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23. (木曜日) “집단정신병集團精神病”
오늘날 우리가 쌓아 올린 문명을 무너뜨릴 가장 큰 위협은, 자연재해나 코로나와 같은 감염병이 아니다. 우리 안에 자리 잡은 집단정신병集團精神病다. 인류는 집단정신병을 이미 15세기와 18세기와 20세기에 호되게 경험하였다. 15세기와 18세기, 유럽과 미국에서 ‘마녀사냥’이란 종교재판으로, 20세기에는 ‘전체주의국가의 국가정책 경험하였다. 우리와 똑같이 이성적인 사람이라고 자신하던 인간들이 자신들과 신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당면한 사회-경제적인 문제를 풀 방식으로 외부를 지목하여 체계적인 폭력을 행사하였다. 마녀사냥 기간동안, 수많은 개인들, 특히 여성들이 자신들이 저지르지 않는 범죄로 살해당했다. 이들은 집단정신병에 걸린 대중이 표적으로 삼은 희생양이었다. 당시 스위스 마을에는 살아 남아있는 여성이 거의 없었다.
20세기 초에 등장한 전체주의는 더 무시무시했다. 소련, 나치스 독일, 북한, 중국, 캄보디아와 같은 전체주의 국가에서 독재자는 신이다. 그 독재자와 그 일당들은 자신들이 만든 이데올로기를 따리지 않는다는 수백만. 아니 수천만명을 죽였다. 여기에는 이성이나 인권은 존재하지 않았다. 힘이 있는 자들이 ‘적’을 상상하고 만들어, 그들을 처단하였다.
21세기 집단정신병은 겉으로 드러나는 폭력이 아니라, 인터넷을 통한 점진적인 방법으로 감염된다. 2007년에 iPhone이 출시되고 현대인들의 핸드폰 사용은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핸드폰 소지자들은 하루에 평균 6시간 이상을 카카오톡, 인스타크램, 페북, 트위터, 티톡과 같은 SNS에서 소비한다. 스마트폰을 기반한 환경이 분명 우리에게 무한한 유흥과 재미를 주고, 타인과의 소통을 편리하게 만들어주고, 그로 인해 새로운 일자리와 이익을 창출하고, 상상할 수 없는 정보, 이미지, 영상을 우리의 손에 쥐어 주었다.
그러나 이 생태계가 우리에게 가져다준 놀라운 혜택을 무색해 하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사용자를 금새 중독자로 만든다는 점이다. 콘텐츠는 대부분 피상적이고 단정적이며 적대적이고 자기도취적이다. 그래야, 그 창작자에게 더 이익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트럼프 취임식 때, 무대 위에 나란히 선 앨론 머스크와 빅태크 회장들은 다양성을 기반으로 구축해온 인류문명의 원동력인 창의성을 무너뜨린 주범들이다. 인류는 미국-중심으로 펼쳐질, 획일적이며 일방적인 인터넷문화가 얼마나 위험하지를 곧 알게 될 것이다.
인터넷과 유튜브 중독된 젊은이들은 집단정신병환자다. 어린아이라면 누구나 운동장이나 자연에서 배워야 할 자기-나름의 인성을 구축해야한다. 이들은 소중한 교육을 핸드폰 영상과 그 알고리즘에 강탈당했다. 이 현상은 어린아이에 그치지 않고 어른들에게도 퍼져나갔다. 요즘 은퇴자들로, 대부분, 자신이 선택한 유튜브 동영상을 통해 새로운 세계관을 형성한다. 집단정신병에 걸린 사회는 도덕적으로 야만적이고 영적으로 열등하여, 무의식적으로 지적으로 열등한 우물에 빠진다. 이들은 비이성적이며, 책임을 쉽게 타인에게 전가하고 감정적이며 믿을 수가 없다.
문제는 집단정신병에 걸린 당사자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평가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다는 점이다. 개인은, 일정한 조치를 취하면, 자신의 실수를 일정하지만, 집단정신병 환자는,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지 않고 집단적으로 폭력을 통해 자신의 신념을 관철시키려한다. 독일 나치스의 지배하에, 그 똑똑하고 과학적이며 교양있는 최고 선진국 독일인들이 최면에 걸린 양떼처럼, 죄가 없는 수백만명 유대인들이 가스실에게 끌려가 죽어가는 악행을 방관하였다. 정신병은 현실로부터의 괴리 혹은 현실에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의 상실로 정의할 수 있다, 사실에 근거하는 사고와 신념 대신에 자신 혹은 자기가 속한 집단에서 만들어진 잘못된 신념에 근거한 망상에 의존하는 병이다. 이 환자들은 자신이 구축한 삶의 철학을 신봉하는 것이 아니라, 집단이 만든 이데올로기에 포로가 된 사람들이다. 어릴 때부터, 구글고글을 차고 나온 우리 아들에게 희망찬 미래가 있는가? 예전 국민교육헌장에 나오는 문구처럼, 누구나 저마다의 소질을 개발하여, 자신이 원하는 인물이 될 수 있을까? 트럼프의 등장을 보면서, 잃어버진 미국만의 가치를 생각해 보았다. 여기 지금은 사라져 버린 미국의 가치다. 미국의 독창주의와 예외주의, 개인주의가 실용주의철학으로 발전하여 오늘날 미국이 되었다. 트럼프는 실용주의를 미국우선주의라는 비윤리적이며 이기적인 모토로 미국의 위상을 다시 세우겠다고 큰 소리친다.
로버트 프로스트(1874-1963)은 미국의 개인주의을 노래한 시인이다. 그가 시인이 되겠다고 마음을 먹고 당시 미국시인들이 그랬듯이, 영국으로 건너가 30편의 시를 모아 첫 시집 <소년의 의지>A Boy’s Will을 1913년에 출간한다. 당시 영국에서 활동하던 비평가 에즈라 파운드의 호평을 받았다. 이 시집에 등장하는 <내 자신에게 깊숙이>Into My Own는 프로스트가 1894년 가을 그의 고동학교 동창인 엘리노에게 청혼하였으나 거절당한 후, 자신의 진심을 알려주기 위해 버지니아주 남동쪽과 노스 캐롤라이나 북동쪽에 걸쳐 있는 늪지대 그레이트 디스멀 스왐프Great Dismal Swamp에서 자취를 감춘다. 이 사건으로 엘리노는 프로스트의 사랑을 다시 확인하여 그 다음 해인 1895년에 결혼한다. 프로스트는 이 늪에서 자신의 미래와 사상을 깊이 숙고하였다. 그가 한 일은 자신에게 깊숙하게 들어가 자신의 양심에 물었다. <내 자신에게 깊숙이‘라는 시는, 프로스트가 시인으로서의 결단과 사랑을 쟁취하기 위한 결의를 보여준다.
Into My Own by Robert Frost
“내 자신에게 깊숙이” 로버트 프로스트
-<소년의 의지> (1913)
One of my wishes is that those dark trees, So old and firm they scarcely show the breeze, Were not, as 'twere, the merest mask of gloom, But stretched away unto the edge of doom
내 소원중 한가지는 이 암울한 나무들이,
해묵고 단단하여 산들바람에도 거의 흔들이지 않고
단순히 우울의 가면에 불과하지 않고
운명의 끝까지 쭉 뻗어나가길 원하는 것이다.
I should not be withheld but that some day
Into their vastness I should steal away,
Fearless of ever finding open land,
Or highway where the slow wheel pours the sand.
어느 날, 나는 내가 도망쳐야만 했던
광활한 곳으로 진입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열린 땅이나, 느릿한 수레바퀴가 모래를
쏟아놓는 신작로라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I do not see why I should e'er turn back,
Or those should not set forth upon my track
To overtake me, who should miss me here
And long to know if still I held them dear.
나는 중간에 돌아설 이유를 찾지 못한다.
여기에 있는 나를 그리워하여, 나를 따라 잡기 위해
혹은 내가 그들을 아직 사랑하고 있는지 알고 싶어
내 발자국을 따라올 필요가 없다.
They would not find me changed from him they knew-
Only more sure of all I thought was true.
그들은 자신들이 아는 내가 변했다는 점을 발견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내가 참되다고 생각한 것을 더욱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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