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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7.22. (201/365, 月曜日, 부슬비) “당신은 어둠 속에 있습니까?”

2024.7.22. (201/365, 月曜日, 부슬비) “당신은 어둠 속에 있습니까?”

     

부슬비가 내린다. 태양이 아직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 비가 컴컴한 숲을 바라보는 책상 유리창에 부딪힌다. 부슬비는 서두르는 법이 없다. 가만히 아래로 흘러내려간다. 안개가 비가 되고, 비가 모여, 땅에서 시내과 강이 되어, 결국 바다의 심연을 이룰 것이다. 안개가 바로 바다의 심연이라고 노래한 시가 있다. 알로이시우스 베트랑Alousius Bertrant(1807-1841)의 시 <밤의 가스파르>다. 이 시의 원제는 (밤의 가스파르: 렘브란트와 칼로 방식으로 만든 판타지 시Gaspard de la Nuit — Fantaisies à la manière de Rembrandt et de Callot>다. 시인은 파도의 신인 운딘인 밤이라는 보물의 문지가가 되어 자신을 찾아오는 과정을 노래하였다. 이 시에 영감을 받는 프랑스 작곡자 모리스 라벨(1875-1937)은 동일한 이름 피아노 곡을 작곡하였다. 지난주, 성난 장마가 먹을 것을 찾아, 인가까지 내려온 배고픈 곰처럼 산천초목과 인간이 만든 건물들을 흔들었지만, 이제는 이 보슬비가 나를 찾아와 마음의 문을 두드린다.

     

지난 주 소나기에도 농가의 고추, 옥수수, 토마토, 한 달 후를 기다리는 봉지에 쌓인 포도송이는 무시하다. 가을에 매끈한 마가호니 자태로 등장할 밤은, 잔뜩 파릇파릇한 가시로 무장하여 저 높이 꿏꿋하게 달려 있다. 어제 밤, 산책길에 나를 맞이한 옥수수나무가 얼마나 키가 큰지. 이 옥수수를 보는 것이 얼나나 위안과 기쁨이 되는지! 자연은 어디를 보아도 기적의 보고다. 특히 옥수수는 저 높은 가지 사이에 저 큰 볏을 올려 두고, 바람이 불면 둥실둥실 춤을 춘다. 자신을 송두리째 따갈 동물의 손길을 기꺼이 기다린다. 그 은빛 수염 안에 보이는 알갱이는 자신에게 주어진 생명의 기한을 마쳤다는 표시다. 저 어두운 흙에서 몇 달을 가만히 지내더니, 이 여름에 기적을 이루어냈다.

     

이 옥수수를 뮈비우스 띠처럼 감고 있는 껍질과 빛과 랏빛 수염의 자태는 인간들이 열광하는 숫자로는 표시할 수 없다. 아, 자연에 감탄하고 감동할 수 없는 마음이 얼마나 가난한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질 못하고, 이기심과 전략으로만 대상을 분석한다. 인간을 점점 바보로 만드는 기계는 TV가 아니라 핸드폰이다. 현대인은 이 바보 수첩이 전하는 정보로, 자신의 행복과 희로애락을 측정하는 좀비들이다. 우리는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고, 감탄하고 경외할 줄 모르는 인지 장애인들이다. 유일하게 가격, 숫자, 통계, 그래프의 요동에 행복과 불행을 느낀다.

     

옥수수가 지난 봄에 땅속에서 지낸 시간이 바로 오늘의 영광스런 열매다. ‘밤이 되니 아침이 되었다’라는 문구를 기원전 6세기 유대 시인이 성서의 첫 번째 책인 <창세기>에 우주의 부속물들을 창조할 때마다, 다음과 같은 구절을 사용하였다:

     

וַֽיְהִי־עֶ֥רֶב וַֽיְהִי־בֹ֖קֶר

와히 에레브 와히 보케르

“저녁이 되자, 아침이 되었다.”

     

이 문장을 내 다름대로 다시 쓰지면 이렇다:

“어둠이 되자, 빛이 되었다.”

     

어둠은 빛을 가져오는 믿을 수 있는 문지기다. 그러기에 신은 어둠을 희구하는 빛이며, 동시에 빛을 희구하는 어둠이다. 우리가 어둠을, 반겨야 하는 이유는, 빛이 다시 비출 유일한 준비이기 때문이다. 어둠이라는 것은 옥수수처럼 온전히 저 하늘 높이, 올라가는, 인간의 성장을 막는 방해꾼들이다. 옥수수 씨앗이 자신의 순리대로 빛을 향해 싹을 틔우고 줄기를 내고, 자신의 심장에서 옥수수 알갱이를 맺어야한다. 모든 동물과 식물은 자신의 섭리대로, 지구의 공전과 자전에 궤를 맞춰, 계절에 따라 적절하게 변모한다.

     

만물 안에는 거룩한 생명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 길을 따라가야한다. 그 길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가 말한 다음 네 단계다:

1. 긍정의 길via positiva

2. 부정의 길via negativa

3. 창조의 길via creativa

4. 변모의 길via tranformativa

     

‘긍정의 길’이란 모든 생물이, 우리 각자가 신의 형상과 모양을 지닌 존재로, 신의 모습을 씨앗의 형태로 지니고 있다는 믿음이다. 이 자기-신뢰는 우리 인생의 모든 문제를 풀 열쇠다. 오래된 복음은, 인간은 죄인이며, 외부인을 통해 구원을 받아야 한다고 설교해왔다. 그 복음은 오래전에 폐기 되었다. 새로운 복음은,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동식물이, 그것 자체로, 생명을 지닌 존재로 신의 가능성과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창세기> 1.26절에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우리의 형상과 똑같이, 진실로 우리의 모양대로 흙덩이를 통해 인간을 만들어 보자!”

     

위 문장은 기원전 6세기에 등장한 모든 인간을 신의 유전자를 지녔다는 선언문이다.

     

‘긍정의 길’에 들어서면, 우리가 해야할 일이 있다. 그것은 ‘부정의 길’이다. 여기서 부정이란 ‘없음’이고 무無다. 인간을 포함한 동물은 태어 난 후, 한참 지나야, 자신이 특별한 환경에 던져졌다는 사실을 인식한다. 그런 후, 그 환경에 영향을 받아, 세상에서 생존하기 위한 지식을 쌓는다. 이 지식은 소크라테스가 말한 무식無識일 수 밖에 없다. 나는 남자, 한국인, 1960년대생, 부모의 영향, 대한민국 교육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일정한 세계관을 지니게 되었다. 나는 여자, 외국인, 다른 세기에 태어난 사람들, 다른 부모밑에서 태어한 사람들, 유럽의 교육을 받는 사람들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인간이 일정한 기간이 지나면, 자신의 삶의 발자취를 돌아보고, 자신의 이전 지식의 하찮음과 왜곡됨을 깨닫고, 눈을 감고 입을 다물고 귀를 닫아, 자신이 누구인지 처음부터 다시 고민하기 시작한다. 이 길이 ‘부정의 길’이다. 나는 주위 사람들이 나에 관해 말하는 ‘이것도 아니고 그것도 아니다.’

     

9세기경 쓰여진 ‘아바듀다 지타’Avadhuta Guta, 즉 ‘자유로운 영혼의 노래’ 1권 25행이 다음과 같는 구절이 등장한다. तत्त्वमस्यादिवाक्येन स्वात्मा हि प्रतिपादितः । नेति नेति श्रुतिर्ब्रूयाद अनृतं पाञ्चभौतिकम् ।। २५।। tattvamasyādivākyena svātmā hi pratipāditaḥ / neti neti śrutirbrūyād anṛtaṁ pāñcabhautikam //25//

‘네가 그것이라’라는 문장을 통해, 우리 자신의 자아가 확인된다.

다섯 요소로 구성된 것은 거짓이다. 경전이 말하길 ‘이것도 아니고, 이것도 아니다.

     

부정의 길, 네티 네티의 정신은 예수의 정신이기도 하다. 예수는 <누가복음> 14.26에서 다음과 같이 파격적으로 선언한다.

     

Εἴ τις ἔρχεται πρός με

καὶ οὐ μισεῖ τὸν πατέρα αὐτοῦ καὶ τὴν μητέρα καὶ τὴν γυναῖκα καὶ τὰ τέκνα καὶ τοὺς ἀδελφοὺς καὶ τὰς ἀδελφάς,

ἔτι τε καὶ τὴν ψυχὴν ἑαυτοῦ,

οὐ δύναται εἶναί μου μαθητής.

“만일 누가 나에게 오려거든,

자신의 아버지, 자신의 어머니, 자신의 자식, 형제, 자매를 미워해야 한다.

심지어, 자신의 목숨마져 미워해야 한다.

그래야, 내 제자가 될 수 있다.”

     

예수는 세상에 우리가 모두 원하는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분쟁과 칼을 주러왔다.

 Μὴ νομίσητε ὅτι ἦλθον βαλεῖν εἰρήνην ἐπὶ τὴν γῆν·

οὐκ ἦλθον βαλεῖν εἰρήνην ἀλλὰ μάχαιραν.

“내가 세상을 평화를 보내려 온것이라고 생각하지 말아라.

나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웠다.”

     

이것이 두 번째 단계인 부정의 길via negaiva다. 어둠은 빛을 당겨오는 유일한 기적이다. 짙은 어둠은 숫자가 아니라 감동과 경외로 가득찬 자연과 우주를 알아가는 유일한 길이다. 당신은 어둠속에서 헤매고 계십니까? 새벽이 왔다는 희망의 복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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