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7.27. (土曜日) “글쓰기 기본원칙 1/11”
Choose a suitable design and hold to it.
제일 원칙 자신에게 어울리는 디자인을 선택하고 그것을 목숨처럼 아껴라.
글쓰기는 어렵다.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을 타인이 이해할 수 있는 단어와 문장을 선택하여 종이나 컴퓨터에 옮기는 정교한 작업이다. 글쓰기는 낙서와는 달리, 자신의 진심과 상대방에게 그 말을 온전히 전달해야겠다는 마음이 합쳐질 때, 온전히 선다. 글쓰기의 기본도 모르는 나에게, 미국에서 만난, 스승이 조그만 책을 선물해 주었다. 그는 나에게 학자는 글을 쓰는 사람이고, 글은 고전어와 마찬가지로 문법이 있다고 알려주면서 스트렁크와 화이트(S&W)의 The Elements of Style이란 주었다. 겉으로 보면 글쓰기에 관한 책 같지만, 사실은 인간문명의 핵심인 문자, 기호, 그리고 삶의 기술과 표현에 관한 책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 인간이 인생이라는 무대에서 취해야하는 행위에 관한 묵상이라면, The Elements of Style은 행위의 표현방법을 제시한다. 이 책의 두 번째 장이 ‘작문을 위한 기본적인 원칙들The Elemental Principles of Composition’ 11가지를 소개한다. 인생은 커라란 도화지이고 나는 내 철필인 스타일러스stylus를 가지고 나의 최선의 모습을 그린다. 나는 그것을 단호하고 일관되고 압도적으로 표현할 것이다. 앞으로 이 11가지 원칙을 여러분과 함께 차분하게 탐구하고자 한다.
작문作文composition이란 나만의 무늬文를 인위적으로 만드는作 의지와 노력이다. 무늬란 나다운 색과 형태를 알고, 그것을 내 삶에 어울리게com 배치配置position할 때,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다. 작문은 고도의 인위이며, 그 노력의 결과로 얻어지는 자연스러움이다. 인위적이 노력이 없다면, 배치도 없고 아우라도 생기지 않는다. 우리는 자연스러움을 아무렇게나 생각이 떠오르는 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라고 착각하고 폄하한다. 자연스러움은 산과 같고 강과 같고 나무와 같고 꽃과 같고 새와 같아, 자신이 지금-여기에서 해야 할 일을 하고 그것에 묵묵히 몰입하는 극도의 정교함이다. 산은 얼마나 뿌리를 내렸는지 알 수 없다. 항상 그 자리에 묵묵히 서있는 침묵이다. 강은 도도하다. 자신이 가야할 바다를 향해 누가 와서 오물을 버려도 누가 와서 목욕을 해도 아랑곳하지 않고 유유히 흘러가는 여유다. 나무는 사시사철의 변화를 안다. 잎을 낼 때와 잎을 떨어뜨릴 때를 정확하게 안다. 자신의 내면에서 분출한 가지와 잎을 시간이 되면 미련도 두지 않고 자신이 태어난 땅으로 떨어뜨리는 도인이다. 꽃 잎 하나에는 인간의 숫자와 말로는 상상하지도 표현할 수 없는 정교함, 조화로움, 대칭, 향기로움과 같은 우주의 비밀을 담고 있다. 장미가 아름다운 이유는 다른 장미와 자신을 비교하지 않고 자신에게 온전히 몰입하여, 한 순간에 개화했다, 때가 되면, 그 아름다운 자태를 지닌 꽃잎을 과감하게 버리기 때문이다. 작문은 오랜 삶의 수련을 거쳐 도달하는 끝이 보이지 않는 삶의 기술이다.
“나만의 무늬를 수놓는다”는 의미는 ‘내 자신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내 자신’이란 유기해야할 어제의 내가 아니라 내가 흠모하는 미래의 나를 이 순간에 내가 말과 행동으로 옮길 때 되는 내 자신myself다. 내 자신이 된다는 것은 내가 간절히 바라는 나의 모습을 실현하기 위해, 과거와 그 과거의 잔재가 남아있는 내 자신으로부터 탈출하는데서 시작한다. 새로운 내 자신은 과거의 내 자신에 대한 살해에서 시작한다. 신화에서 과거의 자신을 표현하는 문구가 데우스 오티오수스deus otiosus, 즉 ‘한가한 신’이다. 중세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와 니콜라스 쿠사는 이 문구를 잘못 이해하여 인간이 숭배해야할 숨어있는 신으로 해석하였다. 신화와 비극에서 과거의 자신을 유기하는 내용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이며 엘렉트라 콤플렉스다. 어제의 나는 자신이 알고 있던 과거의 문법에 자신을 감금하여 그것이 옳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이 이기심이다. 니체는 과거의 자신을 극복하여 더 나은 자신은 초인超人을 찬양하였다. 초인은 과거의 자신으로부터 나오는 ‘엑스터시’를 매일 연습하는 사람이다.
<출애굽기> 3장에서 모세가 발견한 신은 바로 이런 속성을 지녔다. 모세가 신의 이름을 물으니, 그(녀)가 말한다. “나는 내 자신이 된다”. 이 문장의 히브리어 표현 ‘에흐에 아쉐르 에흐에’번역이나 해석을 거부하는 신비한 문장이다. 나는 이 문장을 “나는 내 자신이 된다”I become Myself로 이해한다. 언제가 이 문장에 대해 책을 쓰고 싶다. 이 문장에서 말하는 Myself는 새로운 나, 생경한 나이지만, 그 근거는 ‘나’ME에 있다는 점이 신기하다. 새로운 나를 만드는 기반을 ‘나’일 수밖에 없다. 나에겐 이 사실이 감격적이며 복음이다. 내가 인생을 통해 추구해야할 그것이 저 하늘의 별이 아니라 내가 이미 마음속에 지닌 별이다.
글쓰기는 월트 휘트먼의 시 Song of Myself처럼 자신의 오장육부에서 나오는 생각을 허파와 입을 통해 끌어올리는 예술이다. S&W는 인생이란 작문에 원칙이 있다고 말한다. 원칙이란 축구경기의 규칙이며, 영어의 문법이고, 삶의 규범이다. 축구경기 규칙이 없다면 공을 찾아 뛰는 사람들은 미친 사람들이며, 문법을 지키지 않는 문법은 낙서이고 규범이 없는 삶이란 야만이다. 대한민국의 요즘 민낯이며 그것을 구성하는 나의 모습이다. 그들이 말하는 작문의 제일 원칙은 이것이다.
작문을 위한 제 1원칙
Choose a suitable design and hold to it.
자신에게 어울리는 디자인을 선택하고 그것을 목숨처럼 아끼고 매달려라.
이 문장은 어려운 개념들로 가득 차있다. ‘어울리는’ ‘디자인’ ‘선택’ 그리고 ‘매달려라’. 어느 것 하나 언뜻 이해할 수 있는 단어가 없다. 무엇이 적당하고 어울리는가? 디자인이란 무엇인가? 어떤 안목으로 무엇을 선택할 수 있는가? 혹은 내가 목숨을 내놓을 만큼 감동적인 것은 무엇인가? S&W는 이것을 연습해야 스타일이 나온다고 말한다. 우선 ‘디자인’이란 무엇인가? 무엇이 디자인인가?
‘디자인de-sign이란 단어는 두 개의 단어가 합쳐졌다. 하나는 전치사 ‘데’de이고 다른 하나는 라틴어 동사 ‘시그나레’signare에서 파생한 ‘사인’sign이다. ‘시그나레’는 ‘영역을 표시하다; 자신을 남들과 구별하다; 자신의 무늬를 통해 무엇을 의미하다’라는 뜻이다. 전치사 de는 뒤 따라오는 단어를 반대하거나 부정하는 의미가 아니라, 그것을 통해 나오는 파생, 추론, 추상이다. de는 어떤 것을 유출流出시키겠다는 의지가 담겨있다. 안경은 인간의 두상, 눈의 크기, 귀의 위치, 그 사람의 시력들을 모두 종합하여, 안경테와 안경알을 유출시킨다. 디자인이라는 단어는 그 근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희망적이다. 디자인이라는 내가 이미 지니고 있는 어떤 것을 밖으로 꺼내는 작업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표현할 때, 그 디자인은 독창적이고 독보적이다. 내가 지닌 것이 아니라 타인이 가진 것을 흉내 내거나 훔치는 행위가 표절剽竊이다.
‘디자인’을 의미하는 고대 그리스어 ‘스케디오’skhedio는 신비롭게 ‘거의; 근접해서’라는 의미를 지닌 ’스케돈’에서 유래했다. ‘설계’를 의미하는 영어단어 스킴’scheme이 이 단어에서 왔다. 그리스 전통에서 ’디자인‘은 불완전, 부정형, 그리고 불완성을 내포한다. 그러나 완전, 정형, 그리고 완성으로 가는 의지를 표명한다. 그리스인들은 디자인은 가능성, 정말같음, 기대, 예감과 같은 어떤 것이다. 디자인은 모호하고, 만질 수 없고, 애매한 것이지만, 손으로 만질 수 없고 눈으로 볼 수 없는 미묘한 것을 포착하려는 노력이며 그 과정이다.
그리스어 ‘스케돈’의 어원을 더 파고들면 이렇다. 이 단어는 ‘가지다; 소유하다’를 의미하는 동사 ‘엑소’ekho의 미래형인 헥소에서 파생되었다. ‘헥소’는 문법적으로 미래형이나 그 의미는 미완료형이다. 다시 말하자면 내가 과거에 소유하고 있고, 지금도 소유하고 미래도 소유할 어떤 것이 디자인이다. 디자인은 우리가 과거에 소유했지만, 자신이 소유하는 줄 모르는 상태서 빠져나오는 수도다. 디자인은 나에게 거룩한 내 자신을 발견하고 그것을 표현하려는 기술이다.
디자인은 본연의 나를 모아 현재의 나에서 실현하려는 합일合一의 예술이다. 합일이란 자신감이 없어 자꾸 밖으로만 나가려는 나를 거대한 찬합 뚜껑으로 ?으로 내 입口을 막으려는 수고다. 합일이란 노자가 말한 것처럼 나의 발과 머리를 조합하여 내 갈길道을 갈 때 생기는 거대한 원칙이다. 노자는 <도덕경> 42장 처음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도생일’道生一. 디자인은 나를 다른 사람으로부터 구별시키는 무엇, 나를 더 나답게 만드는 그 무엇을 찾는 연습이다. 나는 무슨 ‘사인’sign를 가지고 있는가? 나를 나답게 만드는 표식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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