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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6.13. (金曜日, 164th/365) “롤로코스트”

2025.6.13. (金曜日, 164th/365) “롤로코스트”

     

내일, 6월 14일, 오후 1시에 첫째딸 세란이가 결혼한다. 나는 아직 미국 여행 비자를 발급받지 못했다. 3주전에 느긋하게 ESTA를 통해 미국 여행 비자를 신청했지만, 거절당했다. ESTA 용지의 9번째 질문이 2013년 3월이후에 시리아, 이락, 이란과 같은 국가를 방문한 적이 있는가란 질문이었다. 나는 무심코 No라고 대답하였다. 나는 2023년 둘째 아이의 대학원 졸업식을 참석하기 위해, ESTA를 통해 무사히 뉴욕을 다녀온 적이 있기 때문에 아무런 걱정도 없이 여행비자 발급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청천벽력과 같은 입국거절 소식을 들은 것이다.

     

지난 6월 4일 You are not authorized to enter...라는 편지를 받고 비상이 걸렸다. 나는 새롭게 비자를 신청하여 영사와 인터뷰날짜를 잡아야했다. 비상이 걸렸다. 나는 이 사실을 두 딸에게 알렸다. 내 참석이 없는 세란이의 결혼식을 상상할 수 없었다. 우리는 힘을 합쳐 어떻해든 기적을 만들어내기로 결심하였다. 독일에 있는 내 동생 식구들은 이미 LA에 도착해 있었다.

     

우리는 6월 5일(목요일) DS-160를 다시 작성하여 비자인터뷰 날짜를 잡았다. 운좋게 6월 9일 월요일이었다. 나는 그날 세란이의 6월 14일 결혼식을 알리고 반드시 6월 11일에 신랑 필립가족과의 상견례를 참석하고 싶었다. 마침 시급한 상황에서 인터뷰 날짜를 앞당길 수 있다는 공지를 보고 신청하였다. 나의 딱한 사정을 이해했는지, 6월 6일 (금요일) 오전 9시30분에 인터뷰가 잡혔다. 그 소식을 듣고 얼마나 기뻐했는지!

     

6월 6일 아침, 내가 대사관에 도착한 시간은 오전 8시30분이었다. 벌써 인터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굽이굽이 100m나 줄서 있었다. 나는 거의 두시간만에 입장하여 영사 앞에 섰다. 나는 여권을 영사에게 건내 주었다. 그 영사는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비자 인터뷰 신청자 명단에 내 이름을 찾을 수 없어 진행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더니 뒤고 들어가 다른 영사들과 한참 이야기 한 후에, 다시 돌아와, 설명한다. 원칙적으로 비자 인터뷰를 신청한 후 48시간이 지나야, 미국 이민국 컴퓨터 시스템 명단에 이름이 오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나의 간절한 눈빛을 보고, 그는 내 사정을 받아주기로 결정하였다. 나는 이 과정이 수습되는 동안 의자에 앉아 초초하게 기다렸다.

     

마침내, 신제적인 비자 자료 검토를 마치고, 미국인 영사를 만나기 위해 긴 줄을 다시 섰다. 20정도 기다린 후에, 창문 앞에 섰다. 그녀는 내가 제출한 ESTA신청에 거절된 이유를 물었다. 나는 그 신청 질문 9번에 실수로 NO라고 기입했다고 말했다. 나는 실제로 2014년 5월 2주동안 이란에 방문하였다. 경영인들과 함께 다리우스 대왕의 비문과 페르시아 제국의 역사를 공부하기 위해, 페르세폴리스, 하마단, 테헤란, 이스파한을 방문하였다. 영사는 나에게 미국에서 금지한 다른 국가들을 방문한 적이 있는가를 다시 물었다. 영사와 나 사이에 유리창에 미국의 적성국가들 “이란, 이락, 시리아, 이란, 소말리아, 이스라엘..”과 같은 나라들이 적혀있었다. 나는 이미 이란방문 문제로 충분히 문제를 일으켰다고 판단하여 이란 이외 방문하지 않았다고 엉겹결에 말했다.

     

아, 사실은 2002년엔 EBS와 <문자>라는 다큐를 찍기 위해 이란뿐만 아니라, 이락, 시리아, 이스라엘을 방문했다. 이것을 영사에게 실토해하는가? 나는 망설이가가 이 나라들도 방문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영사는 이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고, 그 방문은 2013년이전이라 상관이 없다고 안심시켜주었다. 마음 속 롤러코스터가 매순간 내 심장과 피를 온통 뒤집어 놓았다. 그러더니, 나는 더 큰 문제에 봉착했다. 영사는 내가 구여권에 2026년까지 유효한 비자를 가지고 있기에, 그것을 지금 제출해야한다고 말한다. 만일 내가 구여권을 잃어버렸다고 말한다면, 내가 제출한 새 여권에 새로운 비자를 만들어 줄 참이었다. 그런데, 내가, 바보처럼, 유효한 미국비가가 있는 구여권을 집에 가지고 있다고 말해버렸다. 아뿔사! 영사는 나에게 초록색 종이를 주더니, 구여권을 다시 대사관을 보내는 조건아래, 새로운 비자를 발행해주겠다고 말한다.

     

시계를 보니 11시였다. 내가 집으로 가서 구여권을 일양택배를 통해 미대관으로 보내야만했다. 그런데 오늘은 공휴일이라 우편물을 보낼 수 없는 날이었다. 불안한 토요일과 일요일을 보내고 월요일(6월 9일) 아침 일찍 마포에 있는 일양본사로 가서 구여권을 제출하였다. 화요일(6월 10일) 아침에 구여권에 미대사관에 도착했다는 이메일을 받았다. 나는 과연 금요일까지 새로운 비자를 받을 수 있을까?

     

이 와중에 나는 비행기 스케줄을 다섯 번이나 바꿨다. 6월 1일, 6월 6일, 이제는 6월 11일. 나는 초조하게 UID번호를 수십번 일양택배 비자발급사이트에 넣었지만, 깜깜 무소식이다. 나는 과연 세란이의 결혼식에 참석할 수가 있는가? 나는 얼마나 비참한가? 왜 나는 이렇게 일을 미루고 미뤄 일을 그르칠 지경에 이르게 만들었는가?

     

마지막으로 비행기 스케줄을 6월 13일 오전 12시30분으로 바꿨지만, 6월 13일까지 아침까지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나는 다시 6월 13일(금요일) 저녁 10시 10분에 비행기 스케줄을 바꿨다. 비몽사몽간에 짐을 챙기고 12시에 집을 나섰다. 일양택배 본사에 감히 전화걸 수 없었다. 비자가 나오지 않았다는 참사를 수용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강변북로를 타고 일양택배 본사로 가는 길에 진심으로 기도하게 되었다! “하나님, 이번만 봐 주세요! 당신이 원하는 삶을 살께요!” 내가 어른이 되어 뭘 바라고 신과 흥정한 최초의 기도했다. 이 간절한 기도때문인지, 눈물이 두 눈에서 주룩 흘러내렸다.

     

일양직원은 대사관에서 비자가 아침 10시, 오후 2시,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후 4시 반에 온다고 말해주었다. 마침에 오후 4시30분에 일양본사 데스크로 가서 깊은 한 숨을 내 쉰 수, 주민등록증을 주었다. “제 여행비자가 나왔나요?” 안경을 낀 직원이 컴퓨터에 내 이름을 넣었지만, 그가 말했다. “아직 나오지 않았어요. 아마도 월요일(6월 16일)에 오셔야할 것 같아요!” 하늘이 무너져 내렸다. 일어나지 말아야할 일이 일어났다.

     

나는 실의에 차서 대기실 의자에 주저앉았다. 절친인 한국 유엔협회회장이신 곽영훈회장님께 문자를 다음과 같이 예의가 없는 문자를 날렸다. “My daugher's wedding is on tomorrow. I have to go tonight. I am sorry to ask this favor. Please help me!” 회장님께서 당황하여 전화를 주셨다. “오늘 저녁에 이탈리아 대사와 식사를 해요. 새로 부임한 미국 대리대사는 아직 안면이 없어요. 잠시 기다려 보세요.” 실망한 세란이와 가족들의 얼굴이 주마산간처럼 지나갔다.

     

영겁의 불안하고 초조한 시간이 흘러갔다. 일약택배 직원이 나를 부른다. “지금 막, 마지막 택배가 대사관에서 도착했어요. UID 숫자를 다시 알려주세요.”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숫자를 알려주었다. 한참 컴퓨터를 보더니 그가 말한다. “도착했어요!” 나도 모르게 “하나님,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흘러나왔다.

     

나는 차를 몰고 일산으로 달려갔다. 부모님이 계신 아파트에 차를 정차하고 콜텍시를 불러 공항에 도착하였다. 아, 이제 정말 미국에 가는구나. 내가 가 있는 동안, 아내는 힘이 센 샤갈과 예쁜이 산책을 나를 대신하여 아침과 저녁에 수행해야한다. 서울에서 겨울에 세란에 결혼식 파티를 할 땐, 할아버지, 할머니, 아내도 참석하여 즐거운 시간을 보낼 것이다.

     

나는 금요일 저녁 10시10분 LA행 비행기를 탑승하였다. 에어프레미아를 처음으로 탔다. 나의 변덕스러운 여행스케줄을 받아준 고마운 항공사다. 11시간 비행을 마치고 LA공황에 내렸다. 입국절차를 받기 위해 다시 줄을 서서 기다렸다. 한국에서 그렇게 고생해 왔기에 이곳에서는 무난하게 통과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40분정도 기다렸다가 마침내 입국심사관 앞에 섰다. 깐깐하게 생긴 분이다. 성이 Park이니, 한국 사람이 분명하지만, 기분이 써늘하다. 한참 컴퓨터를 두들기더니, 내 여권을 덮어 놓고 무전기를 누구를 부른다. “Pick-Up”. 무슨 말인가? 픽업은 물건을 가지고 가라는 말인데, 혹시 나를 물건취급해서 별도의 공간으로 간다는 말인가!

     

심사관이 나의 눈을 피한다. 나는 이란 문제가 다시 일어났다는 사실을 감지했다. 한참 기다려도 나를 데러갈 직원이 오지 않자, 그가 직접 나서서 심사대 문을 닫고 나를 데리고 별도의 공간으로 간다. 그 무시무시한 사무실엔 CBT라고 써있었다. CBT는 공항심사대에 위치한 the Computer-Based Test를 위한 공간이다. 들어가는 얼굴이 일그러져 있는 사람들이 풀이죽어 의자에 앉아있고, 심사대 창문너머에 공항직원들이 8명 가량이 컴퓨터를 보고 이곳에 넘어온 사람들의 서류를 검사하고 있었다. 네덜란드에서 공부하고 있는 조카 하민이가 2시간째 출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어 문자를 하려고 하니, 불호령이 떨어졌다. “NO PHONE!" 얼른 핸드폰을 넣고 다시 기다렸다. 몇몇 여행객들은 울면서 애원했지만, 아마도 다시 본국으로 돌아갈 절차를 받는 것 같았다. 나도 이들과 같은 운명에 처할 것인가?

     

마침내 한 공항직원이 “BAE”라고 부른다. 근래 들어서 내 이름을 “배”라는 명칭으로 처름들었다. 사자의 서에 등장하여 오시리스 앞에선 이집트 관원 휴네페르처럼. 운명의 심판을 기다렸다. 그녀는 나에게 퉁명스럽게 질문하였다. “Why ESTA rejected?” 나는 서울 미국대사관에서 영사에게 말했던 이란에 갈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명하였다. 내심, 이스라엘과 이란의 전쟁으로 나의 과거 경험이 입국을 불허할지로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 후 다시 영겁의 침묵이 흘렀다. 그러더니 나의 여권을 돌려주더니 말했다. “You may go.” 나는 거의 40분동안 입국심사대에 묶여 있었다. 수하물을 찾으러 나오니, 짐이 사라졌다. 수하물 보관소를 수소문하여 찾아가, 나를 기다려주는 여행가방을 찾았다. 가방을 이끌고 나오니 조차 하민이가 나를 반갑게 맞이하였다. 기적과 같은 하루다. 우버를 기다리는 LA 하늘이 선선했지만, 저 멀리서 햇빛이 빼꼼하고 나왔다. 통금이 생겨 결혼식 시간을 오후 4시에서 1시로 옮겼다. 결혼식이 거행되는 Vibiana 앞에 LAPD경찰서가 있다. 이곳 앞에서 오훈 10시부터 오후2시까지 트럼프 이민 정책을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있을 작정이다. 내일 결혼식은 잘 진행될 것인가?

     

사진

<LA공항 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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