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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8.27. (火曜日, 黎明日記) “ 고름짜기”

2024.8.27. (火曜日, 黎明日記) “ 고름짜기”

     

요나는 자신으로부터 다시 태어나기 위한 축복의 장소안에 있었다. 신이 마련한 ‘큰 물고기 뱃속’이다. 남들은 이곳을 저주와 불행의 장소라고 여기지만, 요나는 이 곳에서 3일 보내면 감사기도를 드렸다. 그는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었다. 우리는 이러한 어둠과 비좁은 장소와 시간을 기피한다. 이곳은 불안과 불편의 시공간이기 때문이다. 신앙은 스스로 이것을 마련하여, 스스로를 강제로 집어넣는 용기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시공간을 이미 장악한, 과거라는 악령이 우리의 말과 행위를 통해, 마구 쏟아져 나오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신을 돌보지 못하고, 이런저런 이유로 바빠지면 자신이 의도하지 않은 환경에 의해 휘둘리게 마련이다. 만남은 운명적이다, 요즘 도반들과 <요나서>를 깊이 읽고, 이 경전에 대한 허만 맬빌의 주석서인 <모비딕>을 탐독한다, 경전 안에 숨겨진 혜안은, 우리의 신체와 정신을 각성시킨다. 그리고 그 가성을 자기 삶의 진솔 한 이야기를 피로 글은 우리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킨다. 그 한 글자 한 글자가 우리가 흘려야할 피이기 때문이다. 이 써 내려가는 훈련을 통해, 우리를 조절하고 있는 악령은 달아나고, 파릇파릇 새로운 영이 싹을 틔우게 된다.

     

그 경험과 훈련만이, 사람을 변화시킨다. 인간이 온전한 자신으로 수련하고 준비하여 자연스럽게 순간의 최선을 경주할 때, 주위 사람들에게 유익하고 진화적이다. 이것이 ‘창조적 진화’다. 우리가 이 순간의 최선, 즉 혁신적인 일을 도모할 때, 예기치 못하는 시너지를 내고, 상상하지 못한 기적을 이룰 수도 있다. 그것은 한 무명의 씨앗이, 청청하고 늠름한 백향나무가 되는 과정이며, 눈에도 보이지 않는 유충이, 요나를 삼킨 모디빅이 되고, 우리의 몸에서 나오는 물이, 신을 닮은 아이가 되고 영웅이 된다. 변화란 그 모습을 예상할 수 없는 기상천외한 형상이 되어지는 과정이다.

     

만일 우리가, 스스로가 가만히 보기에, 만족스럽지 못한 모습으로 대중과 어울리고, 그들의 평균적인 요구에 춤추다 보면, 그 사람은 금방 피폐해진다. 그런 사람은 자신에게 감동이 없는 배역을 맡아 무대에 올려진 광대일 뿐이다. 다른 모든 사람들이 원하는 배역이라 할지라도, 자신을 감동시키지 못하는 배역이라면, 그것은 최선일 리가 없고 차선도 아니다. 그저 구성원 각자가 견딜만한 차악次惡이다. 우리가, 자연의 풀처럼, 자연의 벌레처럼, 각자다움으로 자연스러운 Homo natura가 될 때, 오늘 하루를 영원처럼 살 수 있다. 우리 사회는 차악들이 판지는 난장판이다.

     

예수는, 떠돌이 목수의 아들로 태어난 자였지만, 불편하지만 심오한 공간으로 들어가 40일을 지내면서, 인간의 아들에서 신의 아들이 되었다. 40일동안 자신의 삶의 빅뱅을 통해, 생계를 걱정하는 1세기 팔레스타인 범부에서, 인류에게 삶의 희망이 되었다. 사랑만이, 자신을 위한 사랑과, 그 사랑이 넘쳐 주위에서 자연스럽게 흘러갈 때, 마치 시냇물처럼, 자신과 접촉하는, 목이 말라 죽을 수 밖에 없는 모든 이의 갈증을 해소해주고, 새로운 삶의 살 수 있는 생명수를 마련해 주었다.

     

예수가 안식일을 맞이하여 유대교 회당에서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삶을 살고 있는 자를 칠한다. 현대인 대부분이 그렇다. 자신이 누구인지 깊이 고민하는 묵상을 해본 적이 없고, 남들이 좋다고 하는 그것을 부러워하는 부화뇌동하는 자, 자신의 삶을 조절하는 중앙제어장치가 자신의 뇌가 아니라, 어처구니가 없는 미디어, 신문, SNS에 두는 자다. 그런 사람은 자신이 부러워하는 것을 획득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우울증에 시달리다, 스스로 해소하지 못하는 시기가 타인을 향한 분노로 변질된다. 그때부터, 자신을 바라보고 질타하지 못하고, 타인을 시기하고 모략한다, 고래 뱃속에서 3일 밤낮을 지내면서, 그 깨달음을 얻게된 어려움에 감사기도를 드리지 못하고, 자신에게 떨어진 시련이 불운이며 불행이라고 착각하고, 일생 이를 갈며 비참하게 산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분노가 아무런 힘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자신과 같은 무리들과 합세하여 ‘당’을 만든다. 그리고 그 후에 자신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누군가를 추종하는 ‘팬’이 되어, 집단광기를 발산한다, 자신이 거대한 팬들의 일원이지만, 동료 팬들과 합세하여 힘을 과시할 수 있기 때문에, 자신의 망가진 존재에 의미를 획득한다. 집단 뒤에서 막말을 마구 쏟아낸다. 그들 안에서 막말을 분출하게 만드는 괴물이 악령이다.

     

각성한 예수가 맨 처음 찾아간 곳은 ‘회당’이다. 그곳에 자신이 삶에 대한 경험도 없고 혜안도 없으면서, 남들에게 종교와 사상이란 미명아래, 분파와 미움을 조장하는 종교인, 정치인, 언론인들이 모여있었기 때문이다. 그 안에는 항상 자신이 아니라 타인에게서 불행을 찾으려는 인간이 존재한다. 예수가 그 회당에서 말로만 떠드는 정치인이나 종교인과는 달리 ‘영적인 힘’을 지닌, 내공을 지닌 사람을 가르치니 사람들이 그의 말을 경청했다. <마가복음> 1.23은 이 순간을 이렇게 시작한다:

     

Καὶ εὐθὺς ἦν ἐν τῇ συναγωγῇ αὐτῶν ἄνθρωπος ἐν πνεύματι ἀκαθάρτῳ, καὶ ἀνέκραξεν

“예수가 권위를 가지고 그들이 모여있는 회당에서 말하자마자,

‘정결하지 못한 영’ 즉 ‘악령’애 조절을 받는 자가 소리를 질렀다.”

     

영靈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정결한 영’과 다른 하나는 ‘정결하지 못한 영’이다. ‘정결한’이란 그리스 단어는 ‘카싸로스katharos’이고 ‘정결하지 않은’이란 단어는 ‘아카싸로스akatharos’다. ‘카싸로스’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그리스 비극을 상연하는 목적을 설명하면서 사용한 ‘카타르시스katharthos’와 같은 어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마케도니아 궁중 의사 밑에서 의학 수업을 받았다. ‘카타르시스’는 종량이나 곪아 염증이 난 상태로, 그것을 방치하면 부패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기 때문에, 선제적으로 제거해야하는 대상이다. ‘카타르시스’의 의미는 정화라기보다는 ‘제거; 절단; 추방’이란 의미다. 카타르시스의 의미를 가장 잘 드러내는 문맥은 여성건강이다. 이 단어는 여성들이 월경을 묘사하는 단어로 ‘배출’이란 의미다.

     

인간에게 종교란 자신의 몸, 정신을 병들에 만드는 고름을 짜내는 행위다. 그러지 않으면 그 악성종량이 그의 영혼을 좀먹어 인간 말종으로 전락시키고 부패시키기 때문이다. 정결하지 못한 영이 그로부터 소리를 지르며 나왔다. 그리고 하는 말이, 예수를 오늘의 인간으로, 변화된 인간으로, 신적인 존재로 보지 않고, 과거의 존재, 요셉의 아들, 나사렛이란 동네의 목수로 폄하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λέγων Τί ἡμῖν καὶ σοί, Ἰησοῦ Ναζαρηνέ; ἦλθες ἀπολέσαι ἡμᾶς.

οἶδά σε τίς εἶ, ὁ Ἅγιος τοῦ Θεοῦ.

그 과거에 살고 있는 악령을 지닌 자가 말했다.

“우리가 당신과 무슨 연관이 있습니까? 당신이나 잘하세요. 당신, 나사렛 동네 출신이 아닙니까?

내가 당신이 누구인지 압니다.

오, 진실로 일반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위험한 구별된 자여!”

<마가복음> 1.24

     

그러자 예수가 그를 꾸짖고 다음과 같이 혼낸다:

καὶ ἐπετίμησεν αὐτῷ ὁ Ἰησοῦς Φιμώθητι

καὶ ἔξελθε ἐξ αὐτοῦ.

그리고 그를 꾸짖었다. 그리고 말했다.

“입에 재갈을 물려라! 그리고 그로부터 나와라!”

<마가복음> 1.25

     

‘입에 재갈을 물려라’라는 명령어 ‘피모쎄티’는 ‘재갈을 물리다’라는 의미의 동사 ‘피모오’ 의 명령수동형으로 입을 통해 정제되지 않는 소리를 지껄이는 자신에 입에 재갈을 물려 조용한 상태에 이르게 하다라는 뜻이다.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입에 재갈을 물리는 연습인 묵상을 수련하지 않으면, 그 말은 실수하기 마련이며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그 악령이 들린 사람이란, 자신은 그럴 의도가 없었지만, 생각과 말을 수련하지 않고 오랫동안 방치하여 괴물이 품고 있다자다. 그리고 이제, 그 사람을 괴롭히지 말고, ‘밖으로 나오라’고 주문한다. ‘밖으로 나오라’라는 그리스어 ‘엑셀쎄’는 ‘밖으로’라는 전치사 ‘에크스’와 ‘오다’라는 동사 ‘에르코마이’의 합성어다. 예수는 그 악령에게 그 사람 안에서 안주인처럼 자리를 잡아 주인행세하지 말고, 밖으로 나오라고 꾸짖는다. 그랬더니 악령이 그 사람으로부터 뛰쳐나온다. <마가복음> 저자는 문장 마지막에 ‘에크 아우투’라는 ‘그로부터’라는 부사구를 첨가하여 악령은 그의 소유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밝힌다.

     

그 누구도 이 사람과 이 사람을 장악하는 악령을 구분하지 않았다. 사람들을, 그 존재자체를 악령으로 여기고 그를 역경에서 벗어나게 하겠다는 자비가 없었다. 사람들이 그를 정상적인 사람으로 회복하지 못한 이유는, 그들에게 그 사람의 처지를 생각하고 고민하고, 더 나아가 방안을 찾아 행동으로 옮기는 사랑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랑은 모든 것을 물리치는 유일한 무기다. 그랬더니 기적이 일어난다.

     

καὶ σπαράξαν αὐτὸν τὸ πνεῦμα τὸ ἀκάθαρτον

καὶ φωνῆσαν φωνῇ μεγάλῃ ἐξῆλθεν ἐξ αὐτοῦ.

“그랬더니 정결하지 못한 영이 그 사람을 떠나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며 몸을 심하게 흔들었다.

그리고 큰 소리를 내면서, 그로부터 나왔다.“

<마가복음> 1.26

     

인간에게 종교란 고름처럼 우리안에 머물러 있으면, 곧 암덩어리가 되어, 우리를 죽이는 종량을 과감하게 제거하는 용기다. 예수가 이런 기적을 베풀자, 군중들은 더 신기한 기적을 원한다. 그러자 예수가 회당으로부터 나왔다. 사람들은 예수의 기적을 보기를 원하지만, 스스로 예수처럼, 자비를 실천하기를 두려워한다. 아니, 그런 방법을 모른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와 같은 자비를 실천하는 것이지, ‘예수’에 관한 교리를 믿는 것이 아니다. 그날 밤에 수많은 사람들이 귀신들린 자를 데리고 그에게 왔다. 저녁에 시작하여 새벽까지, 정결하지 못한 영에 이끌려 허송세월을 보내는 사람들의 삶을 근본적으로 고쳤다.

     

예수는 자신에게 매달리는 군중들을 보고 자비를 베풀었다. 이른 새벽, 그는 하루일과를 가만히 돌아보았다. 사람들은 기적을 원하지, 스스로 기적이 되려 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구별된 삶을 시작한 광야 40일 시험을 떠올렸다. 그 초심을 잃는다면, 기적으로 요구하는 대중의 꼭두각시로 전락할 수 도 있기 때문이다. 예수가, 인기 절정의 순간에, 자신의 마음을 살피기 위해, 그 무시무시한 처음, 즉 광야廣野로 자신을 다시 몰아넣는다.

     

Καὶ πρωῒ ἔννυχα λίαν ἀναστὰς ἐξῆλθεν

καὶ ἀπῆλθεν εἰς ἔρημον τόπον, κἀκεῖ προσηύχετο.

     

“이른 밤이었다. 밖은 칠흑과 같았다.

그는 밖으로 나와 어디론가 갔다.

그곳은 버려진 장소, 광야였다.

그리고 거기서 기도祈禱하였다.”

<마가복음> 1.35

     

나는 이 장면이 예수의 특징을 가장 잘 드러내는 순간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잠시 눈을 붙이고 새벽에 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몸과 영혼이 피곤한 밤에, 한 치의 앞을 볼 수 없는 한밤에 길을 나섰다. 제자들은 코로 골려 자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40일동안 악마에서 시험을 받으면서 인생의 과업을 깨달은 광야로 가기로 마음먹었다.

     

<마가복음> 저자는 예수가 ‘에이스 에레몬 토폰'으로 갔다고 말한다. 이 장소는 아무런 준비없이 갈수 있는 장소가 아니라, 마음을 단단히 먹고 가야 하는 그런 장소다. 그래서 전치사 ’에이스‘를 사용하였다. 에이스는 ’장벽이 있는 곳으로 깊숙이 침투하여‘란 의미를 지닌 전치사다.

     

그가 도착한 곳은 ‘버려진 장소’다. 그리스인들은 장소를 셋으로 구분하였다. 질서가 지배하는 장소인 ‘폴리스’polis, 혼돈의 상태인 ‘에레모스’eremos 그리고 이 둘 사이에 부활의 공간인 ‘코라’chora다. 예수는 자신을 혼돈의 끝자락으로 몰아넣은 것이다. 거기서 그는 물을 것이다. “나는 인간인가, 아니면 신인가? 나는 동물에 가까운 인간인가? 아니면 신이 되려는 인간인가?” 그는 밤새 기도하였다.

     

요나가 3일 밤낮을 칠흑같은 고래 뱃속에서 기도하면서, 자신으로부터 불필요한 것들을 배출했듯이, 에수도 버려진 장소, 광활한 모비딕의 오장육부와 같은 광야로 들어가, 자신에게 맡겨진 임무가 무엇인지 깊이 명상하였다. 당신은 대중의 환호에 부화뇌동하십니까? 아니면, 칠흑 같은 밤에, 자신이 해야 할 유일한 임무를 상기합니까? 당신은 늦은 밤에, 자신의 고름을 짜십니까? 아니면, 그 분노를 타인과 사회에서 찾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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