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9.1.(日曜日) “존재存在라는 시련試鍊”
The Trial by Existence by Robert Frost
가을이 왔다. 가을은 결실의 계절이다. 봄에 뿌린 시가 여름의 시련을 거쳐, 자신을 온전히 매듭짓는 심판의 시간이다. 운이 좋아 그 심판대에 올라, 정당한 판결을 받는 존재도 있고, 자연의 섭리에 의해, 생을 단축하는 생명도 있다. 이 결실의 계절에 강가 산책길에서 죽음을 보았다. 수풀에서 강으로 가려는 갓태어난 새끼 뱀이, 수변길을 드나드는 거대한 차 바퀴와 마주하여 주어진 삶을 마감하였다.
우리가 지날 때면, 한 찰나에 숲으로 몸을 숨기는, 그 날쌘 뱀이, 우연히 지나가는 자동차 바퀴에 깔려 지상에서의 운명을 다했다. 자라면서, 자신을 옥죄는 껍질을 벗으면서, 흥미진진한 삶을 살지 못하고, 순간에 생명은 달아나고 짓눌린 껍데기만 남겼다. 뱀이 지녔던 생명은, 어디로갔는가? 죽음 후엔, 어떤 삶이 기다리고 있는 것인가? 죽음은 끝인가?
단테는 14세기 초, 인생이 비극이 아니라 희극이길 바라면서, 지옥, 연옥, 그리고 천국을 주제로 100편의 시 모음집인 <신곡>을 썼다. 인생은 영웅으로 태어난 비극적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미천하게 태어나 영웅으로 마치는 코메디를 노래하고 싶었다, 죽음을 향해가는 인간이 아니라, 천국에서 도달하는 신적인 인간이다.
그로부터 600년이 지나, 단테의 영혼을 지난 한 미국 시인이 등장하였다. 그는 천국을 넘어, 천국이후의 삶을 노래하였다. 로버트 프로트스는 <존재의 시련>이란 시다. 그는 이 시를 1892년에 구상하기 시작하여 1906년에 완성하였다. <존재의 시련>은 단테의 비전에 대한 재해석이자 비판이다. 그는 <신곡>에 관련된 책을 4권이나 소장하고 있었고 많은 영감을 얻었지만, 단테의 어깨 위에서 현대인들의 마음속에 엄연한 인생을 이해할 수 있는 손전등을 선물해 주었다.
단테는, 로마 시인 베르길리우스는 대동하여 지옥과 연옥을 답사하였고, 독실한 가톨릭 신자답게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그리스도교 신앙과 융합하여 다가올 르네상스를 준비하였다. 그러나 프로스트가 그리스도교에 취한 태도는 모호하며 독창적이다. 그는 신약성서가 아니라 구약성서를 원래 그리스도 정신이라고 주장한다.
그의 사상은 집안에서 배양되었다. 어머니 이사벨라 무디 프로스트는 스코트랜드사람으로 스웨덴 신비주의 철학자 이마누엘 스베덴보리(1688-1772) 추종자였다. 프로스트는 어려서 어머니를 따라 스베덴보리 교회에 다니면서 인간이 보는 모든 것은 앞으로 일어날 미래에 대한 환시이며, 신의 목소리를 예기치 못한 장소, 예를 들어, 나무에 스치는 바람이나 해변의 파도 물결에서 듣는다. 그의 아버지, 윌리엄 프레스코드 프로스트는 하버드대학을 나오는 무신론자였다. 자연이 질서정연한 신의 작품같지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들로 가득 차 있다. 프로스트는 아버지로부터 인간 심연의 가장 깊은 곳까지 내려가는 우울을 배운다. 프로스트가 자신의 우울을 치료하기 위해, 서너시간을 산책하였다. 그에게 시는 혼돈으로부터 잠시 도망치는 휴식이었다. 그는 또한 많은 시간 랄프 왈도 에머슨의 글을 읽으면서 ‘자연’을 통해 미국식 사상을 시로 표현하였다.
프로스트가 이해한 그리스도교는 구약성서기반이다. 그는 신약성서를 그리스-로마 철학,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유대사상에 대한 변형이라고 판단하였다. 그는 예수가 몸으로 살았고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루살렘과 골고다 언덕의 경험한다. 그는 승천한 예수가 아니라, 구약성서의 신처럼, 에덴 동산에서 두 발로 산책하는 신, 시내 산에서 가시덤불에서 말하는 신, 육체를 지닌 존재로 와 자신을 비운 예수를 선호한다. 그는 “비종교적 그리스도교”Irreligious Christianity를 열정적으로 자신의 시를 통해 표현하였다. 그는 자신을 “로마나 캔터베리가 아니라 예루살렘을 통해 만들어진 정통적인 구약성서, 원조 그리스도인”으로 소개한다.
그의 인생 말년의 장구한 시 <키티 호크>(Kitty Hawk)에서 이렇게 노래하였다:
But God’s own descent Into flesh was meant As a demonstration That the supreme merit Lay in risking spirit In substantiation. Spirit enters flesh And for all it’s worth Charges into earth In birth after birth Ever fresh and fresh. We may take the view That its derring-do Thought of in the large Is one mighty charge On our human part Of the soul’s ethereal Into the material.
“하나님이 스스로
육체로 안으로 내려간 사실은
최상의 영혼은
자신의 영혼을
육체를 지닌 존재로
실증하는데 달려있다.
영혼이 육체로 들어갔다.
모든 것을 위해, 영혼의 가치는
땅에 위탁되었다.
태어나고 태어나고
육체가 되고, 육체가 되었다.
우리는 이 대담한 행동은
넓은 견지에서
우리가 인간으로서
창공에 있는 영혼을
물질 속으로 위탁하는
대담한 행동이라고
믿어야한다.”
<존재의 시련>은, 불교의 윤회사상처럼, 죽음 후에 영혼의 운명을 다룬다, 이 땅에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리고 선택한 것은 대단한 용기다. 단지 우리가 그 선택을 기억하지 못할 뿐이다. 이 시는 프로스트가 발간한 첫 시집 <소년의 의지>(1913)에 실린 시다. 인간의 존재는 시련이다. 인간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윤회적인 결정은 대담한 용기다. 왜냐하면, 그 존재가 바로 시련이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우리가, 그 결정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시인으로 스스로의 운명을 정한 프로스트의 세계관이 고스라니 담겨있다.
The Trial by Existence
Robert Frost (1874-1963)
<존재의 시련>
로버트 프로스트
제1연
Even the bravest that are slain
Shall not dissemble their surprise
On waking to find valor reign,
Even as on earth, in paradise;
And where they sought without the sword
Wide field of asphodel fore’er,
To find that the utmost reward
Of daring should be still to dare.
살해된 가장 용감한 자라 할지라도
깨어나 용기가 지배한다는 사실을 알면,
지상과 마찬가지로 천국에서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할 것이다.
영원한 아스텔포 꽃으로 장식된
너른 들판을 칼 없이 추구한 천국에서도,
대담에 대한 최고의 보상은
여전히 대담하게 행동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제2연
The light of heaven falls whole and white
And is not shattered into dyes,
The light for ever is morning light;
The hills are verdured pasture-wise;
The angel hosts with freshness go,
And seek with laughter what to brave;
And binding all is the hushed snow
Of the far-distant breaking wave.
천국의 빛은 온전하고 하얗게 떨어져
여러 색으로 부서지지 않는다.
그 빛은 영원한 아침의 빛이다.
언덕은 목장처럼 푸르다.
천사의 무리가 상쾌하게 걷고,
웃음 지으며, 위험을 무릅쓸 것을 찾는다.
그리고 멀리서 부서지는 파도는
모든 것을 결속하며, 조용하라고 말하는 하늘에서 내리는 눈이다.
제3연
And from a cliff-top is proclaimed
The gathering of the souls for birth,
The trial by existence named,
The obscuration upon earth.
And the slant spirits trooping by
In streams and cross- and counter-streams
Can but give ear to that sweet cry
For its suggestion of what dreams!
절벽의 맨 꼭대기에서
다시 태어날 영혼들을 모집한다는 공고가 나왔다.
그것은 ‘존재存在라는 시련試鍊’,
즉 ‘지상에서 모호模糊’이라고 명명된 것이다.
그러자 눈치를 보며 곁눈질하는 영혼들이
마치 시냇물이 되어 서로 부딪치는 것처럼 몰려왔다.
이 꿈들이 암시하는 것을 위해,
이 달콤한 외침에 귀를 기울일 수 밖에 없다.
제4연
And the more loitering are turned
To view once more the sacrifice
Of those who for some good discerned
Will gladly give up paradise.
And a white shimmering concourse rolls
Toward the throne to witness there
The speeding of devoted souls
Which God makes his especial care.
결정하지 못하고 빈둥거리는 영혼들이 다시 돌아서서
기꺼이 천국을 포기하고
모종의 선을 선택한 자들의
희생을 다시 한번 바라 본다.
하나님이 특별히 아끼시는
신실한 영혼들이
신이 앉아계신 왕좌로 달려가는,
중앙홀에 모여있는 하얗게 어른거리는 호명된 자들을 바라 본다.
제5연
And none are taken but who will,
Having first heard the life read out
That opens earthward, good and ill,
Beyond the shadow of a doubt;
And very beautifully God limns,
And tenderly, life’s little dream,
But naught extenuates or dims,
Setting the thing that is supreme.
지구쪽으로 열려진 삶을, 그것이 좋게나 나쁘거나,
의심의 그림자를 넘어서, 낭독된 것을 듣고,
그것을 감히 택하는 사람만이, 지상으로 인도될 것이다.
하나님은 매우 아름답게
그리고 친절하게 인생의 작은 꿈을 묘사하신다.
그러나 최상의 것을 진열하면서,
그 어느 것도 경감하거나 희미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제6연
Nor is there wanting in the press
Some spirit to stand simply forth,
Heroic in its nakedness,
Against the uttermost of earth.
The tale of earth’s unhonored things
Sounds nobler there than ’neath the sun;
And the mind whirls and the heart sings,
And a shout greets the daring one.
신의 강요 때문에 인간이 원하는 것이 거기엔 없다.
몇 영혼은 숨김없이 나체로
지상의 가장 극한의 것들이 맞서
영웅적으로 일어 난다.
지상에서 일어나는 불명예스런운 것에 관한 이야기는
태양 아래서 고귀한 것으로 들린다.
마음은 소용돌이치고 심장은 노래하고
함성은 대담한 자들을 맞이한다.
제7연
But always God speaks at the end:
‘One thought in agony of strife
The bravest would have by for friend,
The memory that he chose the life;
But the pure fate to which you go
Admits no memory of choice,
Or the woe were not earthly woe
To which you give the assenting voice.’
그러나 항상 하나님은 마지막에 말씀하신다.
‘투쟁의 고뇌 속에서
가장 용감한 자를 친구로 곁에 두는 하나의 생각은
자신이 선택한 인생에 대한 기억이다.
그러나 너희가 가고 있는 그 순수한 운명은
그것을 선택했다는 기억을 허용하지 않는다.
혹은 슬픔이 너희가 동의한 지상의 슬픔이 아닐 것이다.
제8연
And so the choice must be again,
But the last choice is still the same;
And the awe passes wonder then,
And a hush falls for all acclaim.
And God has taken a flower of gold
And broken it, and used therefrom
The mystic link to bind and hold
Spirit to matter till death come.
그리고 선택의 기회를 다시 부여했으나,
최종 선택도 마찬가지다.
경외심이 경탄을 넘어가고
침묵이 모든 환호를 덥친다.
하나님은 금빛 꽃을 취하여
그것을 부러뜨리고 사용하신다.
죽음이 올때까지
신비한 끈으로 영혼을 육체에 동여 매신다.
제9연
’Tis of the essence of life here,
Though we choose greatly, still to lack
The lasting memory at all clear,
That life has for us on the wrack
Nothing but what we somehow chose;
Thus are we wholly stripped of pride
In the pain that has but one close,
Bearing it crushed and mystified.
이것이 여기에서의 이 삶의 본질이다.
우리가 위대하게 선택했을지라도,
인생이 이 난파선 위에서, 우리를 위해 마련한 것을
분명하게 지속적으로 기억할 수 없다.
우리가 어쨌든 선택한 것이다.
자존심를 완전히 빼앗긴 채,
삶이 부서지고 혼미하게 되어,
고통을 뼈져리게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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