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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7.26. (金曜日) “‘자기치유를 위한 글쓰기학교’의 다섯 가지 질문”

     

2024.7.26. (金曜日) “‘자기치유를 위한 글쓰기학교’의 다섯 가지 질문”

     

이번 다음 주 토요일(8월3일)에 시작하는 ‘자기치유를 위한 글쓰기: <요나서>와 <모비딕>“수업은, 우리가 모두 앓고 우울증을, 스스로 정신과 의사가 되어 깊은 독서와 사유, 그리고 글쓰기로 치유하려는 시도다. SNS에는 소수가 만든 자극적인 내용으로 가득 차있다. 우리를 탐닉하게 만들고 결국 중독시킨다. SNS는 잘 보기 위해 감아야 할 눈을 계속 뜨게 만들어, 안구건조증을 유발하고, 듣고 싶은 듣기 위해 닫아야 할 귀를 열어 막말들에 익숙하게 만든다. 빅브라더는 시각과 청각을 장악해 버려, 나를 시청각 장애인으로 만들어 버렸다.

     

시청각 장애는 개별 존재으로서 인간을, 언제나 대치가 가능한 대중의 일부, 전체가 아닌 부속품으로 전락시킨다. 부속품은 효율을 위해, 숫자로 평가된다. 노자가 <도덕경> 3장에서 우려한대로, 잘난 사람, 경쟁에서 이긴 사람, 숫자가 그 사람의 인격이 되고 천재성이 되는 세상에서는 백성들의 싸움이 그치지 않는다. 인간이 개인이 아니라 대중의 부분이 되어, 극단적인 한쪽 편에 서서, 그 집단의 폭력적인 이데올로기의 노예가 된다. 개인의 의견을 무시하는 체계가 폭력이다.

     

현대인들은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되지 못해, 자연히 당연하게 우울증에 걸린다. 우울증이란, 봄에 뿌려진 종자가. 여름을 지나 가을에 자기라는 과실을 맺지 못하는 안타까움이다. 자신의 싹을 검은 땅을 통해 중력을 거슬려 올리지 못하는 답답함이다. 인간을 제외한 모든 식물과 동물들엔 우울증이 없다. 인간이 사육하는 가축들, 동물원이나 식물원에 가두어 놓은 동식물들, 인간 욕심의 희생이 된 ’애완견‘과 ’애완묘‘만 예외다.

     

이 우울증은, 우리의 신체, 정신, 영혼을 왜곡하고 점점 우리가 혐모하는 모습을 변화시킨다. 하루 종일 핸드폰을 손에 쥐고, 그것을 들여다보면서, 그 안에서 영상을 만든 사람의 의도대로 울고 웃는다. 인간에게 자신만의 유일무이한 종자가 있다. 이 종자를 발견하는 것이 깨달음이고, 그 종자를 천하에서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이 자기-신뢰이며, 그런 특별한 종자가 친구에게도 있다고 인정하는 마음이 친절이며, 서로 다른 종자들이, 시절을 좇아 다양한 꽃을 피우고 나무가 되어 숲을 이루는 것이, 파라다이스다. 19세기말에 등장한 일인독제를 찬양하는 전체주의와 대량생산을 덕으로 여기는 대중문화가 오늘날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횡포를 부리고 있다. 이 전체주의는, 강력한 플랫폼 회사들이 장악하는 인터넷 공간에서 더욱 기승하여, 우리를 인터넷 전체주의의 노리개로 굴복시켰다.

     

인터넷 전체주의가 언론과 우리의 일상을 잠식하여, 대한민국을 생존위기에 빠뜨렸다. 우리는 지난 10년동안, 호모 사피엔스가 등장한 이후, 인류가 전쟁 때에도 경험해 본적인 없는 미증유의 참사를 써내려가고 있다. 우리는 매년, 세계 최악의 출산율과 최고의 자살률이라는 조지 오웰이 <1984>과 <동물농장>에서 예측한 디스토피아에서 견고하게 구축하고 있다. 일당독재를 찬영하는 정치나, 이익을 덕이라고 호도하는 경제에는, 이 디스토피아에서 우리를 구조할 구명조끼를 던지지 않는다. 연합뉴스나 YTN 뉴스를 잠시동안 시청하면, 그 이유를 충분히 알 수 있다. 우리는 출구가 보이지 않는 미노타우로스 미로迷路에서 하루를 그렇저렇 연명하여 살고 있다.

     

우리가 이 우울증, 각자의 잠재력과 가능성이란 씨앗을 발아시키지 못하는, 이 억울한 삶에서, 각자의 눈과 귀, 그리고 뇌를 인터넷콘텐츠로부터 지금 당장 해방시켜야 한다. 우리가 자신의 삶을 타인과 대상으로부터 독립시키려는 운동은, 삼일운동보다 더 시급하다. 개인의 정신적인 독립이 대한민국의 독립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독립운동을 다음 다섯 단계로 진행하고 싶다. 첫째, 운동하기; 둘째, 경전해석 깊이 읽고 듣고 토론하기; 셋째, 시 암송하기; 넷째, 소설 인내하며 읽기; 다섯째, 글쓰기 제출하고 코멘트 받기.

     

첫째, 운동運動하기.

’자기치유를 위한 글쓰기 학교‘의 알파와 오메가는 운동이다. 산책과 달리는 나의 종교가 된지 오래다. 종교가 인간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체계적인 자극이라면, 매일운동이 종교가 될 수 밖에 없다. 우리가 올림필 레슬링 선수에 감동을 받는 이유는, 그들이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홀로 연습했기 때문이다. 그의 어께와 뭉개진 귀를 보면 된다.

     

이 수업 참여자들이 매일 자신에 정해놓은 트랙을 산책하거나 수련장에서 운동을 해야 한다. 이 신체적인 운동은 나머지 기차를 떠 바치는 기둥이다. 체덕지는 SNS시대의 복음이다. 우리가 매일 자신의 신체의 변화를 측정하는 운동을 하고, 신체에 좋은 음식을 섭취하고,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습관은 행복한 삶의 기본이다. <시편>1편에 등장한 내용처럼,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에 알맞은 열매를 내는 이유가 있다. 자신 발을 제어하여, 가지 말아야 할 곳에 ’가지 말고‘, 양심에 위배 되는 일을 위해 ’서성이지 않고‘, 죽치고 ’앉아‘ 타인 험담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수강자들이 일주일동안 운동을 자신이 정해진 시간과 장소에서 실행했는지 묻고 싶다. ”나는 매일 운동하는가?”

     

둘째, 경전해석 깊이 읽고 듣고 토론하기. 이번 시즌에 내가 선택한 경전은 <요나서>다. 4장으로 구성된 구약성서의 예언서이지만, 심리학자 융, 프로이트, 매슬로와 같은 심리학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준 경전중에 경전이다. 매슬로는 <요나서>를 통해, 각자라는 위대함을 인정하기 못하고 두려워 떨며 도망치고 마는 현대인들의 병을 ’요나콤플렉스‘라고 불렀다. SNS시대 인간의 눈과 귀는 온통 자극적인 그림과 영상에 중독되어, ‘나는 누구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내가 이러다 죽을지 알았다’는 버나드 쇼의 유언이 우리 대부분의 마지막 말이 될 것이다.

     

경전經典은 한번 읽고 버리는 신문이나, 한동안 우리를 즐겁게 해주는 잡지나 베스터셀러가 아니다. 베스트셀러는 유행에 민감하게 만들고 친구와 대화를 즐겁게 만들어주는 조미료다. 적어도 백년이상 베스트셀러 상태를 유지하면, 그 책은 고전古典이 된다. 고전은 인간을 대중이나 군중이 아니라, 자기 삶의 주인이자, 타인의 삶을 인도하는 리더가 되는 가치를 알려주는 책이다. 고전은 수많은 세월을 통해, 견뎌왔기 때문에, 독자도, 그 책을 읽는데 고전苦戰할 수 밖에 없다. 고전은 현재의 자신을 극복하려는 초인들을 위한 책이기 때문에, 그 책의 배경, 사상, 철학을 통해,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리더가 취득해야할 세계관과 카리스마, 용기와 덕을 알려준다.

     

인류의 고전이 천권정도 된다면, 경전은 1%, 10권 정도다. 인류는 이 10권 정도를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하게 여긴다. 왜냐하면, 그들의 정신을 고양시켜주었을 뿐만 아니라, 과거의 인간을 살해하고 새로온 존재로 부활하게 만든다. 예들 들어, 성서, 탈무드, 꾸란, 표준삼장, 법구경, 바가바드기타, 리그베다, 도덕경, 아베스타 등이다. 경전은 수천년동안 현인들이 그 책을 해석해왔다. 경전을 깊이 읽기 위해서는, 그 경전에 기록된 원전을 읽을 수 있는 능력과 더불어, 그 내용이 오늘날 우리의 삶과 어떻게 다양하게 연결될 수 있는지, 전문가의 해석을 듣고, 그 해석을 자신의 삶과 연결시키려는 질문을 통해, 그 심오한 의미를 조금씩 깨달을 수 있다.

     

나는 요나서에 등장하는 구절들을 한 절씩 원전에서 번역하고 해석하고 해설하여, 참여자들의 삶과 직접 연결시켜려고 노력할 것이다. 경전은, 글이나 말이 아니라, 경전을 공부하는 사람의 행위로, 그 뜻이 완성된다. 성서는 인생의 해답지가 아니라, 질문지다. 참여자는 요나의 삶을 통해, ‘나는 누구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에 나름대로 해답을 찾을 것이다. 신약성서에 복음서가 한권이 아니라, 네권인 이유는 마테, 마가, 누가, 요가의 복음서 뿐만 아니라 나의 인생을 통해 나만의 복음서‘를 작성하라는 암시다.

“나는 나의 문법이 담긴 삶의 경전일 써내려가고 있는가?”

     

셋째, 시 암송하기. 매 수업을 수업의 주제와 연관된 영시를 새로 번역하여 함께 감상할 것이다. 시는, 산문과는 달리 여백의 예술이다. 그 여백은 읽는 사람의 삶의 경험을 통해 채워 넣어야 할 공간이다. 나는 매 수업에 시를 소개하여 함께 암송하기를 시도할 것이다. 성서의 시편, 산상수훈, 혹은 동서양의 위대한 시인들이 남긴 시를 깊이 함께 깊이 읽고 싶다. 이 암송된 시는 수강자들의 마음에 뿌려진 씨가 되어 언젠가 꽃을 피울 것이다. “나는 여백을 지낸 시를 암송하는가?”

     

넷째, 소설 인내하며 읽기. 성서는 많은 소설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특히 미국의 위대한 소설가 허만 멜빌의 <모비딕, 혹은 고래>는 성서에 등장하는 인물들, 예를 들어, 에이합과 이슈마엘을 등장시켰고 욥기와 요나서에 등장하는 무시무시한 고래 탄닌, 베헤모스, 리워야단을 등장시켰다. <모비딕>을 한 장씩 차근차근 읽어, 멜빌의 소설이 <요나서>를 어떻게 자기나름대로 해석하여 소설로 풀었냈는지를 공부하고 싶다. 이번 공부를 통해, 수강자들과 함께, 장편소설을 통해 한번 읽기 시작한 책을 마지막 장까지 읽는 인내를 수련하고 싶다. 나는 그들에게 일년에 한권, 자신들의 삶을 관찰 할수 있는 장편소설들을 추천해주고 싶다. “나는 인생의 장편소설을 읽고 있는가?”

     

다섯째, 글쓰기 제출하고 코멘트 받기. 글쓰기는 우리의 신체, 정신, 영혼을 소진시키는 중장거리 달리기다. 글쓰기는 능동적이며, 얼어붙은 자신의 마음을 개간하여, 그 안에서 자신이라는 보물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나는 매주 부과된 글쓰기 주제에 대해 에세이를 이메일로 제출하는 분들의 글을 읽고 코멘트를 달아 매주 돌려드릴 것이다. 내가 삶을 돌아보면서 고통스럽지만, 나를 조금씩 변화시킨 삶의 원동력이 글쓰기란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지난 1년동안 참여자들의 글을 보면서 함께 울고 웃었다, 아직 치료받지 않는, 감추고 싶은 자신들의 비밀 이야기를 글로 정성스럽게 표현하면서 스스로 치유하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번 수업의 참여자들도 요나, 모디빅, 그리고 영시를 통해, 자신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기꺼이 고래의 뱃속으로 들어가 다시 태어나는 환희를 경험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나는 내 자신에 대해 글을 쓰고 있는가?”

     

독자 여러분들이 함께 참여하여 자신의 자신이라는 고래와 대결하여 다시 태어나면 좋겠다.

     

지원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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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방가르드 시즌 VI

“당신의 고래는 어디있습니까?”

배철현의 자기-치유 글쓰기학교 (줌수업): 성서와 소설

Writing School for Self-Healing: Bible and Novel

“요나와 모비딕”

2024년 8월 3일-10월 5일 (10주) 줌수업

시간: 매주 토요일 오전 10:00-12:00

교재: 성서: <요나서> <룻기> 매시간 히브리원문 번역과 에세이를 보내드립니다.

배철현, <신의 위대한 질문> (21세기북스)

허먼 멜빌, <모비딕>

Herman Melville, Moby Dick, Or The Whale (Penguin Class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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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마감: 2024년 8월 2일(금요일)

회비: 22만원(vat포함)

구좌: 413-910463-96907 (하나은행; 더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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