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8.29.(木曜日, 241th: 黎明默想) “사단계四段階”
저녁 산책길은 더이상 후덥지근하지 않다. 산책길엔 벌써 낙엽들이 데크에 떨어져 내 발길을 맞이한다. 가을이 오고야 말았다. 이 가을에 나는 무엇을 추수할 것인가? 아침이면 더 늦기 전에, 깨달으라고일어매미가 울기 시작한다. 인류는 지금 전례가 없는 과학기술의 도움을 받아 전진하는 것 같으나, 이 기술이 딥페이크처럼 변질이 되어, 우리를 하찮은 웃음거리로 만들고 있다. 나는 과연 나인가?
나는 자연의 일부로 생명을 지닌 존재이며, 다른 생명을 지닌 존재들, 지구상에 있는 모든 동물과 식물과 하나로 연결되어있다.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이후, 인간은 스스로 만물의 영장이며, 신을 능가하는 기적이라고 자화자찬했다. 이젠 그 자랑을 버릴 때가 도래했다. 이 시대는 인간중심에서 생명중심으로 인간은 자연의 일부인 호모 나투라Homo natura로 스스로를 재정리하여 타생명과의 공생을 모색할 시점이다. 나는 요즘 그런 혜안을 독일 신학자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와 프랑스 철학자 앙리 베르그손을 통해 훔쳐본다.
14세기 독일 사상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1260-1329), 철학과 종교를 포용하고 초월하는 거대한 바다와 같은 사상을 구축하였다. 누구나 와서, 그 안에서 배를 띄워 항해하고, 자신만의 무인도를 발견하여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인생의 비밀을 알려주었다. 그는 철학자, 신학자, 신비주의자, 예언자, 여성주의자, 설교자, 행정가, 시인, 영적인 천재였다. 당연히 당시 최고권력인 교회는 그를 이단이라 낙인찍었다. 이단이란 낙인은 그가 위대한 사상가란 증거다. 소크라테스, 예수,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오와 같은 사람들은 독배를 마시거나, 십자가형에서 죽거나, 종교재판에 회부되고 화형을 당했다. 위대한 사람은 위험하게 살며 오해를 받을 수 밖에 없다. 인류 양심의 척도가 되기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본능적으로 기꺼이 헌신한 자들이다.
에크하르트는 당시 사회의 가난한 자들에게 빛이 되는 복음을 전달하려는 인류보편적인 사상을 만들었다. 개별종교나 개별국가는 그의 사상을 tndyg할 수 없었다. 마치 예수가 고향에서 대접을 받을 수 없는 것처럼, 그는 사회의 약자들과 함께 새로운 사상을 개진하였다. 그의 사상은 창조중심 전통이다. 당대에도 지금도, 그리스도교는 ‘타락과 구원’ 축을 기반한 교리를 통해, 모든 인간의 죄인으로 태어난다고 가정한다. 이 가정은 그리스도교를 현대사회의 천덕구니로 전락시켰다. 어거스틴은 <창세기>에 등장하는 선악과 사건을 곡해하여, 인류는 처음으로 스스로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죄인으로 태어난다는 이상한 교리를 만들었다. 갓 태어난 웃는 아이를 죄인으로 억지를 주장하는 종교는 사라져야 마땅하다. 아니 그 교리를 페기되어야한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신의 속성인, 가능성, 잠재력을 지니고 태어났다. 그 가능성과 잠재력은 자비를 실천하는 행위로 발휘된다. 인간이 죄인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을 복음이 아니다. 인간은 스스로 구원하지 못하고, 누군가를 의존해야한다는 교리는 인류를 어리석음과 폭력의 소용돌이 안으로 집어넣었다.
에크하르트의 영적인 길은 “아름답고, 즐거우며, 기쁘고, 이미 익숙하다.” 왜 ‘익숙한가’? 지구상에 창조되어 생명을 지닌 존재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에서, 나름대로 행복을 만끽하며 순간을 즐기기 때문이다. 누구나 자연에서 우연히 만나는 풀이나 꽃에서 위안을 얻는 이유는, 유유자적하며 생명 안에 집약된 무한한 가능성을 펼치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남녀노소,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생명을 지닌 존재가 자신의 삶을 통해 펼칠 수 있다는 소식이 복음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숭고한 지식은 자신의 삶을 통해 얻는 깨달음이다. 생명 그 자체, 살아있어나 죽었거나, 싹을 틔우거나 꽃을 피우거나, 잎을 떨구거나 열매를 맺거나, 추운 겨울 죽었거나 봄에 다시 살아나거나, 이 모든 것은 그 안에서 생사를 반복하는 신의 창조적인 에너지다. 히브리어 ‘다바르’dabar는 생명을 지는 존재라면 가지고 있는 역동적인 창조의 힘이다. 그 힘은 어디에 있는가? 그 힘은 생명의 지는 존재를 살아있게 만드는 자신의 심장에 있다.
들숨과 날숨을 통해, 심장의 박동소리를 통해, 살아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내 안에 죽음을 거부하는 생명이 활동하고 있다는 증거다. 에크하르트는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생물을 살아있게 만드는 생명 유지의 네 가지 단계를 말한다. 이것은 종교가 말한는, 즉 ‘회개-깨우침-신과의 합일’(Purgation, Illumination, Union)과는 다르다. 그 네 가지 단계는 다음과 같다:
1. 긍정의 길via positiva
긍정의 길이란, 생명 그 자체가 구원이다. 개체가 자기보존을 위해 무리 안에서 자라면서, 자신이 되어야 할 모습을 획득한다. 이 획득을 자비로 도와주는 존재가 부모다. 부모를 통해 사랑이 생존의 가장 중요한 가치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모든 인간은 어린아이로 긍정의 길에 들어선다. 무한한 긍정의 힘, 모든 능성에 거룩하게 열려있는 존재로 태어난다.
2. 부정의 길via negativa
아이가 공동체에서 생존하기 위한, 교육을 받는다. 근대에 등장한 학교는 생존을 위해 타인과 경쟁하는 기술을 가르치며, 그 경쟁에서 승리한 소수만이 행복을 얻는다고 아이들을 세뇌시킨다. 특히 인네넷과 핸드폰의 등장으로, 인류는 아이나 어른 구별없이, 타인 훔쳐보기를 하면 소일하고 소비하면서 점차로 자기중심적인 이기심을 구축한다. 이타심이 아니라 이기심이 유전자 단계에서 시작되며, 그것은 거스릴 수 없는 인간의 본능이라는 교육을 받는다. 교육은 외부의 정보를 주입하는 막무가내가 아니라, 각가가 되어야 할 자신이 되어가는 예술이다. 인간이 부정의 길로 들어가, 자신이 알게 모르게, 목자국처럼 가슴에 박혀있는 번뇌를 지우는 작업을 시작해야 한다. 진정한 교육은 자신 안에 쌓인 이기적인 본능을 걷어내는 작업이다. 그러기에 교육의 참된 목표는 걷어내는 교육이어야한다. (Education is Uneducation)
3. 창조의 길via creativa
창조의 길이란, 새로운 자아로 다시 태어나는 경험이다. 자신은 부모를 통해 태어난 신의 자녀라는 사실을 삶을 통해 실천하는 용기다. 나는 동물도 아니라 신도 아니다. 나는 어제의 나이며, 지금이 나이고 내일의 내가 되고 있는 생성이다. 난 창조적 진화을 오늘 실천하고 있는 자다. 오래된 자아를 버린 자만이 새로운 자아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 이 단계에서 개별적인 존재는 신의 일부이자 신의 전체가 된다. 구원이라 생명이 약동하는 만물을 보고 놀랄 때 일어난다. 왜냐하면 신이란 존재는 만물이 살아움직일 때, 깃들어있기 때문이다. 신의 웅장함은 창조물의 아름다움을 포착하는 내 눈에 존재한다.
4. 변모의 길via tranformativa
변모의 길이란 자비와 정의의 실천이다. 영성은 세상에 도망쳐 산속에서 고요하게 명상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살면서 언제든지, 누구를 막론하고 내적인 고독을 유지하는 것이다. 세상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 신을 발견하고, 자비와 정의를 실천하는 삶이 변모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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