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17. (金曜日) “다시 태어나십시오!”
인류는 디스토피아 시대로 이미 진입하였다. 컴퓨터와 인터넷으로 장엄하게 그 장엄한 대문을 열고 자방적으로 들어갔다. 단테는 <인페르노> 제3곡에서 다음과 같은 문구로 우리를 반긴다.
1. “Per me si va ne la citta dolente,
2. per me si va ne l'etterno dolore,
3. per me si va tra la perduta gente.
1. 나를 통해 사람들은 슬픔의 도시로 들어갑니다.
2. 나를 통해 사람들은 영원한 고통으로 들어갑니다.
3. 나를 통해 사람들은 길을 잃은 사람들 사이로 들어갑니다.
단테는 피렌체 정치인들을 보고, 그들은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여 그 결과 공동의 선에 해가 되는 지옥을 만드는 장본인이라고 평가하였다. 지옥의 특징은 슬픔, 영원한 고통, 파멸된 사람들. 슬픔dolente은 자신이 흠모하는 것으로부터 강제적으로 이탈된 상태에서 느끼는 감정이다. 이탈리어어 dolente의 어근인 인도유럽어*dehl-의 기본의미는 “-로부터 떨어져 나간; 찢겨진”이란 의미다. 자신이 간절하게 바라는 열망을 잊고, 그것을 구체화하려고 묵상하지 않고, 그 결과 자신의 본모습과 본래 자신의 바람으로부터 이탈된 상태가 슬픔이다. 슬픔의 원인은 열망의 부재다.
자신의 본래의 모습으로부터 이탈된 슬픔의 과정이 고착화되면, 자신도 모르게 다른 상태로 진입한다. 그 상태를 “영원한 고통”이라고 말한다. 고통dolere도 ‘슬픔’이란 단어와 동일한 어근*dehl-에서 파생되었다. 슬픔은 자연스럽게 고통으로 변한다. 자신에게 주어진 유일한 임무나 열망을 깨닫지 못해, 슬픈 상태가 지속된다. 더 이상 자기 스스로 개선의 여지가 없는 절망적인 시간을 ‘영원’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1행의 ‘슬픔’이 지속되면 2행의 ‘영원한 고통’이 된다.
지옥은 슬픔에 지쳐 영원한 고통 안에 희망이 없는 사람들은 3행에서 ‘파멸된 인간들’la perduta gente이라고 부른다. ‘파멸된 인간’이란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모르거나, 주어진 임무를 알았다 하더라도 그것을 낭비한 사람이다. 라틴어에 ‘페데레’perdere라는 동사가 있다. 이 동사 의미는 “없애다; 파괴하다; 잃어버리다; 낭비하다”이다. 라틴어 접두사 per라는 접두사는 ‘널리 흩어져 거의 보이지 않는’이란 의미도 ‘dere’는 인도유럽어 어근 *dhH2r에서 파생된 단어로 “우주의 질서에 맞게 적재적소에 두다”라는 뜻이다. 더 이상 희망이 없는 사람, 파멸된 인간은 “자신의 고유한 임무를 깨닫지 못하고 이리저리 아무데나 자신의 힘을 낭비하는 사람”이다.
작년 12월 3일 밤 10시 30분, 술김에 발표한 비상계엄으로 우리는 길을 읽은 족속이 되었다. 단테가 사용한 ‘길을 잃은 사람들’perduta gente는 신의 형상imago dei로 창조된 인간의 정반대다. 자신이 신으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알지도 인정하지도, 그리고 그것을 구현하지도 않는 무지이자 게으름이며, 더 나아가 비겁이다. 50년전, 인페르노의 회로가 인터넷와 SNS란 이름으로 등장하였다. 한번 들어가면 빠져나올 수 없는, 욕심, 폭력, 사기로 가득찬, 중독의 공간이다. 사용자가 마약중독자처럼, SNS나 유튜브에 난무하는 선동문구들을 사실로 인식하는 정신병자로 둔갑한다.
서울법대를 나온 대통령까지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을 편향된 유튜브를 통해 숙지하고, 나라를 대한민국을 다스리겠다고 나서니, 기가 찰 노릇이다. 그 나마, 우리들 가운데 따를만한 카리스마가 있는 인물로 그를 뽑은 우리의 책임이다. 미국도 대책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미국 우선주의라는 파렴치하고 비윤리적인 구호를 들고 나온 선동가 트럼프가 재집권에 성공하였다. 미국 지식인들과 언론인들이 대중의 안목을 높이는데 실패했다는 증거다. 그와 대적할 만한 인물을 만들어내지 못한 민주당도 공범이다.
현대문명이 당면한 문제를 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있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우리의 근본을 갈아엎어야하는 혁명이기도 하다. 우리 하나 하나가 자신으로 돌아가 각자나름대로 괜찮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 길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분야는 교육과 종교이다. 수월성교육이 아니라, 체력단련을 바탕으로 한 인성교육이다. 인성교육이란, 좋은 소설을 읽고 독후감을 쓰는 교육이고, 좋은 시를 감상하고 암송하는 교육이다. 글쓰기와 암송만이 인간을 서서히 변화시킨다. 물론 글쓰기와 암송을 위해 산책과 명상이 필수적이다. 이런 교육을 통해, 인간은 자신의 되어야할 인간을 상상하고 그런 존재가 될 수 있고 믿는 ‘자기-종교’를 믿어야한다. 21세기 종교는 ‘자기-종교’다. 이 종교인은 매순간 혁신적이며 포용적이고, 자신에겐 엄격하고 타인에겐 친절하면, 자신과 타인이 ‘우리’가 아니라 ‘하나’가 된다. 타존재를 위한 행위가 결국 나를 위한 행위다.
인간은 세 번 태어난다. 부모로부터 육체를 지닌 동물로 태어난다. 짐승이다. 그러나, 어머니라는 존재의 헌신적인 보살핌으로 누군가의 아낌없는 자비의 행위가 인간을 생존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신체를 지녔지만, 그 안에 자비라는 영적인 유전자를 지닌, 아직 개화되지 않는 인간은,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야하고, 자신의 뜻을 펼치기 위해, 지적으로 탄생해야한다. 다른 사람과 어울려 살아야하기에 학교에 다니면서 생존에 필요한 정보를 습득하는 사회의 일원으로 다시 태어난다. 교육의 원래 목적대로 자신으로 다시 태어나야하지만, 그 목적을 잃은 나쁜 교육은, 세상을 편하게 살기 위해, 제로섬 경쟁에서 유일한 승자가 되기 위해 배운다. 우리사회를 야만사회도 돌린 자들을 보면, 줄줄이 고학력자들이다. 이제 우리는 K-교육이 수월성교육으로는 성공했지만, 타인과 어울려 사는 교육으로는 빵점이란 사실을 고백해야한다.
인간은 세 번째로, 자신으로부터 다시 태어나야한다. 소수만이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만의 소명을 깨달아 각성한 인간으로 탄생한다. 우리 대부분은 신체의 욕구과 편함이 행복인 줄 알고 그것을 충족하며 하루하루 연명한다. 편함은 시간이 지나면 불편으로 변하기 마련이다. 소수만이 삶이 가져다 주는 파란만장한 고통과 역경을 경험한 후, 자신이 나머지 인생을 헌신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임무를 발견한다. 그 계기가 소명召命이다. 대한민국에 각성한 자들이 점점 많아지면, 어떤 선진국로 도달하지 못한 진정한 선진국으로 도약할 것이다.
여기, 주식이나 코인을 만지작거리며, 이 각성의 소리를 못들은 척하는 사람에 관한 그림이 하나 있다. 이탈리아 화가 카라바조 (1579-1610)다. 카라바조가 남긴 많은 그림들 중, 이 소명의 순간을 감동적으로 묘사한 그림이 있다. 바로 <성 마태의 소명>이다. 그는 1599-1600년에 이 그림을 로마에 있는 프랑스인들을 위한 교회 산 루이지 데이 프란체시 성당 안에 위치한 콘타렐리 예배당 벽 장식을 위해 그렸다. 그전까지는 로마의 귀족들을 위해 이런저런 그림들을 그렸다. 그러나 <성 마태의 소명>은 그가 요청받은 첫 공공성격의 그림이다. 이 성당엔 이곳엔 카라바조가 그린 마태를 위한 두 그림, 즉 <성 마태오의 순교>와 <성 마태오의 영감>도 전시되어있다.
프랑스 출신 추기경인 마테오 콘타렐리가 10년전에 많은 돈을 남기며 유언을 남겼다. 자신의 이름과 관련된 예수의 제자인 마태에 관한 성화제작을 부탁했다. 이 성당 안, 예배당의 천장화는 카라바조의 고용주이며 당대 최고의 화가인 주세페 체사리가 맡았다. 체사리가 바티칸 성당 그림 작업으로 바뻐지자, 카라바조에게 기회가 왔다. 당시 바티칸 자금을 담당하던 주교 프란체스코 델 몬테가 마태와 관련된 성화제작일을 맡았다. 그는 평상시 카라바조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였다. 카라바조는 자신의 이름을 로마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전역에 알릴 절호의 기회를 잡은 것이다,
카라바조는 마태에 관한 무슨 그림을 그릴 것인가? 그는 마테에 관한 세 장면을 구상하였다. 세리였던 마태가 예수의 부름을 받는 장면, 마태가 영감을 받아 첫 복음서를 기록하는 장면, 그리고 마태가 순교하는 장면이다. <성 마태의 소명>의 내용은 복음서에 등장한다. 예수가 수제자인 베드로와 함께 갈릴리 해변 마을을 지나고 있었다. 늦은 오후 해는 뉘엿뉘엿지고 있었다. 그들이 상가들이 즐비한 거리를 지나면서 조그만 사무실 앞에서 가던 길을 멈춘다. 그곳은 세금을 징수하는 사무실이었다. 납세자들과 징수원들이 모여 옥신각신하며 세금을 계산하는 장소였다. 예수는 그 안에서 사람들이 모여 돈을 세고 있는 것을 목격하였다. 이곳은 로마제국의 위임을 받아 가난한 동료 유대인으로부터 세금을 징수하고 계산하는 악명높은 마태의 세무소였다. 마태의 이름은 히브리어로 ‘야훼의 선물’이란 뜻이지만, 유대인들은 그를 ‘사탄의 징벌’이라고 불렀다. 그는 유대 사회에서 가장 악명이 높은 기피대상 1호였다.
예수와 베드로가 세금 동전을 계산하기 위한 테이블만 달랑 놓인 어두침침한 세무서 문을 열고 들어간다. 이들이 문을 열고 들어서자, 빛이 강렬한 빛이 오른 편에서 사선으로 들어와, 책상에 앉아 있는 다섯 명에 떨어진다. 벽에 마련된 창문의 덧문이 활짝 열여 있지만, 네 장의 창문을 통해서는 빛이 새어 나오지 않았다. 마치 고대 이집트 피라미드의 가장 깊은 곳에 장식된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가짜 문과 같다. 이 창문은 유리가 아니라 빛의 통과를 거부하는 유포油布로 막혀있다. 긴 테이블 위에는 징수한 동전들, 돈주머니, 펼쳐진 회계장부, 깃털이 달린 펜이 꽂혀있는 잉크병이 놓여있다.
이 테이블의 끝에는 세금을 내야하는 한 젊은이가 사보나롤라 의자에 앉아 있다. 사보나롤라는 몇 개의 굽근 다리가 x형으로 교차하고 팔걸이가 있는 르네상스 시대 유행하던 의자다. 그는 지금 막 세금을 납부하였고, 이젠 세리로 부터 돌려받아야 할 잔금을 동전으로 받고 있다, 그는 세리의 손에서 책상위로 딱딱소리를 내며 올려지는 동전을 응시하고 있다. 그의 어깨는 긴장하여 잔뜩 올라가 있다. 그의 눈은 돌려받은 동전을 꿰뚫어지게 응시하고 있고, 오른 손으로 책상을 치며, 한 개씩 돌려주는 동전을 세고 있다. 그의 왼손은 오른 팔 밑으로 들어간 돌려받을 잔돈이 들어갈 주머니를 쥐고 있다. 그는 불안한지, 사보나롤라 의자 앞쪽에 걸터 앉아, 오른쪽 발 뒤꿈치를 들고 계속해서 떨고 있다. 예수를 따라 진입한 빛이 그의 허벅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 젊은 납부자 곁에, 동그란 안경을 낀 노인이 동전을 자세히 쳐다보고 있다. 그는 고급스럽게 정돈된 모피를 입고 있다. 징수자와 납세자 사이의 현금거래가 올바르게 진행되는지 검열한다. 그는 거간으로 많은 돈을 번 속물이다.
그 옆에 세금징수자 주인공 마태가 앉아 있다. 마태 옆에는 동그란 얼굴을 하고 털 모자를 쓴 소년 사환이 마태의 어깨에 자신의 오른팔을 올렸다. 그는 카라바조의 시칠리아 출신 친구이며 화가인 마리오 민니티다. 이 그림을 위해 모델로 참가하였다. 이들 앞에는 또 다른 사환이 깃털이 달인 자를 쓰고 입장하는 예수를 보며 몸을 틀었다. 검은색은 줄을 댄 흰색 웃옷이 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다. 그는 아마도 납세자와 함께 온 친구일 것이다.
<마태복음>에 등장한 세리 마태가 예수의 제자가 되는 장면은 극도로 간결하다. 카라바조는 마태가 예수를 만나는 장면을 묘사한 <마태복음> 9장 9절을 깊이 읽었다. 읽고 또 읽었다. 다음은 그 내용이다. “예수께서 그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셨다. 그가 그에게 말했다. ‘나를 따르라’. 그리고 그가 일어나 예수를 따랐다.” 카라바조가 주목한 지점은 예수가 ‘나를 따르라!’라고 말한 후에, 마태가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따르기까지의 침묵만이 흐르는 순간이다. 이 예수의 간절한 부름과 마태의 주저가 만나 혼돈을 일으킨 영원한 순간이다.
카라바조는 이 이야기의 나머지를 전부 생략하고 이 결정적인 순간에만 집중한다. 예수가 마태의 관공서에 들어서자 ‘나를 따르라’라고 딱 두 마디를 던졌다. 마태는 이 낯선 자의 과감한 부름에 놀라 고개를 돌려,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예수의 눈을 가만히 보았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요구다. 그는 자신을 부르는 예수의 소명을 믿을 수가 없어 입술을 꼭 다문다, 그런 후 왼손으로 자신의 몸을 가르키며, “누구요, 저요?”라고 되묻는다. 이 순간, 그는 정신을 차리를 수가 없다, 오른손 엄지와 검지로 납세자 청년에게 돌려줘야 할 마지막 동전을 아직 책상 위에 올리지 않았다. 자신이 돌려 받아야할 동전이 아직 그의 손에서 내려오지 않자, 납세자는 다시 다리를 떨기 시작하였다.
마태는 과연 예수를 따를 것인가? 카라바조는 마태의 심정의 변화를 책상 밑에 있는 마태의 다리로 표시하였다. 그의 몸은 이미 자신이 가야 할 방향을 알고 있었다. 그의 머리와 손은 돈을 세는데 정신이 팔려있지만, 그의 발은, 그의 몸은 자신이 가야 할 유일한 곳을 향해 이미 방향을 틀었다. 흰색 타이즈와 검은색 신발을 착용한 마태의 다리와 발이, 새로운 목적지를 가기 위해, 일어나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예수의 명령도 마태의 결단도 불가피한 운명이었다. 카라바조는 예수의 신성을 잘 보이지 않는 머리위 희미한 노란색 직선 후광으로 표시하였다. 예수는 이 순간에 마태를 최면이 걸릴 정도로 강렬한 눈빛으로 보았다. 그가 마태를 간절하게 부르지만, 그는 동시에 이 사무실을 떠날 참이다. 예수 앞에 서 있는 베드로의 그림자에 가려져 겨우 보이는 예수의 맨발은 이미 방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성 마태의 소명>은 빛과 어둠의 대비뿐만 아니라, 마태와 그의 동반자들의 착용한 화려한 장식이 달린 16세기 르네상스시대 옷과 예수와 베드로의 남루한 의상과 맨발이 대비된다. 예수와 베드로는 다른 시대와 장소에서 온 다른 윤리와 영성을 지닌 자들이다. 예수는 이미 마테를 데리고 이 방을 떠날 것이다. 예수와 베드로의 맨발은, 모세가 가시덤불에서 신을 만났을 때처럼, 이 소명의 행위가 거룩하다는 것을 상징한다.
<성 마태의 소명>은 예수가 마태를 지목하는 있는 손을 미켈란젤로가 시스틴 성당 천장화에 그린 <아담의 창조>에 대한 재해석이다. 미켈란젤로는 <아담의 창조>에서 신은 다 시들어가는 아담의 손을 향해 생명을 부여하는 자신의 검지 손가락들 가져간다. 카라바조는 <성 마태의 소명>에서 신의 손이 아니라 인간인 예수의 손을 그린다. 카라바조에게 예수는 신의 형상을 지닌 두 번째 아담이다. 그 뿐만 아니라 <성 마태의 소명>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에 대한 세속적인 재해석이다. 예수가 부르는지도 모르고 돈주머니를 쥐고 동전을 세고 있는 자는 아마도 은 오십냥에 예수를 팔아넘긴 가롯 유다일 것이다. 마태는 이제 예수를 통해 자신의 소명을 들은 것이다. 이 소명은 외부가 아니라, 자신의 내부에서 들어오는 희미한 소리다. 고독과 침묵만이 이 소리를 경청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혼돈에 빠진 대한민국이 살아날 길은, 우리 각자가 고요히 자신의 소명을 알아차리는 소명이다.
그림 1
<성마태의 소명>
카라바조 (1571-1610)
유화, 1599, 322cm x 340cm
로마 산 루이지 데이 프란체시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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