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2.11. (火曜日, 42nd/365) “봄”
딱딱하게 얼어붙은 눈 아래에서 잡초는 봄을 애타게 기다린다, 점점 해뜨는 시간이 빨라지는 이 봄, 그 무언가 내 마음속에서 꿈틀거린다. 오늘은 일년 365일중 마흔 두 번째 날이다. 언제나 패배를 안겨다주는 백전백승의 시간이 새벽에 나를 깨웠다. 일어나자마자, 내 손길은 허겁지겁 <도덕경>을 펼쳤다. 삶을 길을 잃었을 때, 방향과 용기를 주는 고마운 책이다. 노자는 왕필본의 마지막인 81장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信言不美(신언불미)
美言不信(미언불신)
善者不辯(선자불변)
辯者不善(변자불선)
知者不博(지자불박)
博者不知(박자부지)
聖人不積(성인부적)
旣以爲人(기이위인)
己愈有(기유유)
旣以與人(기이여인)
己愈多(기유다)
故天之道 (고천지도)
利而不害(이이불해)
人之道(인지도)
爲而佛爭(위이부쟁)
믿을 수 있는 말은 미사여구가 아닙니다.
미사여구는 믿을 수 있는 믿을 수 없습니다.
착한 사람은 변명하지 않습니다.
변명하는 사람은 착한 사람이 아닙니다.
깨달은 자는 이것저것 알지못합니다.
이것저것 아는 자는 깨달은 자가 아닙니다.
자신의 귀로 듣고 실천하는 성인은 혼자 쌓아 두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그 지식은 타인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자신이 남보다 뛰어난 지식을 소유합니다.
처음부터 남들에게 베풀어 주기 때문에
남보다 뛰어난 지식이 늘어납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도는
만물을 이롭게 하지, 해롭게 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자신이 가야할 길을 깨달으면,
지식을 베풀지, 논쟁하지는 않습니다.
만물은 충분한 겨울을 눈 밑에서 견디면서, 저 멀리서 따스한 빛을 가지고 다가오는 햇빛의 세례를 받고 있다. 자신의 꽃잎을 열기 위해 빅뱅을 일으키고 있다. 해가 뜨는 시간이 점점 빨라진다. 내 영혼도 햇빛이 가져다주는 아름다움을 온전히 만끽하기 위해 기지개를 펴기 시작하였다. 오늘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저 멀리 미국에서, 어렵게 실험적으로 일궈낸 민주주의를 금권주의로 깽판을 치는 독재자와 그 IT벌레들로 세계는 다시 전쟁터가 될 것인가? 이 가까이 법정과 광장에서 어리석은 우리들을 거짓과 선동으로 흥분시키는 보기 싫은 정치인들의 선동에 놀아날 것인가?
오늘이 2025년 365일중 42일째 날이라면, 내일은 쥐도새도 모르게 365일중 365일째 되는 날이 될 것이다. 그러다 일생을 마칠 것 같이 불안하고 속이 쓰리다. 새벽을 장악하지 못하면, 하루를 허투루 보내고, 일주일을 알게 모르게 보내고, 한 달을 손가락에 새나가는 모래알처럼 내보내고, 일 년을 눈 깜짝 할 사이에 이별하며 아쉬워할 것이다. 나는 도반들에게 항상 다음 네 가지를 주문한다: 1) 새벽묵상, 무엇을 오늘 안할것인가; 2) 아침산책, 자연은 오늘 나에게 무엇을 말하는가; 3) 독서, 성인들은 무엇을 했는가; 4) 일기, 나는 오늘 무엇을 할 것인가. 내가 네 가지를 주문하는 이유는, 나의 희망사항이기 때문이다.
나의 덕도 부덕도 내가 누구와 함께 지내느냐에 달려있다. 나의 명상과 읽는 책에 달려있다. 오늘처럼 우울하고 간절한 날을 구원하는 도우미가 있다. 감동적인 시와 그림이다. 메리 올리버의 시집을 펼치니 그녀가 독일 표현주의 화가인 프란츠 마크의 작품 ‘푸른 말들’(1911)을 노래하고 있다. 프란츠 마크는 프랑스에서 몇 년 위대한 화가들의 그림들, 특히 반 고흐의 대담한 붓터치와 생생한 색에 영감을 받았다. 마크는 특히 자연 안에서 뛰노는 말들을 그렸다. 그의 그림은 신비하다. 인간이 말을 보는 느낌이 아니라 말들이 우리를 보는 인상을 그렸다. 그에게 푸른색은 남성적이며, 엄격하고 영적이다. 노란색은 여성적이며 섬세하고 육감적이다. 붉은 색은 물질을 상징하며 거칠어, 푸른색과 노란색으로 정복되어야한다. 프란츠는 1911년에 다가오고 제1차 세계대전을 본능적으로 감지하고 이 그림을 그렸다. 이 전쟁으로 우는 2천만명을 죽였다. 마크 자연을 파괴하는 인간과는 달리, 조화를 이루며 사는 동물들을 주로 그렸다.
메리 올리버가 미네소타에 있는 워커 미술관에서 이 그림을 보고 다음과 같은 느낌을 적었다:
FRANZ MARC’S BLUE HORSES by Mary Oliver
프란츠 마크의 푸른 말들, 메리 올리버
I step into the painting of the four blue horses.
I am not even surprised that I can do this.
One of the horses walks toward me.
His blue nose noses me lightly. I put my arm
over his blue mane, not holding on, just commingling.
He allows me my pleasure.
Franz Marc died a young man, shrapnel in his brain.
I would rather die than try to explain to the blue horses
what war is.
They would either faint in horror, or simply
find it impossible to believe.
I do not know how to thank you, Franz Marc.
Maybe our world will grow kinder eventually.
Maybe the desire to make something beautiful
is the piece of God that is inside each of us.
Now all four horses have come closer,
are bending their faces toward me
as if they have secrets to tell.
I don’t expect them to speak, and they don’t.
If being so beautiful isn’t enough, what could they possibly say?
나는 네 마리 푸른 말들 그린 그림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내가 이와 같은 일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말 한 마리가 나에게 걸어온다.
그가 자신의 푸른 코를 나에게 가볍게 비빈다. 나는 팔을
그 푸른 말의 갈기에 올렸다. 잡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저 섞기 위해서다.
그는 내가 즐길 수 있는 쾌락을 허용한다.
프란츠 마크는 젊은 나이에 죽었다. 뇌에 파편이 박혀 죽었다.
내가 전쟁이 무엇인지 이 푸른 말들에게 설명하기를 시도하기 보다는,
차라리 죽는 편이 낫다.
그들은 공포에 질려 기절하거나, 혹은 분명히
절대로 믿을 수 없을 것이다.
프란츠 마크, 내가 당신에게 어떻게 감사를 표현해야할지 모르겠어요.
아마도 세상은 결국 서로에게 더 친절하게 될꺼에요.
아마도 아름다운 것을 만들고 싶은 욕망은
우리 각자의 내부에 존재하는 신의 일부에요.
자, 지금 네 마리 말이 가까이 왔다.
그들의 얼굴을 섞으면서 나에게 구부린다.
그들이 나에게 말하고 싶은 비밀이 있는 것 같다.
나는 그들이 말할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그들은 말하지 않는다.
만일 이렇게 아름다운 것 그 자체로 충분하지 않다면,
그들이 말하고 싶은 것이 무엇일까?
아름다운 것을 추구하는 것, 그 자체로 오늘은 충분하다. 우리안에 존재하는 신의 일부는 무엇인가?
사진
<거대한 푸른 말들>
독일 표현주의 화가 프란츠 마크 (1880-1916)
유화, 1911, 105.7 cm x 181.1 cm
미국 미네소타 Walker Art Center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