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7.23.(火曜日, 부슬비) “요나 콤플렉스”
저 시냇물은 뒤로 돌아 산꼭대기로 거슬러 올라갈 수 없다. 시냇물은 동네로 흘러내려 가 하전이 되고, 하천은 수 많은 하천들과 함께 거대한 강이 되어 도도하게 흘러간다. 결국 강들도 가야만 하는 궁극의 장소가 있다. 바다다. 이 바다에는 우리를 송두리째 삼켜버릴 괴물이 있다. 신화와 경전에 가장 자주 등장하는 괴물인 고래다.
8월 4일 시작하는 <자기치유의 글쓰기 학교: 요나서와 모디딕>(줌수업)은 누구나 만나길 꺼려하고 도망치고 싶은 궁극의 자신, 고래와 조우하는 공부다. 나와 수강자들은 모두 자신만의 의미가 있는 삶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수련자다. 나는 다음 7단계로 이 수련을 같이 진행할 것이다:
명상음악과 욥기 (10분)
수련자들이 눈을 감고 자신을 돌아보기 위해 명상음악과 욥기 싯구로 시작한다.
욥기 싯구를 함께 낭독한다.
2. <요나서> 히브리어 원전번역본 깊이 읽기 (30분)
수련자들은, 그 전주에 배부한 번역을 깊이 읽고, 자신만의 해석을 시도한다.
3. 허만 멜빌 <모비딕> 소설 함께 천천히 완독하기(5장정도): (30분)
수련자들은 다음 수업을 위해 소설을 5장정도 읽고, 함께 토의할 질문을 준비한다.
4. 질의와 응답 (30분)
요나서와 소설내용을 함께 토의한다.
5. 명상시 (10분)
그 주간에 마음 속에 심어 놓은 명상 영시를 번역하여 함께 낭독한다.
6. 에세이 숙제
함께 공부한 내용을 에세이로 제출한다.
(글쓰기에 부담이 있는 분은, 내키실 때, 제출한다)
7. 코멘트
수련자들이 제출한 에세이를 코멘트해 돌려준다.
이 수업을 진행하는 이유는 변화變化다. 인간은 자신이 간절히 원하는 자신을 자력으로 될 수 있는가? 아니면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가? 이 질문은 인류가 자기-이해를 위해 구축해 온 철학, 종교, 문학, 그리고 예술을 생존하게 만드는 중요한 외침이다.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에 등장하는 불가지론 신학자 피스토리우스는 에밀 싱클레어에게 명상과 꿈의 해석을 통해 내면으로 들어가는 여정을 수련시킨다. 그는 에밀에게 인간이 지닌 가장 위대한 능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비행은 인간이 소유한 가장 위대한 욕망이다. 누구나 그 욕망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권력의 뿌리와 연결되어있는 감정이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욕망 자체를 두려워한다. 이런 이유로 대부분의 인간은 하늘을 날게 만드는 자신의 날개를 벗어 버리고, 땅에 붙어 걷기를 선호하며 남들이 만들이 놓은 법에 복종한다.”
인간은 누구나 궁극적으로 조각해야하는 위대한 영웅, 즉 자기-자신을 지니고 있다. 이 자기-자신은 각자 인간에게 최선의 가능성이다. 예수, 소크라테스, 공자, 노자, 무함마드와 같은 소수의 인간만이 그것을 발굴하여 자신과 주위 사람들에게 여실히 보여주었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그것을 발휘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자신이 열망하는 그 위대함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 위대함이란 그 존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감히 자신의 몸과 영혼에 날개를 다는 작업이다. 인간이 내재적인 잠재력을 감지하지도 발휘하지도 못하는 이유는, 부정적인 자기-자신이라는 괴물 때문이다. 그런 자신은 위대함을 열망熱望하기 보다는 회피回避한다. 인간은 누구나 깊은 성찰을 통해, 자신이 감동하는 자신의 모습을 섬광閃光처럼 떠올라는 경험을 한다. 그(녀)는 이 섬광에 전율하지만 동시에 두려워하기도 한다.
고대 이스라엘 예언자 요나는 자신의 잠재와 마주하여 바로 도망쳤다. <요나서>는 짧지만, 심오한 심리소설이다. <요나>1장 1-2절은 이렇게 시작한다.
וַֽיְהִי֙ דְּבַר־יְהוָ֔ה אֶל־יֹונָ֥ה בֶן־אֲמִתַּ֖י לֵאמֹֽר׃
ק֠וּם לֵ֧ךְ
אֶל־נִֽינְוֵ֛ה הָעִ֥יר הַגְּדֹולָ֖ה וּקְרָ֣א עָלֶ֑יהָ
כִּֽי־עָלְתָ֥ה רָעָתָ֖ם לְפָנָֽי׃
“야훼의 말이 아미테의 아들 요나에게 왔다.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 꾸물대지 말고 어서 일어나라.
앗시리아 제국의 가장 큰 도시 니느웨로 가서 외쳐라.
왜냐하면, 그들의 죄가 내 코끝까지 올라왔기 때문이다.”
미국 심리학자 애이브러햄 매슬로Abraham Maslow는 인간 본성에 평범과 순응에 안주하고 자신을 독창적으로 창조하는 욕구를 고의로 파괴한다고 진단하였다. 그는 이 콤플렉스는 성서에 등장하는 예언자 요나의 이름을 따서 ‘요나 콤플렉스Jonah Complex’라고 부른다. 우리 각자는 자신이 이 병에 걸린 환자인지를 인식하고, 온전한 자신을 만드는 수련을 시작해야 한다. 그 수련이란 자신의 정성과 인내를 동원하여 체덕지를 개선시키려는 노력이다.
성서저자는 요나가 누구인지 전혀 설명하지 않는다. 단순히 그를 ‘아미때의 아들’이라고만 소개한다. 아미태의 이름이 성서에서 두 번, 요나의 아버지로만 언급된다. 이스라엘 북부 국경지대 갓헤벨이란 마을 출신이다. 갓헤벨은 예로부터 포도재배로 유명한 지역이다. 아마도 요나는 아버지 아미때를 도와 시골 한적한 곳에서 포도를 재배하며 연명하던 농부였을 것이다.
신은 요나가 명상을 하고 덕을 쌓아 그를 선택한 것이 아니다. 신은 우리와 같은 보통 사람인 요나를 아무런 예고도 없이 불현듯 선택한다. 요나는 시골 산지에서 포도주를 만들고 하루하루 나름대로 잘 살고 있었다. 그런 자에게 신이 갑자기 말을 건다. 요나가 포도원이 한눈에 보이는 산지에 가만히 앉아있었다. 그에게 행복은 가족들과 오순도순 지내는 것이다.
신이 요나에게 건 낸 첫 번째 말은 ‘자, 꾸물대지 말고 어서 일어나라!’다. 히브리 단어 ‘쿰’qum은 히브리 문장 구문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쿰’의 축자적인 의미는 ‘자신의 자리에서 일어나라’이다. 인간이 한 장소에 안주하면, 그 장소가 편해져 좀처럼 이주하지 않는다. 자신도 모르게 편함이 일상을 지배하는 주인이 된다. ‘쿰’은 그런 안주하는 장소로부터 엉덩이를 떼어내고 미지의 장소로 갈 준비를 하라는 명령이 담긴 어휘다. ‘쿰’은 또한 다른 동사 앞에 등장하여, 그 동사의 의미를 강화하고 촉구한다. 위 문장에서 신은 니느웨란 도시로 ‘가라’고 명령한다. ‘가다’를 의미하는 히브리 단어 ‘할락은 동작동사로 “자신이 안주한 자리에서 일어나 그 자리를 박차고 첫발을 내딛어라”란 뜻이다.
신은 항상 인간에게 불가능하고 터무니없는 것만을 명령한다. 그(녀)를 실험하고 싶어서다. 그의 한계를 측정하여, 일을 맡기고 싶어서다. 신은 요나에게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아시리아 제국의 수도인 니느웨로 가라고 말한다. 성서저자는 ‘니느웨’를 수식한 문구하나를 붙였다, ‘그 큰 도시’다. 이 문구는 성서에 한번 밖에 등장하지 않는 표현으로, 성서저자가 아는 한,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도시’라는 뜻이다. 신은 포도농사를 짓고 있는 무명의 촌부에게 갑자기 나타나, 앗시리이 제국의 수도인 니느웨로 가라고 명령한다.
신은 요나에게 그가 가야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니느웨 도시와 앗시리아 제국 사람들의 죄를 많이 짓기 때문이다.” 냉정하게 생각하면 요나와 니느웨 거주자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만일 신이 요나에게 북 이스라엘 도시 사마리아나 베델에 가서, 신의 말을 전하라고 명령한다면, 요나가 순응할 수도 있다. 신은 요나에게 그의 조국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앗시리아 제국의 수도 니느웨로 가서, 앗시리아 제국의 안녕을 위해 신의 말을 선포하라고 명령한다.
위대한 일은 비상식적이다. 요나의 반응은 예상할 만하다. 요나는 그 즉시 신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니느웨와 정반대의 장소인 ‘타르시스’로 도망치려한다. 아마도 그가 포도주 수출을 위해 외국선원으로부터 소문으로 들었던 장소였을 것이다. 타르시스의 정확한 위치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학자들은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 항구 혹은 스페인의 ‘타르테소스’항구라고 추정한다. 요나의 너무 인간적인 행위는 <요나서> 1.3에 다름과 같이 기록되어있다.
“이 말을 받고도 요나는 야훼의 눈앞을 벗어나 타르시스로 도망가려고 길을 떠나 항구 욥바로 내려갔다. 거기서 타르시스로 가는 배를 만나 배 삯을 내고 남들과 함께 배에 탔다. 야훼의 눈앞을 벗어날 셈이었다.”
인간은 자신이 될 수 있는 자기-자신을 가슴 속 깊은 곳에 품고 있다. 그것은 자신의 가능성을 실현하겠다는 열망이다. 그런 자기-자신의 성장을 가로 막는 것 또한 과거에 안주하려는 자기-자신이다. 요가는 시골산지에 무명씨로 인생을 행복하게 마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양심을 통해 신의 목소리를 무시하지 않고 경청할 때,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그 미세한 소리가 너무 강력하여 두려운 나머지, 자신의 고향을 떠나, 자신의 생계를 보장시켜줄 타르시스로 갈 참이다. 욥바라는 항구로 내려가 타르시스로 가는 배에 승선한다.
나는 나에게 주어진 나날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나의 양심에 호소하는 신의 침묵의 소리에 귀를 닫을 것인가? 아니면 그런 명령이 두려워, 더 안전하고 은밀한 장소로 가기 위해 숨을 것인가? <자기치유를 위한 글쓰기 수업>을 통해, 자신만의 바다로 달려가 각자가 고래와 조우하면 좋겠다.
고래와 조유하려는 심정을 멜빌은 <모비딕> 제1장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Loomings
어렴풋이 들어나는 간절한 것들
Call me Ishmael. Some years ago-never mind how long precisely-having little or no money in my purse, and nothing particular to interest me on shore, I thought I would sail about a little and see the watery part of the world. It is a way I have of driving off the spleen, and regulating the circulation. Whenever I find myself growing grim about the mouth; whenever it is a damp, drizzly November in my soul; whenever I find myself involuntarily pausing before coffin warehouses, and bringing up the rear of every funeral I meet; and especially whenever my hypos get such an upper hand of me, that it requires a strong moral principle to prevent me from deliberately stepping into the street, and methodically knocking people's hats off-then, I account it high time to get to sea as soon as I can. This is my substitute for pistol and ball. With a philosophical flourish Cato throws himself upon his sword; I quietly take to the ship. There is nothing surprising in this. If they but knew it, almost all men in their degree, some time or other, cherish very nearly the same feelings towards the ocean with me.
나를 이스마엘이라고 불러다오. 몇 년전인가-정확하게는 기억이 나지 않는데-지갑에 돈이 거의 떨어지고, 육지에서는 재미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을 때였다. 내가 항해를 나가 세상을 구성하는 물이 있는 부분, 바다를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우울함을 떨쳐버리고 몸 안에 피를 순환시키는 하나의 방식이다. 내가 입이 텁텁해지고 이상한 냄새가 나는 것을 발견할 때, 내 영혼이 비가 부슬부슬 내려 축축한 11월과 같이 되었을 때, 내가 나도 모르게 장의사 앞에 발걸음을 멈추고, 장례행렬 뒤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 특히 내 우울증이 나를 사로잡아, 거리로 일부러 뛰쳐나가 사람들의 모자를 툭툭, 체계적으로 떨어뜨리고 싶은 마음을 억제하고 싶은 도덕적인 원칙을 발휘해야 할 때, 그때가 가능하면 빨리 바다로 갈 최적의 시간이다. 이것이 내가 권총자살을 대치하는 방식이다. 화려한 철학 문장을 구사하면서 로마 정치가 카토(기원전 95-46년)는 자신의 칼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지만, 나는 조용히 배에 오른다. 놀랄 일이 아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어느 정도는, 언젠가는 내가 바다를 향해 지닌 거의 동일한 감정을 소중하게 여긴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