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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2.26. (水曜日, 57th/365) “당신은 부인否認하십니까?”

2025.2.26. (水曜日, 57th/365) “당신은 부인否認하십니까?”

     

위대한 리더의 첫 번째 덕목은 잘못 시인是認이다. 시인이란, 누가 칼로 위협해도 도끼로 자신의 심장을 도려낸다 할지라도, 자신이 맹세한 철학을 지키는 용기다. 그런 자는 자신의 실수를 시인한다. 그 잘못을 스스로 인정하고 용서할 때, 타인들도 그룰 용서할 마음이 생기기 때문이다. 권력에 취한 사람은, 결코 잘못을 시인하지 못한다. 자기 그릇의 크기를 모르고 사회의 중요한 역할을 맡은 사람은, 자신에게도 속한 사회에도 큰 해악이다. 요즘 뉴스에 등장하는 인물들, 특히 정치인들을 보면 특히 그렇다. 21세기인데, 정치인들 수준은 호모 사피엔스 등장 이전으로 짐승으로 돌아갔다. 트럼프, 트럼프 하수인들, 푸틴, 김정은 그리고 우리가 매일 티브 화면으로 보는 정치인들과 말잡이들이 그렇다. 자신의 그릇을 모르고 리더가 되면, 그는 힘에 겨워, 쉽게 독재자가 전락한다.

     

어부에서 사람을 낚는 어부, 사람과 사회를 변혁시키겠다는 어부로 나선 베드로가, 생명의 위협을 느끼자, 소녀 앞에서도 스승인 예수를 부인한다. 이 부인은 자신이 운명을 함께 하겠다는 자기결심에 대한 배신이다. 베드로는 지금 목숨이 위태로운 상태다. 베드로와 요한의 예수가 가이바 대제사장 윗뜰에서 종교재판을 받는 광경을 목격하였다. 예수가 온갖 모욕을 당하며 구타를 당하지만, 아랫뜰에서 군불에 몸을 녹이며 방관한다. 요한이 가이바 궁궐의 문지기 여종을 잘 알아, 뜰 안에 들어간다. 자신들을 이곳에 들여보내준 하인이 베드로를 알아보고 저 나사렛 출신 예수와 한패라고 몰아붙인다. 만일 베드로가 자신이 최측근 제자란 사실일 발각되면, 그도 끔찍한 처형을 당할 수도 있었다. 이 위험에 처한 베드로의 행동과 말은,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태에서, 예수를 부인하고 신앙을 져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한번도 건너간 본적이 없는 죽음 앞에서, 어떤 인간이라도 베드로처럼 행동할 것이다. <마가복음> 14장 66-72절은, 인간 나약함, 위험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인간을 묘사한다.

     

66. Καὶ ὄντος τοῦ Πέτρου κάτω ἐν τῇ αὐλῇ ἔρχεται μία τῶν παιδισκῶν τοῦ ἀρχιερέως,

ויהי בהיות פטרוס בתחתית החצר ותבא אחת משפחות הכהן הגדול׃

베드로가 안뜰 아래쪽에 있었을 때, 대제사장의 하녀 가운데 하나가 와서

67. καὶ ἰδοῦσα τὸν Πέτρον θερμαινόμενον ἐμβλέψασα αὐτῷ λέγει Καὶ σὺ μετὰ τοῦ

Ναζαρηνοῦ ἦσθα τοῦ Ἰησοῦ.

ותרא את פטרוס כי מתחמם הוא ותבט בו ותאמר גם אתה היית עם הנצרי ישוע׃

그녀는 베드로가 불을 쬐고 있는 것을 보고, 그를 빤히 노려보고서 말하였다. "당신도 저 나사렛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다?"

68. ὁ δὲ ἠρνήσατο λέγων Οὔτε οἶδα οὔτε ἐπίσταμαι σὺ τί λέγεις. καὶ ἐξῆλθεν ἔξω εἰς τὸ προαύλιον·

ויכחש לאמר לא אדע ולא אבין מה את אמרת ויצא החוצה אל האולם והתרנגל קרא׃

그러나 베드로는 부인하여 말하기를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나는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겠다" 하였다. 그리고 그는 바깥뜰로 나갔다. (그리고 수탉이 울었다.)

(해설)

예수는 가이바 대제사장 집의 윗뜰에서 모욕당하고, 침뱉음을 받고 구타당하였다. 베드로는 아랫뜰에서 멀찌감치 서서 예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가 에수는 분명 사랑하나, 자신도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와 그 시험을 견딜 수가 없었다. 여종은 아마도 <요한복음> 18.17에 등장하는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요한을 가이바의 집안으로 들어오도록 허락한 자일 것이다. 베드로가 불 앞에서 몸을 녹이고 있었는데, 이 여종이 베드로를 알아본 것이다. 여종은 ‘저 나사렛 사람 예수’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 예수에 대한 일말의 존경심도 없었다. 고유명사 앞에서 흔히 사용하지 않는 정관사 투()τοῦ)를 사용하여, 예수에 대한 증오를 표현한 것이다. 그러자, 베드로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나는 모르겠다’라고 말한다. 이 문장은 1세기 랍비법정에서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공식적인 문장이다. 베드로는 이 문장을 자신과 예수를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증언하고 있다. 자신의 신분이 발각되고 체포될까봐, 그는 바로 불빛이 들어오지 않는 아치밑 통로로 가서 몸을 숨긴다. 그는 괴롭다. 아직 예수를 완전히 배신할 수 없고, 어두운 공간에서 깊은 시름에 빠진다.

     

     

69. καὶ ἡ παιδίσκη ἰδοῦσα αὐτὸν ἤρξατο πάλιν λέγειν τοῖς παρεστῶσιν

ὅτι Οὗτος ἐξ αὐτῶν ἐστιν.

ותראהו השפחה ותוסף ותאמר אל העמדים שם כי זה הוא אחד מהם ויכחש פעם שנית׃

그 하녀가 그를 보고서, 그 곁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다시 말했다. "이 자는 예수와 한패입니다."

70. ὁ δὲ πάλιν ἠρνεῖτο. καὶ μετὰ μικρὸν πάλιν οἱ παρεστῶτες ἔλεγον τῷ Πέτρῳ Ἀληθῶς ἐξ αὐτῶν εἶ· καὶ γὰρ Γαλιλαῖος εἶ.

וכמעט אחרי כן גם העמדים שם אמרו אל פטרוס אמנם אתה אחד מהם כי אף גלילי אתה ולשונך כלשונם׃

그러나 그는 다시 부인하였다. 조금 뒤에 곁에 서 있는 사람들이 다시 베드로에게 말하였다. “당신이 갈릴리 사람이니까 틀림없이 그들과 한패다. 너의 말투가 그렇다.”

71. ὁ δὲ ἤρξατο ἀναθεματίζειν καὶ ὀμνύναι ὅτι Οὐκ οἶδα τὸν ἄνθρωπον τοῦτον ὃν λέγετε

ויחל להחרים את נפשו ולהשבע לאמר לא יעדתי את האיש הזה אשר אמרתם׃

그러나 베드로는 저주하고 맹세하며 말했다. “나는 당신들이 말하는 그 사람을 모른다.”

72 . καὶ εὐθὺς ἐκ δευτέρου ἀλέκτωρ ἐφώνησεν. καὶ ἀνεμνήσθη ὁ Πέτρος τὸ ῥῆμα ὡς εἶπεν αὐτῷ ὁ Ἰησοῦς ὅτι Πρὶν ἀλέκτορα δὶς φωνῆσαι τρίς με ἀπαρνήσῃ· καὶ ἐπιβαλὼν ἔκλαιεν.

והתרנגל קרא פעם שנית ויזכר פטרוס את הדבר אשר אמר לו ישוע בטרם יקרא התרנגל פעמים תכחש

בי שלש פעמים וישם אל לבו ויבך׃

그러자 곧 닭이 두 번째 울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께서 자기에게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모른다고 할 것이다” 하신 그 말씀이 생각났다. 그래서 그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면서 (혹은 땅에 자신의 몸을 던지면서) 괴로워 울기 시작했다.

(해설)

베드로가 예수를 부인하여 자신의 안전을 계속 보장할 수 없었다. 그 여종이 아치밑 통로까지 찾아와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이번엔 자신 주위에 서 있는 사람들을 동요시킬 목적이다. 그들은 아마도 대제사장 건물을 관리하는 사람들이다. 그녀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 자는 예수와 한패입니다." 베드로가 예수가 이끄는 집단의 일원이라는 주장이다. 베드로가 두 번째 부인했지만, 별 성과가 없었다. 그의 말투가 예수처럼 갈릴리 방언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맹세하면서 그 소녀가 말하는 그 사람을 자신은 알지 못한다고 잡아뗀다.

     

베드로는 같은 입을 가지고 상반되는 두가지 말을 했다.

“당신은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vs. “나는 당신들이 말하는 그 사람을 모른다.”

     

세 번째 부인은 <마가복음>에서는 생략되었다. <누가복음> 22.61-62에 세 번째 부인에 관한 내용이 등장한다:

     

“주께서 돌아서서 베드로를 똑바로 보셨다. 베드로는 주께서 자기에게 "오늘 닭이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모른다고 할 것이다" 하신 그 말씀이 생각나서, 바깥으로 나가서 몹시 울었다.”

     

수탉이 처음 울었을 때, 베드로의 양심을 깨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엔 예수가 한 말을 상기하고 예수가 그를 쳐다보는 눈길로, 자신의 부인을 자각하게 되었다. 왜 그리스도교 교회의 반석인 베드로의 부인을 이렇게 중요하게 다루었는가? 당시 그리스도교 박해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예수의 수제자도 이런 배교를 했지만, 그 후에 회개하고 용서를 받을 길이 있다는 것을, 초대 그리스도교 교인들에게 알리는 희망의 메시지다.

     

사진

<베드로의 부인>La Negazione di Pietro

카라바지오 (17671-1610)

유화, 1610, 94 cm × 125.4 cm

뉴욕 메르토폴리탄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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