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2.28. (金曜日, 59th/365) “아쉬움”
2월의 마지막 날이다. 월말이면 시간이란 인생의 주인이 매정함과 야속함을 더욱 느끼는 날이다. 더욱이 2025년의 1/6이 이렇게 허무하게 지나갔다니! 아무리 그 시간을 잡으려고 애를 써도, 흐르는 시냇물은 아랑곳하지 않고 저 멀리 이미 보이지 않는 곳으로 흘러가 버렸다.
어제 일기에서 기록한 ‘니르바나’는 삶에 대한 태도이지 결과가 아니다. 자신을 자신답게 만드는 그것을 위해 온전하게 지금-여기에서 몰입하는 삶이다. 니르바나는 ‘희열喜悅’이 아니라 ‘완벽한 소멸消滅’이다. 니르바나는 ‘진멸’을 의미하는 ‘순야타’sunyata나 바울이 말한 ‘비움’을 의미하는 케노스시kenosis를 넘어선 무겁지만 희망의 단어다. 그 결과에 상관없이 자신의 IAMNESS를 위해 최선을 경주하는 그 자체가 희열이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한다:
τὸ δὲ καλὸν ποιοῦντες μὴ ἐνκακῶμεν· καιρῷ γὰρ ἰδίῳ θερίσομεν μὴ ἐκλυόμενοι
최선을 경주하다, 낙담하지 마십시오. 포기하지 않는다면,
가장 적절한 운명적인 시간에 추수할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6.9
그리스어에서는 남이 보기에 멋진 것 행위를 표현한 ‘아가쏘스’와 자신에게 감동적인 행위는 ‘칼론’을 구분한다. 내가 나에게 맡겨진 칼론을 위해, 오랫동안 진심으로 수련하면, 러너스하이이 등장하여 어떤 고통이라도 견딜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칼론이다. 그 길에 나에게 맡겨진 운명이라 임무이기 때문에 낙담하지 않는다. 내가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싫던좋던, 그것이 나에게 주어진 인생의 배역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겨울이 지나야 희망의 싹이 움트는 봄이 오고, 희망의 싹이 잘 견디나 보려고 작열하는 햇빛과 폭풍우를 동반한 여름이 오고, 거의 뿌리가 뽑힐 정도로 힘들지만, 가을에 열매를 맺아 기뻐하고, 너무 환희에 탐닉할까봐, 추위로 엄습하여, 거의 죽게 만들다가, 다시 봄을 선물한다. 이 영원한 회기는 저주이면서 동시에 축복이다. 바울은 이 운명적인 시간을 의미하는 ‘카이로스’라는 시간을 사용하였다. 그 우주적인 시간은 언제나 적당하고 적절하다. 2025년의 1/6을 아쉬운 마음으로 보내고, 새로운 마음으로 2025년의 1/4을 시작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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