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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 (木曜日) “有生於無유생무어”

2025.1.2. (木曜日) “有生於無유생무어”

     

순간을 사는 우리가 발견하려 몰입해야할 유일한 임무가 몫이다. 몫은 우리의 목숨을 온전히 헌신해야하기에 목숨의 준말로 몫이란 단어가 생겼을 것이다. 몫은 과거의 몫숨을 버리고 새로운 목숨으로 대치할 때 생긴다. 고대 이집트인은 인간이 추구해야할 가장 중요한 원칙인 몫을 ‘마아트’라고 불렀다. 타조깃털모양의 성각문자 마아트maat는 ‘적당한’을 의미하는 ‘마아maa’의 명사형이다. 그 깃털처럶 금방 날라갈 수 있지만, 고요할 때 살포시 내려 앉을 수 있는 섬세한 삶의 나침반이다. 나에게 적당한 것, 유일무이한 것을 찾기 위해서 해야 할 작업이 있다.

     

나에게 필요가 없는 것을, 혹은 알게모르게 중독된 것을 버리는 행위다. 그것을 하지 않겠다고 맹세하는 ‘부정고백’을 해야 한다. 고대이집트인들이 영원한 사후세계로 진입하기위해 소위 ‘부정고백’Negative Confessiond이란 의례를 치룬다. 인간으로서 떳떳하게 살기 위해, 저지르지 말아야할 60가지를 하지 않겠다고 고백하고, 실제로 하지 않을 때, 그 사람은 자신의 몫을 찾을 수 있다. 그런 후, 신은 그에게 가장 적당한 몫인 ‘마아트’를 선물로 준다. 누구는 농부로, 누구는 가수로, 누구는 화가로, 직업에 귀천이 없이. 자기 분야에 정통하고 행복한 자가 된다.

     

수메르인들은 이 몫은 메ME라고 불렀다. 메는 원래 쐐기문자에서 야생황소의 뿔이었다. 중동 사막지역의 왕은 야생황소였다. 그 뿔의 길이가 1.5m정도다. 그 뿔이 후에 인간이면서 신성을 가진 존재의 표식인 왕관이 되고, 인간과 구별된 존재인 신의 후광이 되었다. 수메르를 정복한 바빌로니아인들은 ME를 쉼툼shimtum으로 번역하였다. ‘쉼툼’은 아카드어 동사 샴sham의 여성명사형이다. 샴은 ‘적재적소에 배치하다’라는 뜻이다. 나무는 나무로, 돌은 돌로, 인간은 인간으로, 우주의 일원으로 배치되었다. 인간에게 쉼툼은 자신의 운명이다. 우리 각자가 해야 할 유일한 임무이자 의무다.

     

어제 소개하고 번역한 <전도서> 3장 22절에서 인간이 각자 하는 일에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이유는, 그 일이 자신에게 운명이자, 임무이자, 의무이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그 원문과 번역을 올린다:

     

וְרָאִ֗יתִי כִּ֣י אֵ֥ין טֹוב֙ מֵאֲשֶׁ֨ר יִשְׂמַ֤ח הָאָדָם֙ בְּֽמַעֲשָׂ֔יו כִּי־ה֖וּא חֶלְקֹ֑ו כִּ֣י מִ֤י יְבִיאֶ֙נּוּ֙ לִרְאֹ֔ות בְּמֶ֖ה שֶׁיִּהְיֶ֥ה אַחֲרָֽיו׃

“그리하여 나는, 사람에게는 자기가 하는 일에서 보람을 느끼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곧 그가 받은 몫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죽은 다음에, 그에게 일어날 일들을 누가 그를 데리고 다니며 보여 주겠는가? 자신이 하는 일에 보람을 느낄 정도로 최선을 다는 것이 인간에게 최선의 운명이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은, 이 세상의 어떤 일보다 자신에게 기쁨과 자부심을 선사한다. 그러지 않으면, 당장 그만두어야한다. 왜냐하면, 인생이 우리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금방 끝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인생이 5막인지 알았는데, 신이 부르면 3막으로 그 무대에서 바로 사라져야한이다. <전도서> 저자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란 의미로 ‘마아쇼’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이 단어는 특별한 단어가 아니라, 인간의 모든 직업을 의미한다. 귀천이 없는 모든 직업이다. 내가 그 일에 보람을 느낀다면, 그것이 최고의 직업이다.

저자는 ‘아인 토브 민ִּ’ 즉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라고 쓴다.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일, 그것이 나의 몫이다. ‘몫’을 의미하는 ‘할락’은 내가 나의 최선을 경주해야할, 예수의 말을 인용하지면, ‘자신의 십자가’를 의미한다. 자신에게 맡여진 십자가를 기꺼이 질 수 있 수 있는 각오가 서야한다. 교육이란 이 몫을 우리가 찾도록 도와주는 체계적인 자극이다. 그 몫을 부모나 사회가 강요한다면, 그것은 몫이 아니라, 족쇄다. 이 족쇄를 차고 있으면, 내가 가고 싶은 목적지까지 갈수 없기에 우울해지고, 달릴 수 없어 좌절한다. 그런 사람들은 그럭저럭 산다. 특히 자신에게 맡겨진 몫을 타인위에 군림하기 위한 수단으로 착각한다면, 그에게 또한 주위사람에게 지옥이다.

     

우리사회가 지금 겪고 있는 이 정치적인 혼란은 한 나라의 리더가 자신의 몫을 목숨을 내놓고 자신의 제왕적인 특권으로 단단하게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계엄혼란과 무안참사를 우리 국민이 어떻게 지혜롭게 극복하느냐에, 대한민국의 국운이 갈릴 것이다. 더 이상 더 떨어질 수도 없는 시커먼 바닥에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신음하고 있다. 노자는 <도덕경> 어록 40은 리더를 포함한 위대한 개인의 힘씀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反者道之動반자도지동

자신만의 길을 찾아 수련을 하는 도중에 있는 자는,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밖이 아니라 내면으로, 정반대로 움직입니다.

그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응시합니다.

     

弱者道之用약자도지용

타인이 보기엔 유약해보이지만, 그는 밤에 아부꾼들과 만나 술을 퍼마시고 어퍼컷을 날리지 않습니다.

그는 고요하게, 마치 어린아이처럼 유약하게 자신의 마음을 가만히 살피는 도인입니다.

     

天下萬物生於有 有生於無 천하만물생어유 유생어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물질세계는 있음에서 삼라만상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그 있음은 절대바탕인 없음이 낳은 자식입니다.

우리가 매일 아침 자신을 관조하여, 어제의 있음을 공허하게 만드는 명상과 기도로

수련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삶은 아수라장이 될 것입니다.

자신의 삶에서 올바른 길을 추구하는 사람은 미약한 무의 세계에서

자신을 미약한 어린이로 만드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있음은 없음에서 나올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2025년 우리 각자의 몫을 찾기 위해, 유생어무有生於無를 고요하게 수련하면 좋겠다.

     

사진

<방랑자>

독일화가 한스 토마Hans Thoma (1839-1924)

유화, 1910, 24 cm x 33.5 cm

개인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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