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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6.26. (水曜日) “자신에게 고요를 선물하십시오!”

2024.6.26. (水曜日) “자신에게 고요를 선물하십시오!”

     

하루는, 뜻밖의 선물이다. 우주는 태고적, 빅뱅이후, 매 순간 생경한 시간과 장소를 그 안에 존재하는 구성원들에게 차려준다. 오늘 하루를, 빅뱅이후, 만물이 처음 맞이하는 시간이며 장소다. 오늘을 자신의 삶의 목적이자 수단으로 변모시키는 덕목德目이 있다. 바로 ‘고요’다. 산 넘어 태양이, 하루라는 선물을 들고 고요하게 그리고 어김없이 우리를 찾아온다. 그리고 이젠 그만 부산을 떨지 말고, 입을 다물고 눈을 감고 하루를 어떻게 보낼지 생각해보라고 요구한다. 태양의 이 요구조차 고요하다. 아침이 되면, 지구상 모든 동식물들은, 오늘 자신이 해야할 임무을 알고 묵묵히 행한다. 유일한 예외가 인간들이다. 아침이 되면 떠들기 시작한다. 그들에 대해 미국 시인 월트 휘트먼은 <나를 위한 노래> 제3단락 시작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충고한다.

     

“I have heard what the talkers were talking,

the talk of the beginning and the end

But I do not talk of the beginning or the end.

There was never any more inception than there is now,

Nor any more youth or age than there is now,

And will never be any more perfection than there is now,

Nor any more heaven or hell than there is now.”

“저는 수다쟁이들이 떠드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처음이 어쩌구저쩌구, 끝이 어쩌구저쩌구.

그러나 저는 처음이나 끝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겠습니다.

‘지금’보다 더 시급한 시작은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보다 저 젊거나 저 늙은 시절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보다 더 완벽한 완벽은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보다 더 좋은 천국이나 더 나쁜 지옥이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특히 인간은, 특히, 어제 화면에서 본 정치인들은, 상대방이 틀렸다고 손가락질하고 호통친다. 그 얼굴을 다시는 안보면 좋겠다. 그들은 아침에 세수하면서 자신의 못난 얼굴을 한번도 본적이 없는 것 같다. 온 국민이 자신의 얼굴을 TV화면을 본다는 사실을 모르나 보다. 아니 후안무치라, 아랑곳하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 대부분은 새벽에 일어나자마자, 핸드폰을 쳐다보고, 쓸데없는 오래된 뉴스를 반복해서 보고, 오늘 처리해야 할 산더미같은 약속 스케줄과 문자들을 읽는다. 우리는, 핸드폰을 켜놓고 언제든지 불특정다수가 보내는 스팸 알림에 반응할 준비가 되어있는 스몸비다. 쓸만한 정보가 하나도 없다. 적어도 10년동안 나에겐 그랬었다.

     

누가 이 막무가내 정보들을 막을 것인가? 우리 자신뿐이다. 정색正色을 하고, 자신만의 공간과 시간에서 숨을 고르지 않는 한, 일상이라는 수채구멍 안으로 이내 빨려 들어갈 것이다. 누가 저 올라오는 태양을 고요하게 맞이할 것인가? 100년전 신문과 방송이라는 미디아가 등장하면서, 인간들은 타인이 정해놓은 일로 쓸데없이 바쁘다. 우리는 자신이 되기 위한 정적을 수련한 적이 없고, 나도 모르게 내 안에서 요동치는 잡념들을 고요하게 만든 것이없다. 이 잡념이 이젠 강력한 바람을 일으키는 태풍이 되어 우리를 이리저리 날려 보내 정신이 없다. 파스칼이 1654년에 말한 내용은 진리다:

     

“All of humanity’s problems stem from our inability to sit quietly in a room alone.”

“인류가 직면한 모든 문제들은 우리가 방안에서 조용하게, 홀로, 좌정하지 못하는 무능력에서 온다.”

     

홀로, 그리고 조용하게 앉아 있는 행위가 자신의 행복을 찾는 열쇠다. 매일 이 수련을 연마하는 사람에겐, 자신에게 부여된 자기-나름의 천재성을 발견하여 유유자적할 것이다. 가만히 홀로 앉아있는 행위는 종교인들의 고상한 취미도 아니고 현자나 철학자의 유희도 아니다. 이 고요한 행위는 우리가 누구이던, 농부이든, 사업가던, 운동선수이던, 증권맨이든, 예술가든 상관없이, 그 사람이 잠재력을 일깨우는 자명종이며, 하루라는 선물 상자를 여는 열쇠다.

     

고요는 나를 변신시키는 용광로다. 고요없이 우리는 사회라는 소용돌이에 떠도는 지푸라기이며, 타인이 원해 자신이라고 착각하는 ‘가짜 자아’의 영원한 포로가 될 것이다. 바쁨은 허영을 불러일으키는 부채질이다. 더 나은 부모가 되기 위해, 더 나은 기업이 되기 위해, 더 나은 투자자가 되기 위해, 더 나은 인간이 되기 위한 처방전이 고요다.

     

자신의 마음을 고요하게 만드는 수련은 힘들다. 인도 영웅 아르주나는 크리슈나 신에게 자신의 마음을 휘어 잡어 고요하게 만드는 행위가 얼마나 힘든지를 <바가바드기타> 6.34에서 말한다:

चञ्चलं हि मन: कृष्ण प्रमाथि बलवद्दृढम् । तस्याहं निग्रहं मन्ये वायोरिव सुदुष्करम् ॥ ३४ ॥

cañcalaṁ hi manaḥ kṛṣṇa pramāthi balavad dṛḍham tasyāhaṁ nigrahaṁ manye vāyor iva su-duṣkaram

“오, 크리슈나여! 마음을 촛불처럼 깝박이고, 떠들썩하고, 강력하고 고집불통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마음을 제어하는 것은, 바람을 제어하는 것보다 어렵습니다.”

     

우리는 육체라는 전차를 딴 승객이다. 지성은 운전수이며, 마음은 엔진이고 감각은 전차를 끄는 말들이다. 지성이 전차를 움직이려 하지만, 마음이 말들 들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고요는 바로 이 마음을 훈련시키는 수련이다. 고요는 행복이란 자물통을 여는 열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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