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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8.16. (金曜日, 黎明默想) “인생의 밑바닥으로 내려가서 누워 깊은 잠에 드십시오!”

2024.8.16. (金曜日, 黎明默想) “인생의 밑바닥으로 내려가서 누워 깊은 잠에 드십시오!”

     

겁쟁이 요나에서 인류역사상 가장 성공한 예언자로 변신한 요나를 이해하는 핵심구절은 <요나서> 1장 5절 후반에 등장한다. 이 구절은 예수 그리스도교의 부활사건과 연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자기변신을 시도하는 혁명가들이 깊이 숙고해야할 내용이다. 이 구절의 원문과 번역은 다음과 같다:

     

וְיֹונָ֗ה יָרַד֙ אֶל־יַרְכְּתֵ֣י הַסְּפִינָ֔ה וַיִּשְׁכַּ֖ב וַיֵּרָדַֽם׃

“그러나 다른 선원들과는 달리, 요나는 배의 가장 깊은 곳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런 후에 그곳에서 몸을 바닥에 가지런히 눕힌 후, 눈을 감았습니다.

그랬더니, 온전한 자기-자신, 즉 신을 만날 수 있는, 깊은 잠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요나서> 1.5b

     

요나는 자신을 타르시스로 가는 배을 욥바 항구에서 올라탔다. 타르시스는 요나가 갈수 있는 지구의 끝이다, 욥바는, 레바논의 백향나무를 잘라, 지중해 전역에 내보내기 위해, 보관하던 항구다. 요나는, 이 배에 승선 한 후, 자신이 내려갈 수 있는 가장 깊은 곳으로 내려갔다. 그곳은 혼자만이 내려갈 수 있는 비좁은 공간이다. 오랜 고독 수련을 통해 발견할 수 있는 시간이다. 그는 좁은 문을 통과해야한다.

     

그가 마침내, 그 문을 여니, 그곳은 다름 아닌, 자신에 태어난 공간이었다. 외부의 공간이 아니라 가장 심오한 내부였다. 그곳은 요나가 태어난 어머니 자궁인 ‘레헴’(히브리어)이었고, 우주가 탄생하기 전에 존재했던 ‘코라’(그리스어)였다. 그곳은 보통사람 목수 예수가 구원자 예수가 되기 위해 견뎌야만 했던 40일 광야였고 세례의식을 거행하던 요단강이었다. 이곳은 길가메시가 영생을 획득하기 위해 모든 시련을 견디고, 발에 돌을 묶고 내려갔던 바다의 첫 물이 터져 나오는 '나그바‘nagba였다.

     

그곳은 모든 시냇물이 결국 흘러들어가 자신을 ‘없음’으로 만들고 동시에 자신을 ‘있음’으로 만드는 바다다. 요나의 우연한 민족인 유대, 우연한 종교인 유대교를 초월한, 바다였다. <요나서> 1.5b는 요나의 통과의레를 다음 세 가지 단계로 설명한다.

     

첫째, ‘내려가십시오!’

지구에 사는 만물은 중력을 거역할 수 없다. 내려가야만, 내려놓아야만 올라설 수 있고, 일어설 수 있다. 우리가 매일 밤, 침대에 누울 때, 아침에 일어날 수 있는 것처럼, 해가 서쪽으로 뉘엿뉘엿 누워야, 아침에 다시 일어날 수 있다. 내려가는 것이 올라가는 것이다. 저 시냇물처럼,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려갈 때, 장애물은 사라진다. 바위와 같은 장애물은, 오히려 내려가려는 물을 맑게 만들어준다.

     

둘째, ‘누우십시오!’

눕기는 자신을 가장 취약한 상태로 만드는 의도적인 행위다. 우리는 어머니 뱃속에서 10개울동안 누워있었고, 두발로 걷기 위해서 한동안 어머니 곁에서 누어있었다. 두발로 열심히 걷다, 나이가 들면 지팡이를 집게 되고, 결국 다시 눕는다. 눕는 행위는, 눈을 감고, 외부의 소리를 차단하고, 오로지 자신의 숨소리만을 의식하는, 결국 그 숨소리조차 들이지 않는 영원한 미궁으로 들어가는 용기다. 요나는 배 밑창으로 내려간 후에 누웠다.

     

셋째, ‘깊은 잠으로 진입하십시오!’

요나는 누운 후, 깊은 잠으로 들어간다. 깊은 잠은, 선잠과 다르다. 깊은 잠은 요나를 의식에서 무의식으로 인도하였다. 깊은 잠을 통해, 애벌레는 나비가 되고, 알은, 독수리가 되며, 씨는 호랑이가 된다. 요나는 이 깊은 잠을 통해, 새로운 자신이 된다. 요나는 우연한 자기정체성, 즉 ‘아미타이의 아들’이 아니라, ‘히브리인’이다. 히브리인이란, 변화하는 인간, 감히 건널 수 없는 경계를 넘어가는 사람, 한 민족이나 종교를 초월하여, 타트 트밤 아시tat tvam asi, 즉 ‘내가 그것이 된 존재’다. 요나는 이 잠을 통해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탄생, 부활하였다. 온전한 자기-자신으로 돌아간 것이다.

     

중세 독일 신학자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이 과정을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When I dwelt in the ground,

in the bottom, in the stream, and

in the source of the Godhead,

No one asked me where I was going or what I was doing.

Back in the womb from which I came,

I had no God and merely was myself.

제가 땅에

바닥에, 개울에, 그리고

신성의 원류에 거주할 때,

아무도 제가 어디로 가는지, 제가 무엇을 하는지 묻지 않습니다.

제가 원래 왔던 자궁으로 돌아갑니다.

그곳엔, ‘신’이 없고 단순히 제-자신만 있을 뿐입니다.

     

And when I return

to God and to the core, the soil, the ground,

the stream and the source of the Godhead,

No one asks me where I am coming from

or where I have been.

For no one misses me

in the place

where God ceases to become.

그리고 제가

신에게로, 핵심으로, 토양으로, 땅으로,

개울로, 신성의 원류로 돌아갈 때,

아무도 제가 어디에서 왔는지

혹은 제가 어디에 있었는지 묻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신이 되기를 멈추는

그 장소에서 저를 놓치는 사람은 없습니다.

     

Now the moment I flowed out from the Creator

all creatures stood up and shouted:

"Behold, here is God!"

They were correct.

For you ask me: Who is God? What is God?

I reply: Isness. (Istigkeit)

Isness is God.

Where there is isness, there God is.

Creation is the giving of isness from God.

And that is why God becomes

where any creature expresses God.

제가 창조주로부터 흘러나온 순간인 지금,

모든 피조물은 서서 외칩니다:

“보라, 여기 신이 있다!”

그들이 옳습니다.

당신들은 저에게 “누가 신이냐? 무엇이 신이냐?”라고 묻습니다.

저는 대답합니다: “신은 이스틱카이트(istigkeit독일어)/이즈니스(Isness영어)다.”

자기됨(이스틱카이트)이 신입니다.

각자 자기됨이 있는 곳에, 신이 계신다.

창조는 신으로부터 나온 ‘자기됨’을 지닌 선물입니다.

이것이 신은

모든 피조물이 신을 표현하는 곳에서 신이 되는 이유입니다.

     

Isness is so noble. No creature is so tiny that

it lacks isness.

If a caterpillar falls off a tree,

it climbs up a wall

in order to preserve its isness.

So noble is isness!

If you were able to deprive God of isness,

a stone would be more noble than God,

for a stone has isness.

What is God?

God is!

자기됨은 숭고합니다. 어떤 피조물로 보잘것이 없어

자기됨이 부족하지 않습니다.

애벌레가 나무에서 떨어져,

다시 벽을 타고 올라 자기됨을 보존합니다.

자기됨은 숭고합니다.

만일 당신이 신으로부터 ‘자기됨’을 제거할 수 있다면,

이 돌이 신보다 숭고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돌은 자기됨입니다.

무엇이 신입니까?

자기됨이 신입니다.

     

사진

<산호랑이 애벌레와 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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