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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3.13. (72nd/365 木曜日) “행복한 삶”

2025.3.13. (72nd/365 木曜日) “행복한 삶”

     

오늘 점심에 서울에서 친구들이 찾아온다. 깔로께리에서 ‘행복’과 ‘성공’에 관한 즐거운 담소를 나눌 것이다. 행복과 성공에 관해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오래전 한 방송국에서 ‘인간 탐구 위대한 질문’이란 프로그램을 진행한 적이 있다. 나는 한 주제를 정하고, 유명한 인사 둘을 초청하여 1시간동안 질문을 주고 받는 형식이다. 그 주제 중에 하나가 ‘행복’이었다. 그 때 참여한, 한 패널은 까칠하기로 디오니소스와 같은 회의주의 철학자였고, 다른 한 명은 행복에 관한 베스트셀러를 쓴 잘 나가는 교수였다.

     

녹화를 시작하자마자, 철학자는 행복이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영국 공리주의자들의 가짜 상품이라고 쏘아붙였다. 예상치 못한 질문을 받은 행복학 교수는 말을 더듬기 시작하였다. 그의 이마와 콧등과 땀이 영글어지기 시작하였다. 나는 잠시 녹화를 중단하였다. 그가 마음을 안정시키길 원했다. 그는 잠시 휴식을 취한 후에, 다시 자리에 돌아와 패널석에 앉았지만, 얼굴을 하얗게 질려있었다. 이 녹화가 그 인생이 최악의 경험이었을 것이다. 나는 녹화가 그렇게 끝날 줄 미리 알고 있었다. 행복이란 개념에 대한 타인이 정해 정의와 내용을 암기했지만, 정작 그의 표정과 몸짓은 불안과 불행이 스며있었다. 그는 행복에 관해 말하는 사람이지, 행복하지는 못한 것 같아 안타까웠다.

     

행복은 이런저런 근사한 말이나 결심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을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이다. 행복한 삶은 구별이다. 새벽에 일어난 저 멀리서 우리를 찾아오는 태양을 보고, 자신에게 어울리는 하루를 보낼 것을 맹세하고, 오늘 어제 보다는 더 나은 언행을 실천하는 것이다. 그 실천을 구성하는 두 가지는 배려와 겸손이다.

     

스토아 철학자 세네카(기원전 1-기원후 65년)는 인간이란 동물에게 유일한 삶의 목표와 좌절을 동시에 표현한 에세이 <행복한 삶에 관하여>라는 책을 이렇게 표현한다: “모든 사람은 행복하게 살기를 원합니다. 나의형제 갈리오여! 그러나 그들은이 정작 무엇이 삶을 행복하게 만드는지 파악하려고 할 때, 그들은 어둠 가운데 있습니다.” 인간은 들판의 양떼와는 달리 진정으로 행복하길 원하고 추구한다. 이 바램은 인류 공통이다. 우울증 환자도, 성도착증 환자도, 왜곡된 방식으로, 행복을 추구한다. 그러나 우리 대부분은, 이 보편적인 가치를 누리지 못하고 인생을 마감한다. 그들이 행복의 본질, 자신에게만 어울리는 행복의 근원을 발굴하고 발견하고 발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남들의 광고에 세뇌되어, 그것을 채우며 인생을 살기 때문이다.

     

우리가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이 있다. 행복이 뭐라고 떠드는 설교를 단절시켜아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게 핸리 데이빗 소로가 말하는 ‘고요한 자포자기’quiet desperation에 중독되어 하루를 연명하기 일쑤다. 시간이 아무리 영구하다 할찌라도 순간이다. 이 순간의 시점에서 138억전 빅뱅의 시점이나, 30분전, 이글을 시작한 시점이나 동일한 찰나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행복할까? 이 길을 제시해 주는 현명한 가이드가 있다. 나름대로, 우여곡절을 거쳐 행복한 삶에 대한 나침반을 기록한 삶의 멘토들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을 ‘유다이모니아eudaimonia’란 그리스 단어로 정의한다. ‘유다이모니아’는 두 개의 단어, ‘유’와 ‘다이모니아’로 이루어져 있다. ‘유’(eu)는 ‘잘; 최선을 경주하여’라는 의미이고 ‘다이모니아’는 ‘인간이 각자 지닌 개성이라는 천재성’이다. ‘유다이모니아’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들이 저마다 자기가 지닌 소질이며, 그 소질을 인생이란 계절에 어울리게 적당하고 적절하게 발휘하는 자연스런 실력이다. 시편에 등장하는 구절처럼, 그런 사람은 시냇가 나무처럼 잎이 메마르지 않고 계절에 따라 그 합당한 열매를 맺는다.

     

인생의 행복은 ‘무엇’이 아니라 ‘어떻게’다. 누구는 요리사가, 누구는 가수가, 누구는 농부가 된다. 자신에게 어울리는 소질대로, 양심의 소리에 부응하여 직업을 선택한다. 물론 대한민국 교육체계는 아이들의 소질이 아니라, 부모의 욕심과 사회의 요구에 따라 직업을 선택한다. 이 교육의 붕괴는 오늘날 정치의 붕괴, 사회의 불안, 자살율 세계 1위, 출산율 세계 꼴지란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무슨 일을 하던지, 그것을 ‘잘’하는 것이 행복의 지름길이다. ‘잘’하는 것은 사소한 것에서 시작한다. 하루를 여는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들은 항상 사소한 것들이다. 아침에 일어나 이불 가지런히 개기, 눈을 감고 하루를 주신 신에게 감사하고 가만히 앉아 있으며 오늘 하지 말하야할 것 하나 떠올리기, 인생의 도반 반려견과 산책하기, 한 걸음 한 걸음이, 인생의 마지막 발걸음이라고 여기기, 공부 방 청소하고 책상 정리하기. 이 사소한 일이 조국 통일이나 사후에 천국 가는 일보다 중요하다. 사소한 것을 ‘잘’하는 것이 위대한 것이다. 잘하려는 이 순간의 행위가 행복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을 잘 해야하는가? 우리 각자가 잘 해야할 일을 알아내기 위해 인류는 철학, 종교, 예술, 과학이라는 학문을 만들어 냈다. 이 무엇이 그리스어로 ‘다이몬’daimon이다. 각자의 다이몬은 죽어다 깨어나야 도달할 수 있는 보물이다. 다이몬은 만물이 각자 존재하는 이유이자 목적이다. 굴뚝은 연기를 잘 배출해야 하고, 소나무는 사시사철 초록색 솔잎을 간직해야 하고, 마라톤 선수는, 매일 러너스하이를 경험해야 하고, 축구선수는 홀로 골대가 50m 너비로 보일 때까지 볼을 차야 하고, 시인은 에밀리 디킨슨처럼, 일생 동안 매일 매일 자신의 심장에서 건져 올린 감정을 글로 표현해야하고, 농부는 24절기에 맞추어 이마에 땀을 흘리며 자연의 섭리에 감사해야 하고, 피아니스트는 작곡자의 영혼으로 들어가, 빙의되어 무한하게 연습해야 한다.

     

자신만의 다이몬을 찾는 과정이 교육이고, 그것을 찾도록 인도하고 다구치는 사람이 스승이다. 자신의 다이몬을 찾지 못한 사람은, 마치 인생이란 무대에 올랐지만, 자신의 배역을 모르고 가만히 서 있는 꿔다놓은 보릿자루와 같다. 그 사람에게 불행일 뿐만 아니라 그와 동시대를 사는 공동체에게도 큰 해를 끼치게 된다. 대한민국은 그런 사람들이 무대에 올라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여, 우리 모두를 불행하게 만든다. 오늘 내가 해야할 일을 잘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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