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8.19. (月曜日, 英詩默想) “자신을 축하하십시오.”
<자기-자신을 위한 노래> 월트 휘트먼 제1곡
아침 이슬이 풀잎 위에 앉아있다. 흘러내리지 않고 자기보존의 응집력으로 방울방울 맺어, 진주처럼 빛을 발산한다. 월트 휘트먼의 <자기자신을 위한 노래>가 생각났다. 우주의 비밀이 담겨있는 풀잎과 이슬에 대한 노래다.
I.
I CELEBRATE myself, and sing myself,
And what I assume you shall assume,
For every atom belonging to me as good belongs to you.
I loafe and invite my soul,
I lean and loafe at my ease observing a spear of summer grass.
My tongue, every atom of my blood, form'd from this soil, this air,
Born here of parents born here from parents the same, and their parents the same,
I, now thirty-seven years old in perfect health begin,
Hoping to cease not till death.
Creeds and schools in abeyance,
Retiring back a while sufficed at what they are, but never forgotten,
I harbor for good or bad, I permit to speak at every hazard,
Nature without check with original energy.
저는 제 자신을 드나들며 축하합니다. 그리고 노래합니다.
제가 지니고 있는 것을 당신도 지니게 될것입니다.
왜냐하면, 제게 속한 모든 원자는 당신에게도 속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빈둥거리며 하는 일이 있습니다. 제 영혼을 초대합니다.
제가 땅에 기댄 후에, 편하게 여름 풀잎 관찰하며 빈둥거립니다.
제 혀, 제 피의 모든 원자는 이 토양과 이 대기로부터 형성되었습니다.
여기서 부모의 자녀로 태어났고, 여기서 동일한 부모로부터 통해 태어났고,
그들의 부모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서른일곱살입니다, 온전한 건강을 유지한 저는 시작합니다.
죽을 때까지 멈추지 않기를 바랍니다.
종교에서 말하는 교리와 학교에서 말하는 이론은, 잠시 중지시킵니다.
그들이 현재 처한 그 상황에 잠시 만족하고 퇴거시킵니다, 그러나 결코 잊지않습니다.
저는 선한 것이나 악한 거이나, 그 무엇을 가슴에 품습니다. 모든 위험을 감수하고
원초적인 힘을 지닌, 누구도 저지할 수 없는 자연을 말하도록 허용합니다.
(해설)
휘트먼은 현대인, 아니 인간의 새로운 모형을 제시하고 노래하고 있다. 그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사과를 훔쳐 먹고 영원히 저주를 받아, 신을 통해서만 구원이란 은총을 받을 수 있다는 교리에 복종하는 비굴자가 아니다. 그는 이미, <창세기>1.26에서 말한대로, 신의 형상과 모양을 완벽하게 갖춘 긍정적인 인간이다. 모든 인간은 완벽하고 온전하게 태어난다. 오히려 가족, 학교, 회사에 던져진 존재로 살면서, 원래 자신의 모습을 잃고 부정적인 인간, 왜곡된 인간으로 산다. 신은 그런 인간을 가엽게 보고, 그를 원래의 창조적인 인간으로 돌이킬 수 있는 처방전을 내놓는다. 그것이 예기치 못한, 시련과 고통이다. 이 시련과 고통은, 온전하고 창조적인 인간을 만들기 위한 필요-충분한 통과의례다.
우리가 우리 자신으로 돌아오기 위해서, 자신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부모로부터, 학교로부터 기본을 익혀야한다. 그 기본은 기반이 되어 우리가 자유롭게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휘트먼은 이 시를 전통적인 ‘아이맴빅 펜타미터’iambic pentamete를 이용하여 시작한다. 이 형식은 엑센트가 없는 약한 음절 후에 강세가 있는 음절로 이어지는 다섯 개 음절이 한 행이 되는 시다. 14세기 영국 시인 초서Chaucer가 프랑스와 이탈리아 형식을 빌려 처음 사용하였고, 그 후에 셰익스피어가 비극과 소네트에, 존 밀턴이 <실락원>에서 사용하였다. 휘트먼은 첫 두 행에서 이 음보를 사용한 후에, 바로 자신의 감정과 영감에 이끌려 자유로운 형식으로 시를 쓴다.
그는 호메로스처럼, 영감을 주는 뮤즈신을 부르지도 않고 다윗처럼, 야훼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지도 않는다. 그에게 뮤즈는 자신이다. 그 노래의 대상도 영웅이나 신이 아니라, 자기-자신이다. 그는 신전에 드나들지 않는다. 그가 자주 드나드는 신전은 ‘자기-자신’인 Myself다. 영어단어 celebrate는 ‘돌아가다’ 혹은 ‘자주 드나들다’라는 뜻이다.
자신의 삶에서 경험한 작은 세계가 우주처럼 광활한 큰 세계이며, 자신은 미세하고 보잘 것 없는 존재가 아니라, 우주의 끝까지 퍼져나긴 우주적인 자아cosmic self다. 이 우주적인 자아를 산속에서 명상하는 자나, 종교의 교리를 준수하는 자나, 혹은 고매한 사상을 논하는 자가 아니라, 누구나, 여러분과 나와 같은 보통사람의 자아, 즉 ‘민주적인 자아’democratic self다. 휘트먼은 자신일 뿐만 아니라, 미국 전체이고 지구이며, 우주다. 거의 ‘나는 우주다’라는 우파니샤드의 깨달음이며, ‘네가 그것이다’라는 현인 우달라카의 가성이다. 그것은 잎을 갈아먹고 있는 애벌레가 각성한 후에, ‘내가 포도원 전체다’라고 소리지르는 외침이다. 이것은 또한 예수님의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다’ 혹은 ‘내가 하나님이다’라는 주장과 같다.
휘트먼은 19세기 미국에서 인류최초로 실험하고 있는 ‘민주적인 자아’가 이념으로 갈라지고 파괴되기 전에 하나로 융합시킨다. 그는 사람과 자연, 사람과 사람, 남자와 여자, 나와 너를 구분시키는 장벽, 시기, 투쟁을 무너뜨린다. 그는 “내가 소유한 것을, 너도 소유할 것이다.” 어쩌면 야당 이재명대표가 말하는 기본사회의 원초적인 핵심일 수 있다. 현대사회는 끊임없는 소통이다. 재화, 사상, 감정, 정보가 전례가 없이 빠른 속도로 사람들 간에 오고간다. 오늘 내개 속한 것이, 한 순간에 타인에게도 넘어간다.
휘트먼은 제1곡에서 두 주인공을 등장시켰다. I와 You다. 영어에서 You는 단수 혹은 복수가 될 수도 있고, 친밀한 연인관계를 나타낼 때 사용하기도 하고, 낯선 사람이나 공식적으로 지위한 높은 사람에게도 적용되는 단어다. 시인은 You를 내 앞에 존재하는 ‘너’이기도 하고 혹은 불특정 다수이기도 하다,
시인이 하는 일은 ‘빈둥거리기loafe’와 ‘여름 풀잎 관찰하기observe’다. 그이게 풀잎은 ‘전이’의 상징이다. 산책길에 만나는 무덤 위에 피어오른 풀잎처럼, 죽은 자의 원자가 땅속에서 피어올라 자신의 목소리를 낸다. 인간은, 원자로 구성되어 있고, 이 원자는 지구상 모든 동식물을 통해, 영원회기를 반복하고 있다. 인간이 이 순간에 남이 아닌 자신으로 살아가기 위해, 타인이 만들어 놓은 정교한 굴레를 과감하게 벗어야한다. 마치 나비가 시간이 되어 고치를 탈피하는 것처럼, 다음 두 가지로부터 탈출해야한다: 하나는 지금-여기를 행복하게 살지 못하는 종교교리이며, 자신이 아니라 타인의 충고를 철학과 과학이론으로 만들어 세뇌시키는 학자들의 이론이다. 종교와 학교는 ‘선’와 ‘악’을 규정한다. 인생이란 여정은, 선악의 저편에 있는 보도블록 사이를 뚫고 태양을 향해 나오는 ‘원초적인 힘’의 도움으로 달려가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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