 원동력이다.

파탄잘 리가 <훈련경> 3행에서 말하는 수련을 방해하는 훼방꾼들, 무식, 이기심, 집착, 혐오, 그리고 삶에 대한 의지다. 심리학자 프로이트나 융이 말한 리비도나 무의식과 유사하다. 이 다섯 가지 훼방꾼들은 나를 행동하고 타인과 사귀고, 느끼고, 생각하고 자신을 주장하게 만들어 자신의 정체성을 구축하는 원인이다. 사회 안에서 자신의 존재의미를 획득하려는 개인은, 자신이 유기해야할 헛된 정체성을 오히려 무의식의 저장창고에 쌓아놓는다. 이렇게 쌓인 정체성은 나의 개인의 행동과 경험을 조절할 것이다. 이 과정은 다음과 같은 순환으로 영원히 반복된다:

다섯 가지 훼방꾼들--> 삶의 경험 축적--> 점재의식 창고에 축적-->

행동을 유발시키는 무의식--> 강화된 다섯 가지 훼방꾼들-->....

이 순환이 인간 삶의 운행방식이다. 자신의 언행을 조절하는 무식, 이기심, 집착, 혐오, 그리고 살려는 의지를 인지하고 제거하는 수련을 경주하지 않는다면, 나이가 들면 들수록 그(녀)는 자신이 원하지 않는 모습으로 자신도 모르게 퇴화한다. 그 변모가 조금씩일어나 자신은 의식하지 못하지만, 오랜만에 만난 친구를 담박에 알아차릴 것이다. 이 과정은 그 사람의 현재 언행으로 드러나기도 하지만, 더 흉측한 모습으로 미래에도 드러난다.

다섯 가지 훼방꾼들은 다시 한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 훼방꾼은 ‘아비드야’avidyā 즉 ‘무식’無識이다. ‘무식’이란 단순 지식을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에 대한 오랜 경험의 부재로 잘 알지 못하는 모자람이다. 앎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사실에 대한 인식이며, 다른 하나는 경험을 통해 서서히 알아가는 깨달음이다. 여기서 ‘무식’이란 오랜 경험을 통해 그 대상의 핵심을 간파하지 못하는 성급함이다. 오랫동안 아랍어와 이슬람을 공부한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이슬람에 관한 더 많은 것을 알고 존중한다. 그러나 이슬람에 관해 왜곡된 시선을 지닌 사람의 말을 전해들은 사람은, 그 왜곡된 지식으로 이슬람에 대해 폄훼한다. 그가 이슬람에 대한 존경심을 가지고 오랫동안 공부하고 경험하지 않는다면, 그는 ‘무식’하다. ‘아드디야’는 ‘보고 느껴 깨닫다’란 의미를 ‘비드야’와 부정접사 ‘아’의 합성어로 ‘깊이 깨닫지 못한 상태의 지식’이란 뜻이다.

두 번째 훼방꾼은 ‘아스미타’asmitā 즉 ‘자기-중심적인 마음’이다. 이런 마음을 지닌 자에게 행복은 자신의 오감을 자극하는 쾌감이다. 쾌감이란 인간이 지닌 본능을 직접적으로 충족시키는 기쁨과 그런 환경을 조성하기 위한 노력을 포함한다. 자신을 깊이 응시한 적이 없어 타인에 대한 깊은 이해도 없다. 타인은 자신의 쾌락을 증진시키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세 번째 훼방꾼은 ‘라가rāga’ 즉 ‘집착’이다. 그에게 행복은 자기 마음의 상태가 아니라 자신이 아닌 외부의 획득이다. 그것을 획득하는 것이 자신을 행복하게 만든다고 착각하여 집착한다. 그는 평생 이 유혹과 집착에 시달려 자신의 삶에 만족이 없다. 네 번 째 훼방꾼은 ‘드베샤’dveṣa 즉 ‘혐오嫌惡’다. 혐오는 자신의 불행의 원인이 자신이 아니라 주위 환경이라고 탓하는 마음이다. 그는 운명 탓을 하고 자신을 돌볼 줄 모른다. 인간은 그가 생각하는 가감이 없는 그것이다. 그의 생각은 습관이 되고, 습관은 그의 환경으로 굳어지면, 그렇게 굳어진 환경이 운명이기 때문이다. 다섯 번째 훼방꾼은 ‘아비니베샤’abhiniveśa 즉,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아등바등 살려는 의지意志’다. 그런 자는 자연스런 시간의 흐림을 거역하여 어리석게도 영원히 살 궁리로 깊은 시름에 빠진다.

파탄잘리는 <요가수트라: 훈련경> 12행에 다음과 같이 인간의 행위를 결정하는 다섯 가지 훼방꾼들이 하는 일을 요약한다:

क्लेशमूलः कर्माशयो दृष्टादृष्टजन्मवेदनी

kleśa-mūlaḥ karma-aśayo dr̥ṣṭa-adr̥ṣṭa-janma-vedanīyaḥ

클레샤-물라흐 카르마-아샤요 드리스타-아드리스타-잔마-베다니야흐

“수련을 방해하는 훼방꾼들은 인간의 모든 행위들을 저장하는 뿌리다.

그것들은 현재의 드러난 삶 혹은 미래의 아직 드러나지 않는 삶에서 경험된다.”

이 다섯 가지 훼방꾼들은 나를 점점 빠져나올 수 없는 늪으로 인도한다. 심지어는 나를 헤어 나올 수 없는 못에 빠뜨려, 헤매고 있다는 사실 인식할 수 없도록 무감각하게 만든다. 요가 수련자가 이 다섯 가지 훼방꾼들을 제거하지 않는다면, 그는 자신의 육체, 정신 그리고 영혼을 쇄약하기 만드는 언행을 반복할 것이다. 나는 인생이란 야구경기에서 투수인가 아니면 공인가? 내가 의도한 절제된 삶을 살기 위해, 나는 나의 언행을 점검하는가?

사진

<칼 요한 거리 저녁>

노르웨이 화가 에드바르트 뭉크(1863–1944)

유화, 1892, 84.5 cm x 121 cm

노르웨이 베르겐 코데 예술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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