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전, 2007년 가을에 알게 된 지인과 통화하였다. 그는 지금부터 14년 전 나의 모습과 언행을 엊그제 일어난 일처럼, 분명하게 기억했다. 정말 14년이란 세월이 정말 순간이다. 지나간 과거는 언제는 순간이다. 우주가 탄생한 138억년 전이나 내가 이 매일묵상을 쓰기 시작한 5분전이나, 지금의 시점에서 보면 언재나 찰나刹那다. 이 찰나를 낚아채, 영원한 순간으로 만드는 방법은 무엇인가? 나는 왜 그 순간에 몰입하여 영원히 살지 못하고, 오지 않는 허상은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오늘을 낭비하는가?
어제라는 시간을 가만히 돌아보면, 그것은 그제의 반복이었다. 오늘도 그런 단조로운 삶의 무자비한 반복이다. 누가 나에게 인간 삶의 모습을 정의하라고 묻는다면, 나는 ‘단조’單調라고 말하겠다. 내가 이 단조에서 용기가 있게 벗어나는 ‘일탈’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나는 단조의 덫에 걸러 재미없게 인생을 마칠 것이다. 인생이라는 무대에 올라와 중요한 것은, 얼마나 ‘장구하냐’, 혹은 ‘얼마나 화려하냐’가 아니라, ‘얼마나 재미 있는냐’다. 재미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나를 변모시키는 마술이다.
현대인들의 일과는 대개 이렇다. 아침에 일어나 샤워하고 식사한 후, 급히 일하러간다. 몸이 피곤해지기 시작하면 점심을 먹고 졸다가 일을 급하게 마무리하고 지쳐 집으로 핸드폰을 쳐다보면서 돌아온다. TV를 보면서 대충 식사하고 가족식구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로 시간을 보내다 잠든다. 특별한 경우 친구들을 만나 잠시 즐거운 시간을 보내지만 그런 날은 더 피곤하다. 우리는 대게 이런 행위를 수 십 년동안 반복한다.
독일 소설가 프란츠 카프가의 소설 <변신>에 등장하는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Gregor Samsa처럼 어느 날 아침에 눈을 뜨니, 자신이 거대한 벌레로 변해버린 자신을 발견한다. 잠자는 새로운 삶에 대한 욕구가 없고 돌파구를 상상하지도 않는다. 잠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벌레로 인생을 마치고 누구도 그를 그리워하지 않을 것이다. 이기심이라는 무감각으로 자신을 둘러, 하루하루 연명하는 곤충으로 살아간다. IT기계의 도래로, 인간은 기계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동물이 되었다.
신이 인류를 무감각한 잠에서 깨우기 위해 선물로 준 <바가바드기타>(BG)다. BG는 우리에게 그런 삶을 집어치우라고 호통을 친다. 그런 삶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하루를 아무런 변화를 시도하지 않고 연명하기에 급급한 짐승의 삶에서 탈출하라고 촉구한다. 불만, 심심, 불행은 이런 기계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의 정서다. BG는 새로운 삶을 지향하는 수련자는 이런 구태의연한 습관의 노예가 된 삶을 중단하라고 말한다. BG 제 1권 2단락은 수련자가 이 습관적인 삶의 패턴을 전환시키려고 시도하는 순간에 관한 이야기다.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쿠루 왕국의 왕 ‘드리타라슈트라’는 장님이다. 그에게는 아들 100명이 있다. ‘드르요다나’는 첫번째 아들이다. 그는 아버지를 대신하여, 쿠루 왕국을 치리하는 ‘왕’ 자리에 오른다. 인도인들에게 ‘100’이란 숫자는 인간의 인식과 활동의 가짓수를 상징한다. 인간은 다섯 가지 감각, 즉 시각, 청각, 후각, 미각 그리고 촉각을 통해 사물을 인식한다. 인간은 이 오감으로 얻은 지식을, 다시 다섯 가지 행동, 즉 말, 손 작동, 발 작동, 성적인 활동 그리고 배설활동을 통해 행동으로 표현한다. 인도인들은 모두 합하여 열 가지 인식과 활동은 각각 열 가지 기질을 곱해 100이란 상징적인 숫자를 도출하였다. 드르요다나는, 이들 중 맏형으로 인간의 육체적이며 정신적인 활동, 즉 ‘물질적 욕망’의 화신이다.
‘드르요다나’duryodhana는 산스크리트어 문장 ‘두흐-유담 야흐-사흐’duḥ-yudhaṁ yaḥ saḥ의 축약형이다. 그 의미는 ‘싸워서 이기기에 어려운 사람’ 혹은 ‘온갖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비열하게 싸우는 자’란 의미다. 오감을 자극하는 쾌락과 권력, 명예, 그리고 물질에 대한 욕망에 중독된 사람은, 자신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사무량심을 흠모하는 신적이며 영적인 자신을 억제하고 파괴하여, 날마다 자신을 세속적이고 이기적인 괴물로 변한다. 드르요다나는 그런 인간의 상징이며, 동시이 모든 인간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제거해야만 하는 과거의 자신이다.
반면, ‘판다바’의 군대는 인간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흠모하는 자신의 모습인 ‘영적인 자신’을 의미한다. 판다바의 군대가 전투대형의 정렬한 모습이란, 영적인 승화를 위해 명상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가지런히 정렬한 수련과정이다. 수련에는 항상 방해꾼이 등장하기 마련이다. ‘드르요다나’로 상징되는 욕심과 욕망이 급하게 등장하여, 인간의 육체와 마음을 뺏기지 않기 위해서 긴장하기 시작한다. 욕심을 상징하는 드르요다나는 자비를 상징하는 판다바의 아들들과의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해, 이런 대결을 여러 번 치러 승리하는 방법을 알고 있는 선생에게로 간다. ‘선생’을 의미하는 단어 ‘아차르야’ācārya는 ‘스승’을 의미하는 ‘구루’와 다르다. 선생이란 먼저 태어난 경험을 통해 전문가가 된 사람이다. 그(녀)는 자신이 축적한 지식을 통해 가르치는 사람이다.
여기에는 그 선생이 누구인지 나와 있지 않으나, 그의 이름은 다른 인도경전을 통해 추적할 수 있다. 그 선생의 이름은 ‘드로나’다. ‘드로나Drona’라는 이름의 의미는 크게 다음 두 가지로 추적할 수 있다. 하나는 전통적인 해석으로 어근 *dru-가 ‘견고한 것; 나무’란 의미다. 영어단어에서 ‘참을성이 많은’이란 의미를 지닌 durable과 ‘나무’를 의미하는 tree는 모두 같은 어원에서 유래하였다. 힌두신화에 의하면 드로나는 위대한 현자의 정자로부터 나와 나무로 만들어진 용기에서 태어났다. 다른 해석은 ‘드로나’란 의름을 어근 dru-를 ‘녹이다; 용해되어 달라붙다’에서 추적할 수 있다. 드로나는 ‘용해되어 더 이상 떨어뜨릴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는 자신의 과거에 한 말과 행동이 그에게 인상으로 남아있어, 자신의 경험에 절대의존하고, 그것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자다.
드로나는 자신의 제자에게 타인과의 경쟁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자신의 경험을 통해 알려준다. 경험을 산스크리트어로 ‘삼스카라’samskara라고 부른다. ‘삼스라카’란 개인이 과거경험이이 그의 충동, 경향 혹은 기질이 되어, 어떤 일에 봉착했을 때, 그것을 이성적이며 객관적으로 판단하지 못하고, 과거에 하던 대로 반복하는 경향이다. 그런 반복된 충동은 점차로 그를 과거의 습관으로 고착시킨다. 드로나는 외적인 기질이나 습관을 의미하는 드르요다나와는 달리 내적인 기질 혹은 강력한 습관이다. 인도 서사시 <마하바라타>에 드로나는 쿠루의 편도 판다바의 편도 아니다. 그는 양쪽 모두에서 활쏘기를 가르친 스승이었다. 그러나 <바가바드기타>에서 드로나는 욕망을 상징하는 쿠루 왕과 그의 100명 아들 편이다.
판다바 형제가 추구하는 가치인 ‘붓디’buddhi 즉 긍정적인 ‘깨달음’과 쿠루 형제들이 추구하는 가치인 ‘마나스’manas 즉 부정적인 ‘생각; 인식’은 모두 내적인 기질이며 습관이다. 내적인 기질에서 긍정적인 깨달음이 신장될 수도 있고, 반대로 부정적인 생각이 우위를 차지할 수도 있다. 궁수가 자신이 정한 목표물에 명중시키기 위해서는, 그 대상에 몰입해야한다. 마찬가지로 수련자가 더 나은 자신을 만들기 위해 수련할 때, 명상을 통해 ‘붓디’를 추구할 수도 있고 혹은 그런 수련 없이 과거 습관을 반복할 수 있다. 자신의 삶을 최선으로 만들기 위한 선택권은 나에게 달려있다.
명상을 수련하지 않는 인간에게 ‘물질적인 욕심과 이기심’은 그의 마음을 지배하는 영원한 승자다. 그는 자동적으로 감각의 확장과 쾌락과 편함의 극대화를 위해 애쓴다. 명상을 통해 자기수련으로부터 나오는 희열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마나스’의 노예가 된다. 명상수련을 통해, 깨달음을 맛본 사람은,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영적인 자기-자신을 일깨워 자신의 삶을 인도하도록 정중하게 부탁한다.
BG 제1권 2단락은 수련자가 ‘붓디’를 상징하는 ‘판나바의 군대’가 전투를 위해 전열을 가다듬는 순간, ‘마나스’를 상징하는 ‘쿠루의 군대’에 비상이 걸린 상황을 표현한다. 심지어는 오랫동안 명상수련을 통해 붓디를 추구하는 사람도, 자신의 내면에 깊이 숨겨진 불안, 근심, 나태, 졸림 혹은 영적인 무관심의 공격을 받아, 과거로 돌아가기 일 수다. 그런 사람은 물질적인 욕망을 상징하는 드르요다나의 희생양이 되어, 과거 습관을 스승으로 삼는 ‘드로나-삼사라’의 유혹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한다. 신하 산자야는 드리타라슈트라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sañjaya uvāca:
산자야가 말했다.
dṛiṣhṭvā tu pāṇḍavānīkaṁ vyūḍhaṁ
“그 때 판다바의 군대가 전투대형 정렬한 모습을 보자,
duryodhanas tadā ācāryam upasaṅgamya rājā vacanam abravīt
그 때 두르요다나 왕이 그의 선생에게 가다가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바가바드기타> 1.2
인간의 마음은 언제나, 욕심을 상징하는 쿠루의 군대와 자비를 상징하는 판다바의 군대가 대결하는 전쟁터다. 나는 과거의 습관, 혹은 과거의 습관이 최고의 전략이라고 가르치는 드로나의 조언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깊은 성찰과 숙고를 수련한 명상을 통해,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기를 수련할 것인가?
사진
<달을 보는 여자와 남자>
독일 화가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 (1774–1840)
유화, 1824, 34 cm x 44 cm
베를린 구국립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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