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7.24. (水曜日) “매미의 울음” (요나서 1장 1절)
밤새 천지를 진동시키던 천둥, 번개, 비바람은 사라졌다. 매미가 울어 재씨기 시작한다. 새벽 3시에 반려견 벨라가 문을 두르린다. 무서워 나에게 달려왔다. 나에게 도움을 청하는 존재가 있다니! 삶에 감사하다. 벨라를 골며 곁에서 쌔근쌔근 잔다. 멀리서, 해리스 카말라 부통령이 대선에 출마하다니 기쁘다. 11월까지 흥미진진한 레이스를 관람하고 싶다. 그녀가 자신의 이름 산스크리으 이름 카말라(कमला)처럼, 눈부시게 아름다운 이파리를 연꽃처럼 펼치길 바란다.
8월 4일에 시작하는 <요나서와 모비딕> 줌수업을 통해, 나는 다음을 원한다. 우리 모두가 자신만의 고래를 만나, 그 안에 들어가 온전히 죽었으면 좋겠다. 그래야 다시 태어나기 때문이다. 베스트셀러는 잠시 나를 기쁘게 해주는 착각錯覺이고, 고전은 한동안 나를 교양인으로 만들어주는 견장肩章이고, 경전은 나를 전혀 다른 인간으로 개조시키는 사망死亡이자 부활復活이다. <요나서>는 4장으로 구성된 짧은 소설이지만, 멜빌의 <모비딕> 못지 않게 장구할 수 있다. 그 안에 우리 각자의 고민과 희망을 채워넣으면, 멜빌처럼, 자신의 삶을 투영시킨 자신만의 소설 <모비딕>을 쓸 수 있다.
1장 1절에 전반에 등장하는 내용은, 죽음에 대한 공포와 삶에 대한 공포 사이에서 갈등하는 요나의 심정을 간결하게 드러냈다. 다음은 히브리 원문에 대한 영문번역과 한글번역이다.
1절
וַֽיְהִי֙ דְּבַר־יְהוָ֔ה אֶל־יֹונָ֥ה בֶן־אֲמִתַּ֖י לֵאמֹֽר׃
Suddenly the word of the LORD was unto the mind of Jonah, the son of Amittai,
느닷없이 야훼의 말씀이 아미타이의 아들인 요나의 마음에 있었다.
(해설)
성서저자는 왜 야훼의 말씀이 요냐에서 떨어 졌느지, 말하지 않는다. 성서, 더 나아가 히브리 문학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서양문학을 히브리문학과 그리스문학으로 구분한다면, 이들은 각각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그리스 문학은 모든 것을 설명한다. 아니 모든 것을 보여주고 설명하기 위해 안달이다. 그리스 문학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 혹은 그리스 비극작품은 온통, 그 이야기를 듣는 청중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친절하게 전개한다. 이야기 전개상 청중이 궁금해할 내용있다면, 이야기를 중지하고, 갑자기 그 내용을 삽입한다. 특히 비극작품에서 더욱 그렇다. 최초의 비극작가 아이스킬로스의 비극은 한 장소에서 한 시간대에 일어나는 일을 무대에 올렸다. 그러기에, 작가가 말하려는 사건의 전모를 설명할 특별한 장치가 필요했다. 갑자기 무대에 소위 ‘임기응변의 신’이 등장하여, 이해가 되지 않는 이야기의 흐름을 설명한다. 이 문학적인 주체를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라고 부르고 문학적인 장치를 ‘인 메디아스 레스’in medias res라고 부른다. 이 라틴어 문장은 ‘사물들res의 한 가운데’라는 표현이다. 단테 신곡 <인페르노>도 ‘우리 삶의 한 가운데서Nel mezzo del cammin di nostra vita’라고 시작한다.
반면에 히브리 문학의 특징은 ‘엘로퀀시아 엑스 실렌치오’eloquentis ex silentio다. 즉 ‘침묵 속에 웅변’이다. 그리스문학은 독자들을 다양한 이야기로 즐겁게 해주지만, 히브리 문학은 우리를 사건 안으로 끌어들여 함께 실마리를 찾도록 요구한다. 특히 중요한 내용이 있다면 철저하게 비밀로 지킨다. 유대인들인 이 비밀을 히브리어로 ‘소드’sod(סוֹד)라고 불렀다. 죽었다가 깨어나야 알수 있는 삶의 비빌이다. 그리스문학은 우리에게 유희遊戲이지만, 히브리문학은 우리에게 불편이고 공포다. 현재 우리가 죽어야하기 때문이다.
히브리 문학은 침묵이기에, 단어 하나 하나가 은유이고 상징이다. 그 단어와 문장이 지닌 의미를 원문뿐만 아니라, 독자 각자의 삶과 연결시켜 이해해야한다. 침묵인 단어를 내 삶의 파란만장과 연결하게 소리를 내야한다. 이 소리가 레퀴엄이고 심포니다. 그 안에서 내가 울고 너가 울수 있다.
성서가 담은 의미의 층위는, 초대 교부들이 고심하여 제시한 것처럼, 대개 다음 네 가지다: 1) 축자적인 의미; 2) 은유적인 의미; 3) 도덕적인 의미; 4) 종말론적인 의미. 축자적인 의미란, 문장이 지닌 평이한 의미다. 은유적인 의미란, 이 문장이 구약성서 안에서, 히브리 문학 안에서 단어가 지닌 의미를 연결을 시켜 은유적인 연결고리를 찾는 것이다. ‘야훼’, ‘말씀’, ‘아미타이’, ‘요나’ 단어 모두가 은유다. 세 번쩨 도덕적인 의미란, 이 문장이 머나먼 과거 한 인간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나에 관한 이야기로 전환되어, 독자의 삶과 이어, 내가 지금-여기에서 무슨 행위를 해야할지 알려주는 기호이다. 성서의 내용은 남이야기가 아니라 나에 관한 이야기이기에, 내 삶의 희로애락이라는 렌즈를 통해 봐야, 이해가 되기 시작한다. 종말론적인 의미란, 이 문장에 내가 지금-여기서 취해야 할 궁긍적이며 종말론적인 행위에 대한 계시다. 이 네가지 층위를 ‘콰드리가’quadriga라고 부른다. ‘콰드리가’는 로마 황제만이 올라 탈 수 있는 네 마리 명마가 이끄는 전차다. 우리가 성서를 이 네 층위로 해석할 때, 문헌에 담긴 의미를 온전히 파악할 수 있다.
위 문장을 내 삶과 연결하여 콰드리가로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1) 축자적인 번역: 야훼의 말씀이 아미타이의 아들인 요나의 마음에 있었다.
(2) 은유적인 번역: 자신이 알고 있는 세계가 진리(아미타이)라고 믿었던 요나라는 인간에게 삼라만상을 통해 자신의 뜻을 전하는 삶의 신비와 전율이, 고리타분하게 인생을 살며, 자신을 원수(요나)라고 여기기 시작한 인간에게 느닷없이 임했다. 갑자기 그의 마음 속에 새로운 삶을 살고 싶다는 욕망이 샘솟았다.
(3) 도덕적인 번역: 나는 안주하고 있는가, 아니면 변하고 있는가? 예수가 말한대로 부모와 형제자매, 특히 과거라는 십자가를 지고, 지금-여기라는 천국을 맞이하기 위해, 이전에 불협화음으로 들렸지만, 지금은 화음으로 들을 수 있는 열린 귀, 매일 보는 하찮은 물건과 생물 안에서 우주를 발견할 수 있는 욕심이라는 껍질에 벗겨진 눈, 모르는 이야기를 떠들 던 입을 꼭 다무는 침묵, 손과 발을 묶어, 어제까지 중독적으로 하던 행위를 멈추는 고요를 유지하고 있는가? 그 때, 신은 생명(야훼)를 통해 나에게 말씀하신다.
(4) 종말론적인 번역: 2024년 7월 24일, 밤새도록 요동치던 천둥과 번개가 사라지고, 강렬한 햇빛이 전나무 사이로 나에게 비춘다. 무더위의 시작을 알리는 매미들이 등장하여 본격적인 여름을 맞이하라고 노래하는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아, 나는 <요나서> 1장 1절을 읽고, 공부에 참여하는 도반들에게 콰드리가에 대해 알려주고 싶은 욕망이 생겼다. 그것이 오늘 아침, 내가 해야할 유일무이한 임무, 알파와 오메가가 되는 종말론적인 행위다.
사진
<오늘 집앞 야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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