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3.1. (60th/365, 土曜日) “독립운동獨立運動”
오늘 여의도와 광화문 집회를 보면서 유관순 누님께서 통곡의 눈물을 흘렸다. 독립은커녕, 헛된 이데롤로기의 노예가 되어, 다른 편을 죽이겠다고 외치는 두쪽한 대한민국을 보고 희망을 잃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난 10년동안 세계 최저출산율, 세계최고자살율이라는 최악의 꼴지-성적표를 받아왔다. 이 두 지표는, 우리가 생명이기 조차 포기하고 거부하는 초유의 집단이 되었다는 명백한 증거다. 누군가는 K-컬쳐가 세계를 재폐하고 있지만, 그것은 암에 걸린 우리를 포장하는 얄팍한 분칠이다. 문제는 나아질 기미가 도무지 보이질 않는다는 점이다. 단테가 인페르노를 다시 써야 할 판이다. 혁신은 상대방에게 호통치는 삿대질이 아니라, 우리 각자가 거울 앞에서 초라한 자신을 보고 조용히 흘리는 눈물이어야 한다. 집단행동이 아니라, 개인행동이 혁신과 혁명의 기반이다. 모래 위에 쌓은 성이 허물어지는 모습을 보고, 어찌해야할지 모르겠다.
저 멀리, 그 힌트를 얻고 싶다. 오늘날과 같은 깡패국가 미국이 아니라, 180년전 미국이다. 그때, 홀로 독립운동을 시작한 인간이 있었다. 헨리 데이빗 소로다. 그는 1845년 7월 4일 미국 독립기념일을 맞ㅇㅣ하여, 미국이 독립되지 않았다고 홀로 외친다. 그날 사람들은 미국 독일기념일 맞이하여 거리로 나와 오색찬란한 성조기를 흔들고 불꽃놀이에 환호하고 있었다. 소로는 분연히 주섬주섬 몇 가지 볼품없지만 필요한 물건들을 챙겨 콩코드 월든 호숫가로 갔다, 그곳엔 정신적인 구루인 랄프 왈도 에머슨의 땅이있었다. 소로는 이상적인 교육을 실현하기 위해 뜻을 모은 형이 파상풍에 걸려 비참하게 죽자, 극심한 우울에 시달렸다. 그는 월든 호수 가에 그의 정신적인 구루인 랄프 왈도 에머슨이 할애준 땅에 들어가 자신만의 오두막집을 26달러로 건축한다. 벽난로, 조촐한 침대, 자그한 책상, 그리고 의자 두 개다. 그는 이곳에서 2년 2개월 2일을 온전하게 자신으로 살았다.
소로는 개인의 독립이나 각성없이, 집단의 독립은 허구란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이제, 자신의 독립을 매일 확인하면서, 자신을 다독일 것이다. 당시 콩코드 시민들은 남들이 드는 미국 국기를 펄럭이며, 취주악단음악에 맞추어 자신의 매력을 뽐내는 시내행진을 즐거워하며 흥청망청 즐기고 있었다, 소로는 콩코드 시내에서 5km정도 떨어진 숲속으로 들어와 울창한 숲과 조용한 호수가 전해주는 자연의 변화무쌍함, 미래로 매순간 진입하는 용기와 의연함, 호수에 비친 달의 을씨년스러움, 새벽마다 노래하는 새들의 즐거움, 좌정을 통한 ‘자기다움’이라는 매력적인 국기를 매일매일 흔들었다. 월든 호숫가 오두막집은 그에게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친구이자 스승인 ‘고독孤獨’을 선사하였다.
고독이 스승인 이유는 뻔하고 미천한 일상을 감동적이며 놀라운 결정적인 순간으로 안내하기 때문이다. 동시대 위대한 시인인 월트 휘트먼이 ‘신적인 일상’divine average의 발견을 통해, 유럽의 귀족문화와는 다른 청바지 문화를 시작했다면, 소로는 아시아와 유럽의 종교집단의 규율이나 수도원에서 수 천년동안 진행되어온 영적이며 정신적인 운동을, 개인이 독자적으로 아무도 모르게 홀로 시작했다. 소로의 시도가 고귀한 이유는, 그는 자신의 생각이 종교의 교리나 철학적인 담론보다 소중하다고 믿었을 뿐만 아니라, 그 생각을 ‘갑자기’ 스스로 실천했기 때문이다.
플라톤의 <국가>에 등장하는 한 인물과 유사하다. 그는 동굴 벽에 시선이 고정되어 있다. 누군가 그의 정신을 조절하고 세뇌시키기 위해, 실상을 보여주지 않고, 불길을 일으켜 투영된 그림자만 보여주며 실제하고 주장한다. 오늘날 방송과 신문과 유사하다. 한 포로가 분연히 자신의 손과 발에 묶인 밧줄을 풀고 자신에게 ‘교육’이란 이름으로 세뇌시킨 장본인을 확인하고 더 멀리 보이는 동굴 밖 태양을 행해 걷기 시작한다. 그의 심정을 나타내는 단어가 바로 ‘갑자기’다. 플라톤은 자신의 저작에서 깨달음의 순간을 그리스 단어 ‘엑사이프네스’exaiphnes를 이용하여 표현하였다.
소로는, 이 갑자기 선택한 하루를, 일상적인 미천한 일상으로 부터 구분했다. 그는 이제 자신의 이곳 숲속에서 자신의 마음속에 그리고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에 숨겨진, 자신을 매일 자유롭게 만드는 고귀한 신성을 발견하고 훈련시킬 것이다. 그는 자유와 독립이 인간을 고귀하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가치라고 믿었다. 자신의 자유와 독립을 저해하는 방해꾼은 제거의 대상이다. 소로의 사적이 이주는 우주적이다. 누구나 인간이라면,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그 이주를 꿈꾸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이주는, 무함마드의 622년 메카에서 메디나로 이주한 ‘헤지라’hijra처럼, 물질과 권력을 탐하는 노예의 상태에서 ‘고귀’라는 좁은 길로 미국을 인도하려는 대담하고 거룩한 시도였다. ‘헤지라’란 아랍어는 ‘익숙하고 구태의연한 세계로부터 탈출하다’란 의미를 지닌 아랍어 ‘하자라’hajara의 명사형이다. 2025년 3월 1일, 대한민국은 완벽하게 두 쪽이 나, 서로를 거의 죽일 정도로 혐오하고 증오한다. 지옥도 이런 지옥이 없다.
우리는 미천한 인간으로 인생을 마칠 것인가? 아니면 고귀한 삶을 지향할 것인가? 소로가 <어디에서 살았고 왜 사는지>라는 에세이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I went to the woods because I wished to live deliberately,
to front only the essential facts of life,
and see if I could not learn what it had to teach,
and not, when I came to die, discover that I had not lived.
I did not wish to live what was not life, living is so dear;
nor did I wish to practise resignation, unless it was quite necessary.
I wanted to live deep and suck out all the marrow of life,
to live so sturdily and Spartan-like
as to put to rout all that was not life,
to cut a broad swath and shave close,
to drive life into a corner, and reduce it to its lowest terms...”
“저는 숲으로 갑니다. 정교하게 의도적으로 인생을 살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인생의 가장 본질적인 것과 마주하고 씨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저는 가르쳐야만 하는 것을 익혔는지 가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제가 죽을 때, ‘내가 잘못 살았구나’라고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저는 삶이 아닌 것을 살고 싶지 않습니다. 그만큼 하루하루의 삶은 소중합니다.
저는 운명적으로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라면, 체념을 연습하며 살고 싶지는 않습니다.
저는 인생을 심오하게 살고 싶습니다. 인생의 모든 골수만을 빼먹고 싶습니다.
그런 삶은 이런 것입니다. 인생을 불굴의 의지를 지니고 스파르타군인처럼 사는 것입니다.
살만한 의미를 찾지 못하는 모든 것들은 단호하게 제거합니다.
인생의 잡초들을 폭넓게 제거할 뿐만 아니라 완벽하게 제거합니다.
인생을 구석으로 몰아 가장 근본적으로 압축시키는 것입니다.”
인생의 목표는 정교하게 의도적으로, 한마디로 ‘잘’ 사는 것이다. ‘잘’이란 부사는 더도 말고 덜도 만 최적의 상태를 의미한다. 나는 단순히 육체덩어리가 아니다. 이 육체는 정신적이며 영적인 자아와 일치시키지 못하면, 나는 실로부터 나가떨어진 저 하늘의 연과 같다. 인간은 육체의 충동과 욕망의 노예 이상이다. 잘 산다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임무를 발견하고, 그 임무의 꽃을 피우기 위해 정교한 노력을 연습하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의식주를 해결하는 것을, 잘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생은 단순히 생존, 견딤, 그리고 자극 이상의 것이다. 자신의 육체와 어울리는 정신과 영혼을 도야陶冶하지 못한다면, 그는 인간으로 태어났다 짐승으로 죽는, 직무유기의 인간으로 전락한다. 온전한 자기-자신이 되는 것이 인격의 완성이며,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소중한 자신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삼일절에 각자의 마음 속에 숨겨져 있는 각자라는 소중한 자신을 키우는 ‘자기문화自己文化’ 독립운동을 시작해야한다. 야산의 샘물처럼, 추운 겨울바람을 견디며 묵묵히 봄을 기다리는 전나무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땅을 개간하여 그곳에 자기-자신이라는 소중한 씨앗을 심는 거룩한 행위다. ‘문화’를 의미하는 영어단어 ‘컬쳐’culture는 라틴어에서 ‘개간하다; 씨를 뿌리다; 싹을 틔워 줄기, 잎, 가지, 꽃, 그리고 열매를 맺어 향기를 내다’라는 의미다. 자신에게 주어진 토양이 뿌리를 박고, 그 토양으로부터 자양분을 얻는 자족이다. 겨울이 오면 가만히 봄을 기다리는 인내가 필요하다. 씨앗의 특징은 성실, 진실, 단순, 믿음, 순수 그리고 겸손이다. 한마디로 자족하는 숭고한 자기문화다. 이 야산의 정상에 올라 경사면에 침묵하여 자족하고 있는 나무들을 뒤돌아 보았다. 모두들 자유자재로 제멋대로 생긴 대로 품위品位를 지키며 순간을 즐기고 있다. 옆에 있는 나무를 쳐다보지도 부러워하지도 시기하지도 않는다. ‘나는 나다’란 말조차 구차한 자연 그 자체다. 나무들은 나에게 묻는다. “당신은 하루라는 인생을 자족하며 살고 있습니까?” 인생의 정수精髓를 맛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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