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6.24. (月曜日) “외국인노동자外國人勞動者”
오늘 저녁 뉴스에서 본 화재 화면은 충격이었다. 몇해 전 전기자동차에서 빠져나오지 못해 대리운전기사와 함께 고인이 된 지인 변호사가 생각났다. 건물에서 거대한 흰 연기와 함께 넘실거리는 거대한 붉은 화마가 하늘 높이 치솟고 있었다. 단테가 <인페르노> 14곡에 묘사한 사막에 한없이 떨어지는 불 폭탄보다고 더 끔찍하다. 이 불은 우리가 만든 물건에서 발화된 화마다. 이곳은 화성에 위치한 리튬이온 일차전지(건전지)업체 공장이다. 전기차에 들어가는 이차전지에 비해 화재의 가능성이 비교적 낮은 카메라와 핸드폰에 장착되는 일차전지는 비교적 화재의 위험성이 낮은데도 불구하고, 대화재가 발생한 것이다. 참사慘事는 항상 우리가 안전하다고 안이하게 여긴 곳만을 파고 들어와 기존의 상식과 관습을 파괴하고 확장한다.
참사만큼 우리의 수준을 적나라하게 알려주는 단서는 없다. 우리는 이 단서를 통해, 자신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각성해야 한다. 첫 번째는, 대한민국을 외형적으로, 숫자로 중진국에서 선진국으로 도약시킨 인터넷 시대 핵심산업인 핸드폰과 관련 제품의 핵심부품인 일차전지에 불이 붙었다는 사실이다. 이 공장 건물 2층에는 리튬 베터리 3만5천개 보관되어있었다. 배터리 속성상 양극과 음극을 분리하는 분리막이 3만5천개중 하나라도 손상이 된다면, 열이 증폭되어 소위 ‘열폭주熱暴走(thermal runaway)현상이 일어나 온도가 순식간에 1000도로 치솟는다. 어떤 강력한 소화기로도 진압할 수 없다. 한 개의 밧데리가 발화된 후, 15초만에 거대한 산더미처럼 쌓인 배터리에 불이 옮겨붙은 후, 1시간동안 마치 핵폭탄이 터지는 것처럼 천지를 진동시켰다. 배터리가 폭발하면서 유해가스인 벤젠과 불화수소 등이 대량 배출되어 달려온 소방관들은 4시간동안 건물 안으로 진입할 수가 없었다.
열폭주는 단순히 배터리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다. 우리 누구나 쥐고 있는 핸드폰 담긴 정보는 우리의 정신을 일깨우는 유익한 정보도 있지만, 그 반대로, 우리의 정신과 영혼을 좀먹고 심지어 열폭주로 말살시키고 마는 뉴스와 동영상으로 가득 차 있다. 며칠 전에 한 존경하는 어른을 만났다. 그 분이 외국에 살고있는 손주 소식을 전해주었다. 여름방학을 맞이하여, 손주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이 특별 지시를 내렸다는 것이다.
“아이의 핸드폰 사용을 제한시키십시오.
하루에 2시간 정도만 사용하게 규칙을 정하십시오.
이것을 실행하지 않으면, 우리가 애써 실행한 봄학기 교육이 무너질 것입니다.
공원이나 자연으로 가서 동식물을 관찰하는 시간을 가족과 함께 가지십시오.”
대한민국이 지난 10년동안 자살률 1위와 저출산율 1위라는 끔찍한 현상에 핸드폰이 깊이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아이들이 어린시절부터 핸드폰 동영상과 게임이라는 열폭주에 감염되어 그 중독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정부의 저출산율 정책은 긴 안목에서 접근해야 한다. 우리 아이들이 책을 읽고 글을 쓰고 발표하는 현장교육과 자연으로 나가 살아 숨 쉬는 동식물의 관찰과 교감에서 서서히 생명에 대한 약동을 자신의 심장에서 느껴야한다. 수월성교육이 아니라 생명교육으로 시급하게 대한민국은 대전화해야한다.
두 번째는, 대한민국이, 진정한 선진국으로 들어서는 높은 문턱에서 갖추어야 할 문화적인 태도와 소양에 관한 것이다. 이 참사로 사망자 22명 가운데, 20명은 외국인 노동자, 그리고 2명은 우리 국민이다. 외국인 중 중국인 남성 3명, 중국인 여성 14명, 라오스 여성 1명으로 여성 사망자만 15명이다. 이 외국인 노동자들은 청운의 꿈을 안고 ’선진국‘ 대한민국에 화마의 제물이 되었다. 손이 빠른 외국인 노동자 여성의 손이 절실한 공장 2층 완제품 검수와 포장 작업실에서 숨졌다. 시신이 알 수 없을 정도로 불타, DNA감별을 통해 사상자를 파악할 뿐이다.
누구나 그 땅의 원래 주인은 아니다. 현생인류의 조상인 호모 사피엔스도 아프리카에서 먹을 것을 찾아, 유럽과 아시아로 이동한 이주민이었다. 인간은 항상 이주하여, 자신과 생경한 문화와 문명을 경험하여 점차로 온전한 인간으로 변모한다. 다름이 수용과 발휘가 그 사람의 품격이기 때문이다.
고대 이스라엘을 건립한 ‘히브리인’은 요즘 말로 바꾸면 ‘임시 외국인 노동자’ 혹은 ‘나그네’ 정도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와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을 이르는 고대 히브리어가 바로 ‘히브리(Hebrew)’다. 이들 대부분은 고대 근동 도시의 소작농으로 있다가 왕이나 귀족들에게 세금을 바치지 못하자 고향을 떠나 외국으로 도망친 사람들이다. 성서에서는 이들이 이집트에서 노동자로 살다가 모세라는 지도자와 함께 탈출한 자들로, ‘온갖 잡족’이라고 표현돼 있다. 이들은 이집트란 당시 최고의 문명국에서 하층민으로 살다가 자신들을 변호하는 신(神)이 있다는 모세의 말을 듣는다. 그 신은 다른 나라들의 왕이나 귀족들을 위한 신이 아니라 히브리인들의 고통을 귀로 직접 들으며 그들의 고생을 눈으로 직접 보는 신이다. 그 신의 이름은 ‘야훼’이다. 그는 ‘고아와 과부, 그리고 가난한 자’를 위한 신이다.
이들에게 ‘야훼신이 유일신’이란 표현은 다른 민족이나 집단이 믿는 신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들의 신만을 유일한 신으로 섬긴다는 뜻이 아니다. ‘야훼신이 유일신’이라는 표현에는 사회의 약자들을 위한 신만이 유일하게 ‘신’이라 불려야 한다는 신앙관이 담겨 있다. 이스라엘의 신은 ‘고아의 아버지, 과부를 돕는 재판관’으로 표현된다. 특히 ‘시편’ 82편엔 이스라엘 신이 법정에 나와 신들을 모아놓고 재판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다른 신들과는 달리 이스라엘 신만이 ‘고아와 과부를 변호해주고 가련한 사람과 궁핍한 사람’을 돌보는 신으로 등장한다. 이들을 돌아보지 않는 신들은 거짓이며, 그 신들은 인간들처럼 죽을 것이라고 경고한다. 기원전 8세기에 등장한 ‘아모스’라는 예언자는 바로 사회의 가장 중요한 가치가 이 소외된 자들의 복지와 권리를 보장하는 데 있다고 주장한다. ‘정의’는 바로 이들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한다.
심지어는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특별한 배려를 주문한다. 신은 이스라엘인들에게 <신명기> 24장 20-22절에서 다음과 같이 명령한다:
20절
כִּ֤י תַחְבֹּט֙ זֵֽיתְךָ֔ לֹ֥א תְפָאֵ֖ר אַחֲרֶ֑יךָ לַגֵּ֛ר לַיָּתֹ֥ום וְלָאַלְמָנָ֖ה יִהְיֶֽה׃ ס
“네가 올리브 나무를 쳐서 (올리브 열매를 땅에 떨어뜨릴 때), 그 가지에 다시 장식하러 가지 말아라. 그것은 외국인 노동자와 고아와 과부를 위한 것이다.”
21절
כִּ֤י תִבְצֹר֙ כַּרְמְךָ֔ לֹ֥א תְעֹולֵ֖ל אַחֲרֶ֑יךָ לַגֵּ֛ר לַיָּתֹ֥ום וְלָאַלְמָנָ֖ה יִהְיֶֽה׃
“당신이 포도원에서 포도를 추수할 때, 포도를 땅에서 줍지 말아라. 그것은 네가 온 후에, 외국인 노동자와 고아와 과부를 위한 것이다.”
22절
וְזָ֣כַרְתָּ֔ כִּי־עֶ֥בֶד הָיִ֖יתָ בְּאֶ֣רֶץ מִצְרָ֑יִם עַל־כֵּ֞ן אָנֹכִ֤י מְצַוְּךָ֙ לַעֲשֹׂ֔ות אֶת־הַדָּבָ֖ר הַזֶּֽה׃ ס
“기억하라. 네가 이집트 땅에서 노예였다는 사실을, 그러므로 나는 네가 이것을 실행하도록 명령한다.”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배려가 선진국진입의 입장권이다. 이들에 대한 배려가, 우리 사회 안에 거대한 정보화 틈에서,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소외된 고아와 과부에 대한 배려로 이어지길 바란다. 어쳐구니 없이 죽어가는 사람들에 대한 의례가 없는 국가는 야만이다. TV뉴스를 틀면, 매일매일 확인되는 야만국가가 된 대한민국에 희망이 있는가?
사진
<화재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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