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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8.1.(木曜日, 210th/365) “존엄尊嚴한 8월”(<요나와 모비딕> 공부를 시작하여)

2024.8.1.(木曜日, 210th/365) “존엄尊嚴한 8월”

(<요나와 모비딕> 공부를 시작하여)

     

새벽부터 매미들이 운다. 바다를 향해, 최단 거리로 질주하고 있는, 시냇물 힘찬 질주를 응원이라도 하듯, 장마의 비바람을 견뎌낸 전나무와 소나무 위에서 노래한다. 심지어 새소리를 잠재울 정도도, 목청을 높여 합창한다. 매미들은 이렇게 여름이 왔다는 사실을, 자연에 알려준다. 어찌나 정성을 다해 노래를 부르는지! 요즘 산책길은 그러다 일생을 노래부다 숨진 매미들의 순교지다. 매미는 여름을 노래하지 않는다. 우리 각자의 과실을 맺어야 할 가을이 이미 왔다는 복음을 전하는 세례요한이다.

     

세례요한 <마태복음> 3.2에 다음과 같이 광야에 갑자기 등장하여 외쳤다. 광야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지내면, 자신이 누구인지 탐구하는 소수의 인간들 만이 그 외침을 들었다.

     

Μετανοεῖτε· ἤγγικεν γὰρ ἡ βασιλεία τῶν οὐρανῶν.

메타노에이테 엥기켄 가르 헤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

     

위 그리스문장을 번역하자면 이렇다.

     

“마음을 고쳐먹으십시오. 하늘나라는 이미 와있습니다.”

     

이 문장은 우리가 궈머리가이며 장님이란 뜻이다. 이미 도래한 천국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한다는 소리다. ’하늘나라‘는 하늘에 있는 왕국이 아니라, 지상에 사는 인간들이 오늘-여기를 하늘로 변모시키려는 마음가짐이며, 오늘-여기에서 하늘나라를 발견하려는 깨달음이다. 어제까지 자신과 세상을 이해하던 색안경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눈으로 영원한 지금을 응시하라는 주문이다.

     

’마음을 고쳐먹으라‘는 말을 무슨 뜻인가? 그 마음은 매미의 마음이다. 여름에 잠시 태어나,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남이 뭐라고 해도 정성스럽게, 힘차게 완수하겠다는 의지다. 매미가 산책길에 떨어지면서 자신의 운명을 슬퍼하지 않는다. 매미는 조만간 개미와 같은 곤충의 먹이가 되고 흙이 되어, 새롭게 다시 태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매미는 영원한 회기의 한 구간이란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고, 그렇게 산다.

     

세례요한이 <마태복음> 3.2을 그리스어로 말했을 리가 없다. 그가 말했을 히브리어 문장과 아람어 문장을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히브리어)

שובו כי מלכות השמים הגיעה׃

슈브 키 말쿠쓰 핫-샤마임 하기야.

(아람어)

토부 키 말커싸 셔마야 카리바

tobu ki maketha shemayya qariba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라! 하늘의 뜻이 실현될 최적의 상태가 마련되어 있다.”

     

지상에 태어난 존재들의 모습은 모두 다르다. 쌍둥이도 모양이 다르고 성격도 다르다. 동식물은 각양각색이다. 심지어 요즘 우리 동네에 즐비한 포도송이이 하나 하나가, 그 생김새, 색깔, 크기가 모두 다르다. 인간을 제외한 동식물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적인 생김새, 즉 생명의 약동을 매순간 드러내며 생존한다. 다른 포도송이와 경쟁하지도 않고 시기하지도 않는다.

     

인간만이 타인과 경쟁한다. 회개란, 이제 그만 타인과 경쟁하지 말고 자신과 경쟁하라는 신의 명령이다. 우리가 돌아와야 할 궁극의 장소가 있다. 부모를 통해 생명을 부여받고, 그 생명이 온전히 있어야한 거룩한 자기-자신이라는 성소다. 이곳은 신이 만물을 창조하고 진화시킬 때, 자신의 형상과 모양을 숨겨놓은 어둠이다. 어둠은 빛이 간절하게 기다리는 유일한 공간이며 시간이다. 신은 어둠 속에서 빛을 추구하는 생명을 돌보시는 분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스스로 빛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오래된 자아를 버리는 과감하게 버리고, 매미처럼 자신만의 나무에서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한 계절이다. 마이트서 에크하르트는 자신을 어둠 속에서 버리는 행위를 ’게라센하이트‘Gelassenheit라고 불렀다. 게라센하이트는, 자신이 아닌 가짜 자신, 진실이 아닌, 가짜 지신, 내가 원하는 자기-자신이 아니라, 주위가 원하는 가면을 쓴 자신을 내려놓는 행위다. 이것은 내가 가야할 궁극의 장소인 지금-여기를 망각하게 하는 예수가 말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다.

     

내일 모래, 8월 3일에 시작할 ’요나서와 모비딕‘을 공부를 통해 ’자기-치유를 위한 글쓰기‘수업은, 이 무거움 짐을 내려놓은 수련이다. 요나가 3일 밤낮을 지낸 어둠의 공간인 ’거대한 물고기‘ 뱃속과 멜빌의 ’모비딕‘은 우리가 다시 태어나기 위해 거쳐야 할 인생의 공포이자 부활의 공간이다. 이 장소를 거쳐야, 우리 인생의 모비딕을 품어야, 8월이 무더운 계절이 아니라, 어거스트August, 즉 우리의 삶을 ’존엄하게 직조하는 결정적인 시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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