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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9.19.(木曜日, 262th/365) “침잠沈潛”

2024.9.19.(木曜日, 262th/365) “침잠沈潛”

     

오늘은 2024년을 구성하는 365일중 262번째 날이다. 묵상일기를 쓰면서, 이 서수를 상기해 내기가 힘들다. 며칠 지나면, 계산이 되지 않아, 1월부터 날짜는 더해, 이 숫자를 찾는다. 2024년의 262번째 날, 추석 연후 다음날, 오늘 목요일은 빅뱅을 통해 시간이 탄생한 후, 만물이 처음 진입하는 순간이다. 여전히 새는 울고, 밤송이는 긴창으로 무장한 갑옷을 찢기 시작한다. 오늘도 기적처럼 어둠은 저 멀리서 올라오는 미명에게 온전히 자리를 내준다.

     

아, 새날이다! 오늘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정해진 시간을 살다 죽는다는 사실을 유일하게 아는 인간은 원래 허무적이며 염세적일 수 밖에 없다. 쇼펜하우어 철학이 인기가 있는 이유다. 요즘은, 문명이기가 인간의 욕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선정적인 영상과 내용으로 더 자극하고, 그 결과 정신이 혼미해지고 영혼은 질식한다. 이 이기가 우리의 비극적인 인생을 잠시 잊게 해주지만, 별로 소용이 없다. 자신의 본질을 외면하면 할수록, 충족되지 않는 거대한 자아, 신과 하나가 된 자아, 우주 자체인 자아가 질식하여 결국 우울이란 바다로 흘러가기 때문이다. 인터넷이 빵빵터지지는 대한민국이 자살율 세계 1위와 출살율 세계 꼴지를 굳건하게 지키는 원인이다.

     

희망希望이란,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한다고 믿는 무형의 자아에 대한 충성이다. 조금씩 품다 보면, 정해진 시간에 그 껍데기가 벗겨지고 그 알이 깨진다. 그 알을 깨기가 얼마나 힘든지! 헤세가 <데미안>이란 소설에서 우리에게 알려주려는 진실이다. 희망의 보루인 교육과 종교가 실종되었다. 학교는 이윤을 목표로 하는 기업을 위한 직업훈련소가 되었고, 종교는 존재하지 않는, 경험할 수 없는 저 너머 세계와 그 세계를 주관하는 존재에 대한 알 수 없는 교리를 암송하는 양떼의 울타리가 되었다.

     

희망이 있다면, 그 희망은 기관이 아니라, 개인에게서 발견되어야 한다. 개인이 곧, 공동체이고 국가이기 때문이다. 인권에 반하는 헌법은 악법이고, 사랑을 무시하고 반대하는 교리는 거짓이기 때문이다. 개인인 우리가 희망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그 장소는 나만의 심연이다. 가만히 눈을 감고 그 누구도 들어 가본 적이 없는 나만의 ‘어두운 숲속’으로 들어가면, 그 안에 나의 참모습이 발견된다.

     

내가 그 내면으로 들어가 생명의 물이 한없이 샘솟는 원천에 좌정하면, 그곳에서 생경하지만, 온전한 내가 침잠하게 앉아있다. 침착이란 장소에서, 그 누구도 내가 어디로 가는지, 내가 무엇을 하는지 묻지 않는다. 나는 내가 있어야할 어머님의 뱃솟에 들어와 배양되기 때문이다. 나는 이곳에서 내-자신myself가 되고, 타인이 보기에는 각자Isness가 된다. 이곳에 진입하면, 신이란 명칭은 사라지고 지금-여기에서 생성되고 있는 됨Becoming만 존재한다.

     

됨은 존재와는 달리 끊임없는 변화하는 부드러움이다. 노자는 <도덕경> 78장에 이 됨을 물로 설명한다.

天下莫柔弱於水, 而攻堅强者, 莫之能勝, 以有無以易之

천하막유약어수, 이공견강자, 막지능승, 이유무이역지

“세상에는 물로다 부드럽고 여린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단단하고 강한 것을 공격하는 것엔

물보다 앞선 것이 없습니다.

물은 (다른 것)을 가볍게 다를 수 있다고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은 만나는 모든 것에 자신을 변화시키는 융통성과,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수용성, 그리고 모든 것을 마다하지 않고 온몸으로 껴안는 포용성의 상징이다. <도덕경> 8장에 등장하는, 또 다른 물에 관한 찬양시처럼 상선약수다. 물의 침착, 그 대상에 깊이 침잠하여 함께하는 상태를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겔라센하이트’Gelassenheit란 용어를 사용하였다. 한없이 자신을 늘려 사라지지만, 상대방을 살리는, 희망의 교육이자 종교의 핵심이다. 서양은 너무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고 없어지 않는 것’이란 의미를 지닌 그리스 단어 ‘엘레세이아’aletheia를 진리라고 숭배해왔다.

     

구성원들이 자신의 심연으로 내려가 다른 존재들의 심연과 합류하는 장소가 천국이다. 예수를 따르던 바리새인들을 천국을 자신들이 계산한 미래의 시간과 장소에 가두었다. 그런 인위적인 시공간은 지옥이다. 왜냐하면, 천국은 각자의 마음속에 존재하지만, 자연과 신과 합일되는 심연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천국을 <누가복음> 17장 21절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οὐδὲ ἐροῦσιν Ἰδοὺ ὧδε ἤ Ἐκεῖ· ἰδοὺ γὰρ ἡ βασιλεία τοῦ Θεοῦ ἐντὸς ὑμῶν ἐστιν.

ולא יאמרו הנה פה או הנה שם כי מלכות האלהים הנה בקרבכם היא׃

     

“천국은 여기있다 저기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장소가 아니다.

오히려,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들 가운데 있다.”

     

신약성서의 원전인 그리스어 원문에서는 ‘하느님의 왕국ἡ βασιλεία τοῦ Θεοῦ’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아뿔사! 예수가 자신의 아람어 혹은 히브리어 용어를 이런 식으로 번역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진노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천국은 장소란 의미를 지니고 있는 ‘왕국’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이 문장을 히브리어로 번역하면 ‘말쿠쓰 하엘로힘 מלכות האלהים’이다. 혹은 예수가 사용하던 아람아로 쓰자면 ‘말커싸 엘로하’ 정도 될 것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말쿠쓰’(히브리어) 혹은 ‘말커싸’)는 ‘통치’라는 의미다. 오히려 히브리어를 라틴어로 번역한 히에로스무스가 regnum라로 옳게 번역하였다. 천국이란 인간 각자의 심연에 있는 신의 음성에 승복하는 상태다. 그러기에 예수는 천국이 ‘너희들 가운데’있다고 말한 것이다.

     

우리는 그 침잠을, 그 천국을 발견해야한다. <도마복음서> 어록 1은 천국을 찾는 행위를 해석이라고 말하고, 해석은, 문장 안에 숨겨진 의미를 발굴이라고 말한다:

     

(그리스어)καὶ εἶπεν̣· [ὅς ἂν τὴν ἑρμηνεί]αν τῶν λόγων τούτ[ων εὕρῃ, θανάτου] οὐ μὴγεύσηται.

(콥트어) ⲁⲩⲱ ⲡⲉϫⲁϥ ϫⲉ ⲡⲉⲧⲁϩⲉ ⲉⲑⲉⲣⲙⲏⲛⲉⲓⲁ ⲛ̄ⲛⲉⲉⲓϣⲁϫⲉ ϥⲛⲁϫⲓ ϯⲡⲉ ⲁⲛ ⲙ̄ⲡⲙⲟⲩ⳿

(콥트어 음역) agō pezaf ze petahe ethermēneia ǝnne(e)išaze pnazitipe an ǝmpm(o)u.

“그리고 그가 말했다: 이 어록들의 해석解釋을 발견發見하는 자는 죽음을 맛보지 않을 것이다.”

     

해석( ἑρμηνεί]αν, ⲉⲑⲉⲣⲙⲏⲛⲉⲓⲁ)이란 자신이 알고 있는 상식을 산산조각내는 파괴적인 행위다.

‘에르메스’ 명품가게 가면, 헤르메스 신이 여행모자를 쓰고 지팡이를 들고 가방을 메고 어디론가 간다. 그가 멈춘 곳은, 그 장소를 순례하는 자들이 쌓아놓은 작은 돌들이 무덤이 된 장소다. 이곳이 새로 시작한 인생여정의 이정표이기 때문이다. 해석이란, 우연히 발견하는 것이다. 영어로 표현하지면 to fall upon이다. 콥트어에서도 ‘발견하다’를 ‘헤 에’(ϩⲉ ⲉ) 즉 ‘fall upon’으로 표현하였다.

     

오늘 내가 가야 할 길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어제까지 가보지 못한 장소로 깊이 들어가, 과거의 자신을 산산조각내는 행위다. 그러다 보면, 내가 가야 할 길이 서서히 드러난다. 나는 침잠하는가? 나는 발견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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