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6.10. (火曜日, 161th/365) “당신은 ‘없음’을 보실 수 있습니까?”
- Chulhyun Bae
- 6월 13일
- 4분 분량
2025.6.10. (火曜日, 161th/365) “당신은 ‘없음’을 보실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교에서 회심回心이란 자신의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는 행위이다. 더 이상 과거의 언행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깨달음이자 의지다. 회심이란 사방의 견고한 벽으로 둘러싸여 이전에 전혀 볼 수 없었던 자신을 보고, 듣고, 느끼는 행위다. 그의 청력이 달라져, 이전에 들을 수 없는 소리를 섬세하게 듣고 반응한다. 그는 이제 듣고 싶은 것만을 듣는 귀머거리가 아니라, 말하는 사람의 입장에 서서, 그의 말을 경청傾聽하는 자가 된다. 그의 시력과 시야가 달라져, 익숙한 것,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매일매일 무식해지는 자신을 관찰하고 불쌍하게 여겨, 이전에 도무지 볼 수 없는 것들을 고요히 바라보기 시작한다. 한 마디로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없음’을 볼 수 있는 관조觀照하는 자가 된다.
그리스도교는 회심의 종교다. 엘리야는 시내산에서 ‘섬세한 침묵의 소리’에 존재하는 신을 만났다. 신은 더 이상 건물에 존재하지 않고 인간 누구나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존재한다는 혁명적인 은유다. 신은 침묵을 경험하는 자에게 스르르 자신의 모습을 조금씩 드러낸다. 바울 (원래이름은 사울)은 자신이 신이라고 주장하는 예수를 추종하는 예수쟁이들을 잡으러 지중해 동서교류의 중심지 다마스커스에서 ‘사울아, 사울아’라는 소리를 듣는다. 그런 후, 그가 이전에 눈으로 볼 수 없었던 ‘없음’을 관조할 수 있게 되었다.
만일 그리스도교에서 바울이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그리스도교는 1세기 팔레스타인에 등장하는 유대종교의 한 분파로 연명하다가 금방 사라졌을 것이다. 그리스도교를 유럽종교와 세계종교를 탈바꿈시킨 장본인은 바울이다. 바울의 원래 이름은 사울이다. ‘사울’이란 히브리 단어의 의미는 ‘신으로부터 요청을 받은 자’란 의미로, 이스라엘을 건국한 사울의 이름과 같다. 사울은 타르수스라는 섬에서 태어나, 유대교 회당에서는 유대경전을 그리스 김나지움에서는 플라톤 철학과 스토아철학을 섭렵하였다. 그는 ‘신으로부터 요청받은 자’란 의미의 이름을 버리고 세상에서 가장 ‘작은 자’란 의미의 그리스어 ‘파울로스’로 개명하였다. 파울로스가 영어 ‘폴’Paul, 한국어 ‘바울’이 되었다.
가톨릭교회는 로마에 도착한 천잭언 화가 카라바조에게 베드로와 바울의 그림을 요청하였다. 1600년 가울, 카라바조는 교황청 재무총장을 지냈던 티베이오 체라지을 만났다. 그는 아고티스노 수도원의 포스카리 소성당Cappella Foscari를 구입하였다. 그는 소성당안을 장식할 두 그림을 카바라조에게 의뢰하였다. <베드로의 십자가 처형>(1601)와 <바울의 회심>(1601)이었다.
카바라조는 신약성서 <사도행전> 9장에 등장하는 ‘바울의 회심’ 이야기를 읽었다. 사울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유대인들의 정치적인 독립과 종교에 방해가 된다고 확신하였다. 특히 로마제국이 예수운동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유대인 스스로가 이 집단을 와해시킬 것을 바라고 있었다. 사울은 예루살렘에 있는 대제사장에게 가서, 예수의 ‘도道’를 신봉하는 자들을 체포하여 예루살렘으로 이송하려했다. 사울이 예루살렘에서 지중해의 대상무역상들이 체류하는 다마스쿠스로 가는 도중이었다. 갑자가 하늘에서 환한 빛이 그를 둘러 비추더니 ‘사울아, 사울아, 왜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라는 음성을 들었다. 그래서 사울이 “당신은 누구십니끼?‘라고 물으니,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라는 소리를 들었다. 인간의 일상적인 경험을 넘어신 신비를 경험하였다.
카라바조는 그리스도교의 근간이 되는 이 순간을 화폭에 담았다. 그는 이 결정적인 순간을 담은, 그의 예술적인 멘토인 미켈란젤로가 바티칸 성 바울 예배당에 그린 프레스코의 표현방식과 주제를 벗어날 수 없었다. 고희가 가까운 미켈란젤로는 교황 바울 3세의 명에 따라서 <최후의 심판> 벽화를 거의 완성할 때, 교황의 이름, 바울의 회심에 관한 웅장한 그림을 그렸다.
그림 1
<바울의 회심>
미켈란젤로 (1475-1564)
프레스코, 1542, 625 cm x 661 cm (21.6 ft)
로마 바티칸 피올리나 예배당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사울의 이름을 부른 후에, 손으로 강력한 빛을 다메섹 도상에 비춘다. 사울이 탓던 말은 놀라 앞발을 들고 도망치고 있다. 이 광경을 목격한 수많은 사람들이 모두 빛을 쳐다보며 공포에 질려있다. 붉은 옷을 입은 바울은 말에서 떨어져, 왼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놀란 모습이다. 프레스코의 크기가 가로-세로 6m이상이 되는 거대한 그림이다. 카라바조는 이 그림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가 1600년에 그린 첫 그림은, 자신의 독창적인 해석을 그린 것이 아니라, 미켈란젤로의 그림을 자기나름대로 소극적으로 표현한 작품이었다.
그림 2
<바울의 회심>
카라바조 (1571-1610)
삼나무 유화. 1600, 189 x 237 cm
Odescalchi Balbi Collection
카라바로는 후원자는 티베리오 체라지를 위해 <바울의 회심> (그림 2)을 그렸다. 이 그림은 카라바조의 특징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 오합지졸이었다. 긴 턱수염이 난 사울은 거의 나신으로 땅에 떨어져, 하늘로부터 내리쬐는 빛을 두 손으로 가리며 어쩔 줄 모른다. 놀란 말은 뒤를 돌아보면서 거품을 토해낸다. 바울의 나이든 하인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아무것도 모른다. 왼손으로 초승달로 장식된 방패를 들고 깃털이 달린 반짝이는 투구를 쓰고 있다. 코메디 오페라의 한 장면이다. 그는 천둥소리와 같은 소리를 하늘로부터 들었지만 아무것도 볼 수 없어 공중에 대고 칼을 휘두르고 있다. 그림의 오른쪽에 천사와 함께 땅으로 내려온 턱수염이 달린 그리스도는 한없이 불쌍한 눈으로 오른 손을 펴서 사울을 일으켜 세우려한다. 천사와 그리스도는 너무 갑자기 땅으로 내려와 마치 나뭇가지에 걸린 낙하산처럼, 공중에 매달려있다. 이 극적인 상황을 재현하기 위한 무대연출이다.
체라지의 이 그림을 수용하지 않자, 성서 이야기를 다시 읽고 읽었다. 그는 <바울의 회심>은 자신의 예술철학을 구성하는 두 개의 축, 즉 빛과 어둠에 관한 이야기란 사실을 깨달았다. 사울의 과거를 상징하는 악과 무식이, 하나님이 보내주신 빛의 세례를 받아 그의 영혼이 새롭게 다시 태어났다. 신적인 광선이 그에게 침투하여 진리와 믿음이 그를 가득 채웠다. 카라바조가 <마태의 소명>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는 성서에 등장하는 한 순간을 그렸다. <사도행전> 9장 3절이다. ”갑자기 하늘에서 환한 빛이 그를 둘러 비추었다.“ 이 구절은 바울 회심의 핵심을 담고 있다. 그는 첫 번째 그림에서 무대장치로 그린 천사와 그리스도를 빛으로 대치하였다. 여기에는 소란이나, 난리나, 코메디가 없다. 단순하게 어둠이 광명으로 대치된 순간이다.
바울의 하인은 말 뒤에서 조용하게 생각에 잠겨 기다린다. 말은 자신의 몸에서 떨어진 주인을 밟지 않으려고 오른쪽 앞발을 조심스럽게 들었다. 바울은 땅에 떨어져 누워있고 그의 눈으로 마치 연인을 꿈꾸는처럼 감겨있다. 그는 두 팔을 활짝 열고 그를 둘러싼 빛을 포옹하고 있다. 그에게 진리와 지혜와 사랑이 임재하는 순간이다. 그는 이전의 턱수염달린 나이든 바울이 아니라 젊은 로마군인처럼 강건하다. 바울이 이 황홀의 순간에 세상이 고요해졌다. 카라바조는 이 회심 이야기에서 부수적인 적을 모두 제거하고 빛으로 가득한 바울을 그렸다.
그림 3
<다메섹 길가 회심>
카라바조 (1571-1610)
유화, 1601, 230 x 175cm
Santa Maria del Popolo
바울은 자신의 세계를 구성해왔던 눈과 귀를 새로운 눈과 귀로 대치하였다. <사도행전> 9장 8절은 그 결과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울은 땅에서 일어나서 눈을 떴으나,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이 구절은 다음과 같이 번역할 수도 있다. “사울은 땅에서 일어나 눈을 떳다. 그는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없음’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바울은 이제 ‘없음’을 볼 수 있는 눈이 생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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