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4.5. (土曜日, 95th/365) “열매”(누가복음 3장 번역과 해설)
- Chulhyun Bae
- 4월 15일
- 6분 분량
2025.4.5. (土曜日, 95th/365) “열매”
(누가복음 3장 번역과 해설)
오늘 오전 10-12시까지 누가복음 줌수업을 진행하였다. 매주 성경을 공부하고 관련 에세이를 제출해야하는 강행군이라, 등록은 45분인데, 직접 참석인원은 30분에서 20분으로 줄었다. 공부을 삶의 최우선순위로 두지 않는 한, 다른 미팅에 밀려 빠지기 십상이다. 안타까운 마음을 달래며 <누가복음> 3장을 함께 공부하였다. 누가는 예수의 탄생과 활동을 세례요한의 탄생과 활동과 대비하면서 설명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느닷없이 등장하는 시대를 초월한 진리가 아니라, 인간의 특정한 상황에 대한 반응이자 운명이란 점을 강조한다. 이 역사의 시점에서 하나님은 오랜 침묵을 깨고 예언자적 말씀으로 돌아왔다. 이 방식을 이사야서 1:1, 예레미야 1:1-3; 호세아 1:1; 아모스 1:1와 유사하다. 역사를 통해 활동하는 신의 활동을 부각시킨다. 다음은 그리스어 원문, 번역, 그리고 해설이다:
<누가복음> 3장 1절
Ἐν ἔτει δὲ πεντεκαιδεκάτῳ τῆς ἡγεμονίας Τιβερίου Καίσαρος, ἡγεμονεύοντος Ποντίου Πειλάτου τῆς Ἰουδαίας, καὶ τετρααρχοῦντος τῆς Γαλιλαίας Ἡρῴδου, Φιλίππου δὲ τοῦ ἀδελφοῦ αὐτοῦ τετρααρχοῦντος τῆς Ἰτουραίας καὶ Τραχωνίτιδος χώρας, καὶ Λυσανίου τῆς Ἀβιληνῆς τετρααρχοῦντος,
티베리우스 황제가 왕위에 오른 지 열다섯째 해에, 곧 본디오 빌라도가 총독으로 유대를 통치하고, 헤롯이 분봉왕으로 갈릴리를 다스리고, 그의 동생 빌립이 분봉왕으로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을 다스리고, 루사니아가 분봉왕으로 아빌레네를 다스렸다.
(해설)
누가는 세례요한과 예수의 등장을 로마제국에서 설명한다 티베리우스의 통치가 그의 전임자의 사망(아우구스투스는 서기 14년 8월 19일에 사망)에서 계산하면, 그의 "15년"은 로마달력의 계산에 따르면 서기 28년 8월부터 서기 29년 8월까지다. 만일 누가가 안티오크 출신으로서 시리아 방식을 따랐다면, 티베리우스의 "15년"은 서기 27년 가을부터 서기 28년 가을까지다. 누가는 아마도 로마방식을 따랐을 것이다. 여기에서 "헤롯"은 헤롯 대왕의 아들 헤롯 안티파스로, 갈릴리와 페레아를 통치했다 (기원전 4년-서기 39년; 누가복음 3:19-20; 13:31; 23:7). 빌립은 헤롯 안티파스처럼 헤롯 대왕의 아들로 팔레스타인 북쪽의 여러 지역, 이투레아와 트라코니티스(기원전 4년-서기 33/34년)를 통치했다. 본디오 빌라도는 서기 26-36년까지 총독이이었다. 누가는 빌라도를 "대리인procurator"이 아니라 일반적인 용어인 hegemoneuontos를 사용하였다.
2.
ἐπ' ἀρχιερέων Ἅννα καὶ Καϊάφα ἐγένετο ῥῆμα θεοῦ ἐπὶ Ἰωάννην τὸν τοῦ Ζαχαρίου υἱὸν ἐν τῇ ἐρήμῳ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광야에 있는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했다.
(해설)
안나스의 공식 대제사장직은 기원후 15년에 끝났지만, 그의 영향력은 특히 사위 가야바의 대제사장직(기원후 18-36년) 동안에도 지속되어, 그의 이름이 자연스럽게 가야바와 함께 언급되었다. 대제사장에 대한 언급으로 누가는 우리를 세속 세계에서 종교 세계로 이동시킨다. 이제선지자 요한을 소개한다. 그는 광야에 거주한다. 광야는 유대인들에게 특별한 장소다. 이스라엘의 이집트에서 탈출한 후, 온갖 잡족에서 이스라엘 백성으로 연단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또한 광야는 세상이 끝날 때, 등장하는 종말론적 장소이기도 하다. (이사야 40:3; 호세아 2:14) 사막은 갱신과 종말의 의미뿐만 아니라, 귀신이 출몰하는 장소로 사람들은 요한이 미쳤다고 말한다(마태복음 11:18). 누가의 관심은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대상이다. 그 대상이 바로 요한이었다. 공관복음서는 모두 요한이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장소로 요한을 기록한다. (마태복음 3:1; 마가복음 1:4: "요한이 왔다")
*요한이 태어날 때부터, 신의 선택을 받았지만, 그는 스스로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야했다. 그 증명의 장소가 바로 ‘사막’이다. 인간은 이 사막을 통해,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난다. 왜냐하면, 사막은 신의 말씀이 등장하는 유일한 곳이기 때문이다. ‘사막’이란 히브리 단어 ‘미드마르’는 신의 말씀(다바르)가 존재하는 장소한 의미다.
*누가는 ‘하나님의 말씀’이란 표현을 ‘로고스’logos가 아니라 ‘레마’rhema로 사용한다. 레마는 직접인용구를 의미하고 로고스는 직접인용구가 담은 사상을 의미한다.
3.
καὶ ἦλθεν εἰς πᾶσαν τὴν περίχωρον τοῦ Ἰορδάνου κηρύσσων βάπτισμα μετανοίας εἰς ἄφεσιν ἁμαρτιῶν,
ויבא אל כל ככר הירדן ויקרא טבילת התשובה לסליחת החטאים׃
요한은 요단 계곡 온 지역을 찾아다니면서, 죄를 용서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
(해설)
누가는 요한의 순회사역을 강조한다. 그는 광야에서 복음을 전파했을 뿐만 아니라 사해 연안을 따라 요단강까지 갔다. "사막"은 척박한 바위 지대다. 그는 세례를 베풀기에 충분한 물이 있는 곳으로 간다. 요한의 세례는 "회심"(metanoias)이다. 즉 도덕적 변화다. 히브리어 ‘슈브’는 하나님에게로 돌아오는 행위다. 하나님께 돌아온다는 행위는, 인간에게 생명이란 신성을 부여한 본래의 인간, 신의 형상과 모양의 회복인다. 즉 우리의 가장 깊은 속에서 발굴을 기다리는 신성의 발견이자 발휘다.
*누가는 ‘죄의 용서’를 ‘아페시스’라는 그리스 단어를 표현한다. 그리스-로마 세계에서 "아페시스"라는 개념은 법적, 재정적 의미로, 종종 빚을 탕감하거나 죄수를 석방하는 것을 의미했다. 신약 성서 저자들은 특히 예수의 사역의 맥락에서 이 개념을 확장하여 영적 해방과 하나님과의 화해를 의미한다.
4.
ὡς γέγραπται ἐν βίβλῳ λόγων Ἡσαΐου τοῦ προφήτου Φωνὴ βοῶντος ἐν τῇ ἐρήμῳ Ἑτοιμάσατε τὴν ὁδὸν Κυρίου, εὐθείας ποιεῖτε τὰς τρίβους αὐτοῦ·
ככתוב בספר דברי ישעיהו הנביא קול קורא במדבר פנו דרך יהוה ישרו מסלותיו׃
그것은 이사야의 예언서에 적혀 있는 대로였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있다.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고, 그 길을 곧게 하여라.
5.
πᾶσα φάραγξ πληρωθήσεται καὶ πᾶν ὄρος καὶ βουνὸς ταπεινωθήσεται, καὶ ἔσται τὰ σκολιὰ εἰς εὐθείας καὶ αἱ τραχεῖαι εἰς ὁδοὺς λείας·
כל גיא ינשא וכל הר וגבעה ישפלו והיה העקב למישור והרכסים לבקעה׃
모든 골짜기는 메워지고, 모든 산과 언덕은 평평해지고, 굽은 것은 곧아지고, 험한 길은 평탄해져야 할 것이니,
6.
καὶ ὄψεται πᾶσα σὰρξ τὸ σωτήριον τοῦ Θεοῦ.
וראו כל בשר את ישועת אלהים׃
모든 욕심으로 가득한 육신이 하나님의 구원을 볼 것이다.'"
(해설)
이사야 40:3의 인용이다. 1948년에 사해에서 발견된 쿰란 공동체는 사막에서 분리된 삶을 사는 집단이 있었다는 것을 고고학적으로 증명하였다. 그들은 그곳에서 율법을 끊임없이 읽고 곧 재림할 야훼의 길을 준비하고 있다고 믿었다. (1QS 8.12-16; 9.19-20). 누가에게 있어서도, 마태와 마가에게 있어서도, 이사야의 구절은 세례 요한의 사역에 대한 분명한 예언이었다. 누가는 마태와 마가보다 더 많은 인용문을 포함시킨다. 먼저 그는 왕의 방문객을 위해 준비를 기록한다. 겉보기에 움직일 수 없는 것조차 야훼의 방문을 위해, 길을 만들기 위해 평탄하게 만들어야한다. 이 은유는 골짜기와 산보다 제가하기 힘든 사람들의 죄다.
*그래서 그는 6절에 ‘사르크스’sarks라는 흔하지 않는 단어를 사용한다. 사르크스는 인간의 몸(소마)에 기생하는 본능적인 욕망이다. 단테의 인페르노에 등장하는 인간의 욕망, 육체의 욕망, 폭력, 사기와 같은 죄를 제거해야, 신의 구원을 쟁취할 수 있다. 인간이 원래의 자신으로 돌아오는 회심이 산을 깎고 골짜기를 메우는 일보다 힘들다고 말한다. 우리의 욕심은 어거스틴이 말한대로 타고나 벗어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7.
Ἔλεγεν οὖν τοῖς ἐκπορευομένοις ὄχλοις βαπτισθῆναι ὑπ’ αὐτοῦ Γεννήματα ἐχιδνῶν, τίς ὑπέδειξεν ὑμῖν φυγεῖν ἀπὸ τῆς μελλούσης ὀργῆς;
요한은 자기에게 세례를 받으러 나오는 군중에게 말하였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다가올 징벌을 피하라고 일러주더냐?”
(해설)
누가가 사용한 "군중"이라는 단어는 ‘리오스’가 아니라 ‘오클로스’ 즉 다양한 사람들의 집단을 의미한다. 누가는 이 군중에 누가 포함되었는지는 밝히지 않지만, 그 안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도 포함되어 있다. 이들은 종교의례가 자신들을 구원해 줄것이라고 착각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그에게 온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호통친다. 마태복음에 등장하는 “회개하라. 왕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가 누가의 기록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후에 예수도 바리새인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들"이라는 별명을 사용하였다. (마태복음 23:33).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자신들의 죄를 덮기 위해, 혹은 세례요한의 동정을 살피기 위해 정탐하러 온 동기를 의심한다. 종교행위는 단순히 자신에게 올 심판을 막기 위한 방편이 아니다. 종교행위는 수단이 아니라 그것 자체가 목적이 되어야한다.
8.
ποιήσατε οὖν καρποὺς ἀξίους τῆς μετανοίας· καὶ μὴ ἄρξησθε λέγειν ἐν ἑαυτοῖς Πατέρα ἔχομεν τὸν Ἀβραάμ· λέγω γὰρ ὑμῖν ὅτι δύναται ὁ Θεὸς ἐκ τῶν λίθων τούτων ἐγεῖραι τέκνα τῷ Ἀβραάμ.
לכן עשו פרי הראוי לתשובה ואל תדמו בנפשכם לאמר אברהם הוא אבינו כי אני אמר לכם
כי מן האבנים האלה יכל האלהים להקים בנים לאברהם׃
회개에 알맞은 열매를 맺어라. 너희는 속으로 '아브라함은 우리의 조상이다' 하고 말하지 말아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수 있다.
9.
ἤδη δὲ καὶ ἡ ἀξίνη πρὸς τὴν ῥίζαν τῶν δένδρων κεῖται· πᾶν οὖν δένδρον μὴ ποιοῦν καρπὸν καλὸν ἐκκόπτεται καὶ εἰς πῦρ βάλλεται
וכבר הושם הגרזן על שרש העצים והנה כל עץ אשר איננו עשה פרי טוב יגדע והשלך באש׃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놓였다. 그러므로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다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진다."
(해설)
세례요한의 은유는 생생하다. 첫째,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이미 전정을 통해 열매를 맺어야한다, 그들이 단순히 아브라함의 후손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리스도교라는 종교를 믿는 것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돌로 자신의 자녀를 만드실 수 있다고 말한다.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그것에 합당한 열매, 즉 자신의 언행으로 신앙심을 표현해야한다. 이 열매가 없다면, 그는 돌만도 못한 존재하고 선언한다. 회개는 신성을 품은 자로서의 언행이며, 언행이 바로 축복이다. 반면에, 우리가 일상의 언행이란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그것 자체가 형벌이다.
10.
Καὶ ἐπηρώτων αὐτὸν οἱ ὄχλοι λέγοντες Τί οὖν ποιήσωμεν;
군중이 요한에게 물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11.
ἀποκριθεὶς δὲ ἔλεγεν αὐτοῖς Ὁ ἔχων δύο χιτῶνας μεταδότω τῷ μὴ ἔχοντι, καὶ ὁ ἔχων βρώματα ὁμοίως ποιείτω.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짧은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없는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
(해설)
세 부류가 누가에서 자신들에게 합당한 열매에 무엇인지 묻는다: 군중, 탐욕스런 세리, 군인이 상징하는 유대관료. 누가에게만 있는 이 대화는 누가의 특징인 사회 정의와 책임에 대한 명확한 진술이다. 누가는 군중에게 궁핍한 사람들과 옷과 음식을 나누라는 컴패션을 실천하라고 요구한다. 요한은 그들에게 쿰란공동체의 생활처럼 엄격한 종교행위를 요구하지 않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는 의례참석이나 종교단체에 희사하는 행위가 아니라.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여유뷴의 옷을 헐벗은 사람에게 나누어주는 것이다. 누가가 사용한 ‘튜닉’(키논)은 긴 옷(히마티온) 아래 입는 짧은 옷이다. 유대인들은 따뜻함이나 옷을 갈아입기 위해 여분의 튜닉을 가지고 다녔다. 누가복음 9:3에도 "여분의 튜닉을 가지지 말라"고 말한다. 진정한 회개는 나눔이다.
12.
ἦλθον δὲ καὶ τελῶναι βαπτισθῆναι καὶ εἶπαν πρὸς αὐτόν Διδάσκαλε,
τί ποιήσωμεν;
세리들도 세례를 받으러 와서, 그에게 말하였다. "선생님,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13.
ὁ δὲ εἶπεν πρὸς αὐτούς Μηδὲν πλέον παρὰ τὸ διατεταγμένον ὑμῖν πράσσετε.
요한은 그들에게 말하였다. "너희에게 정해 준 것보다 더 받지 말아라."
(해설)
당시 "세리들“들은 동족 유대인으로부터 가장 멸시받는 사람들이었다. 세 그룹 중, 회개가 가장 필요한 사람들이다. 삭개오(19:2)와 같은 수석세리들(architelones)은 많은 돈을 징수하였다. 로마인들에게 지불한 것보다 더 많은 돈을 징수하여 부를 쌓았다. 그들은 유대인 사회에서 소외되었고 "죄인들"이었다. 요한은 사회적 관심을 보이지만 그는 제도의 전복을 옹호하지 않았다. 오히려, 남용의 개혁을 주장한다. 이러한 남용은 개인의 탐욕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징수원들 자신의 관행에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했다
14.
ἐπηρώτων δὲ αὐτὸν καὶ στρατευόμενοι λέγοντες Τί ποιήσωμεν καὶ ἡμεῖς; καὶ εἶπεν αὐτοῖς Μηδένα διασείσητε μηδὲ συκοφαντήσητε, καὶ ἀρκεῖσθε τοῖς ὀψωνίοις ὑμῶν.
또 군인들도 그에게 물었다. "그러면 우리들은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요한은 그들에게 말하였다. “남의 것을 강탈하거나 거짓 고발을 하지 말고, 너희의 봉급으로 만족해라.”
(해설)
“군인들”(strateuomenoi)은 아마도 로마인이 아니라 유대인이었을 것이다. 유대 내정을 담당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자치권을 보장받는 관료들이었다. 군인들은 보복 위협을 사용하여 사람들에게서 돈을 갈취할 수 있다. 군인들의 질문은 kai hemeis("우리조차도")라는 추가된 단어로 시작한다. 자신들이 도덕적 각성해야한다고 판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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