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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4.25. (木曜日) “감리교회 살길”

2024.4.25. (木曜日) “감리교회 살길”

     

감리교회 감독이셨고 현재는 한국목회아카데미 원장님이신 김종훈감독님께서 두달 전 쯤 연락이 와, 2024년 봄 세미나 강의를 부탁하셨다. 그는 한국교회, 특히 감리교회 목회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솔직하게’ 전달해달라는 요청이었다. 나는 기꺼이 이 요청에 응했다. 요즘 우리가 겪고있는 혼동과 정신적인 질환을 일으키는 중요한 요인 중에 하나는 종교의 타락과 소멸과 깊이 연관되어있기 때문이다. 최저출산율과 최고자살률은 종교의 타락과 교육의 상실이 그 원인이기 때문이다. 종교宗敎와 교육敎育이 혁신하지 않는 한, 현대문화와 문명은 더 우울해지고 서로를 시기하고 자해하는 집단정신병자들의 정신병동이 될 것이다.

     

종교는 순간을 사는 인간에게 자신이 왜 사는지를 성찰하여 각자 나름대로 의미를 찾는 실용적인 도구였다. 30만년전에 북아프리카에서 처음 등장한 현생인류의 유전적인 조상 호모 사피엔스는 네안데르탈인과 같은 유인원과 진배없는 짐승이었다. 호모 사피엔스의 극히 일부가 정신적인, 그리고 영적인 인간, 즉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가 된 시기는 4만년전이다. 이 새로운 종은, 신체는 호모 사피엔스의 직계 자손이지만, 정신적으로 영적으로는 전혀 다른 유전자를 지는 종이다. 이들을 구분을 짓는 결정적인 두 가지가 있었다. 바로 사후세계에 대한 상상과 장례의례이고 다른 하는 늑대-개를 반려동물로 삼은 점이다.

     

20세에게 들어서, 자체적으로 변모하지 못하는 유럽 그리스도교에 대해 철학자 니체는 ‘너희들이 믿는 그런 신은 죽었다’라고 선언하였다. 스스로 자신을 극복하려는 초인이 신이라고 설교하였다. 때마침 등장한 대중문화, 대량생산, 전체주의를 통해 엄청난 이익을 얻으려는 독재자들이 등장하였다. 이들은 ‘민주주의’와 ‘투표제도’라는 이름으로, 독재獨裁를 일삼아왔다. 20세기중부터 지금까지, 더 교묘한 독재자가 등장하여, 현대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장악하였다. 조지 오엘이나 토머스 헉슬리가 경고한 디스토피아가 실현되었다. 이번에는 인터넷이나 SNS가 시청자들을 자발적인 중독자로 만들어, 자신들이 원하는 로봇으로 변모시킨다.

     

오늘은 바쁜 날이었다. 강연이 두 개나 있었다. 하나는 경영인들을 위한 모임이다. 매주 목요일 오전 7시에 진행된다. 일찍 서둘러, 새벽 4시30분에 집에서 출발하였다. 7시에서 9시까지는 ‘불복종의 아이콘, 헨리 데이빗 소로(1818-1862)’라는 제목으로 강연하였다. 바로 목회자들을 위한 강연이 열리는 서울유스호스텔(남산)으로 향했다.

     

나는 좀처럼 종교인들, 특히 그리스도교인들에게는 강연을 하지 않는다. 그들 대부분이 자신이 동의하지도 않는 과거 교리에 사로잡혀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추운 겨울날, 옷을 입은 채, 호수에 빠진 후, 겨우 땅으로 살아나와 점점 굳어져 얼음이 된 옷을 입어 걷기조차 힘든 모습이다. 저 멀리서 태양빛이 찾아와 이들의 얼어붙은 옷을 녹이지 않으면 희망이 없다. 우리가 하는 종교들이 백년안에 모두 사라질 위기에 봉착했다.

     

내가 성서를 읽고 해석한 내용이, 전통적인 그리스도교 교리와 대치될 수밖에 없다. 교리는 잠정적이기 때문이다. 경전을 읽는 신도들이, 스스로 해석을 유출해 내도록 자극하는 도우미다. 성서는, 독자의 삶의 정황과 아울어져, 그의 삶을 스스로 돌아보고, 개선하도록 촉구하는 나침반이다. 성서를 깊이 읽고 해석하기 위해, 고대 근동언어들을 본격적으로 연구해왔다. 구약성서는 고대근동의 신화, 역사, 언어가 빚어낸 예술작품이고, 신약성서는 그리스-로마 세계가 구워낸 도자기다.

     

나는 강연 제목을 ‘감리교회의 살길’로 잡았다. 부제는 ‘유기遺棄하고, 회복回復하고 개안開眼하십시오!’다. 나는 부모님의 신앙전통을 따라, 개신교 감리교인이 되었다. 1991년, 미국에서 박사과정을 시작하면서, 경제적인 문제를 봉착하여, 목사관과 월급을 주는 교회를 맡은 적이 있다. 메샤추세츠 웨슬리 여자대학 근처에서 2년간 목회를 했다. 90%가 백인 할머니들이 다니는 교회였다. 나는 당시, 학부생과 대학원생들에게 고전 히브리어를 가르치고 있었지만, 동시에 매주 목요일은, 교회의 가장 나이가 많은 에벌린 젤넬이라는 할머니와 양로원에서 지내는 할머니들을 방문하였다. 인생 무상과 의미를 경험하는 시간이었다.

     

나는 ‘개안하십시오’라는 주제의 소재를 ‘엠마로로 가는 두 제자’에서 잡았다. 기원후 30년 두 사람이 실의에 차 고향으로 걸어가고 있다. 예루살렘에서 12km떨어진 엠마오Emmau라는 마음에 살던 두 사람이다. 한 사람의 이름은 글로바고 다른 사람의 이름은 알려지지 사람이다. 누라는 그 무명의 제자를 자신의 글을 읽는 독자로 선정했을 것이다. 이들은 3년 전, 예수라는 청년에 관한 소문을 들었다. 그는 종교는 율법이 아니라 사랑이며, 사랑은 말이 아니라 실천이며, 천국은 그런 사랑을 실천하는 지금-여기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그런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만이 ‘신의 아들’ 즉 신적인 인간이라고 말했다. 당시 종교인들과 그들과 결탁한 정치인들은 자신들의 종교적이며 정치적인 기반을 흔드는 예수를 그냥 두지 않았다. 그를 십자가에서 처단하였다. 이 두 제자는 가족도 버리고 이 청년을 3년간 따라다녔다. 그들은 예수가 정치적인 메시아로 세속적인 왕이 되길 희망했는지 모른다. 이들에 관한 기록은 <누가복음>에만 등장한다.

     

이 두 제자는 엠마오로 돌아가고 있었다. 실의에 찬 이들에 낯선 길동무가 등장하여 대화하기 시작한다. 사실 이 낯선 자는 부활한 예수였는데, 그를 알아보지 못한다. 이해할 수 없는 장면이다. 왜 두 제자는 예수를 3년이나 따라다녔는데, 알아볼 수 없었을까? 누가는 그 이유를 24장 16절에 이렇게 설명한다. “그들의 눈은 그런 예수의 모습을 정확히 인식할 수 없도록 닫혀 있었다.” 그들의 눈의 상태를 그리스어로 ‘에크라툰토’ekratouto라는 단어를 이용하여 설명한다. 이 단어 동사 ‘크라테오’krateo는 ‘장악하다; 붙잡다; 다스리다’는 의미다. 에크라툰토는 문법적으로 미완료수동형으로, 그들의 눈은 지속적으로 무엇인가의 인질이 되어, 예수를 볼 수 없었다. 그들은 자신의 세계관, 자신의 욕망에 인질이 되어 대상을 바로 인식할 수 없는 장님이다. 누가가 사용한 ‘에피그노스코’epi-ginosko ‘오랜 경험과 수련을 통해 정확하게(epi) 상대방을 파악하는 능력’이다. 이 두 제자가 예수를 인식할 수 없었던 이유는, 그가 죽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두 제자는 집으로 들어가 낯선 자를 위해 식사를 마련한다. 낯선 자는 이들의 융숭한 대접을 받고 감사의 기도를 올린다. 그러자 기적이 일어난다. 누가복음 24장 31절은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그가 누구인지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 그런 후 그(예수)는 그들의 눈에서 사라졌다.” 이 만화의 한 장면과 같은 내용을 어떻게 이해해야하는가? 두 제자들의 눈이 열렸다. ‘열였다’라는 그리스 단어 ‘디아노이고’는 이전에는 그들의 눈을 가리는 마개가 있어 대상을 분명히 볼 수가 없었는데, 이제는 그 마개가 떨어졌다. 눈에서 비늘이 떨어진 것처럼, 이 낯선 자가 자신들의 스승인 예수라는 사실을 분명히 보게 되었다. 이들이 자신의 스승을 인식하여 아는 척을 하려는 순간, 예수는 눈앞에서 사라진다.

     

누가는 왜 예수가 제자들 눈앞에서 사라졌다라고 기록했는가? 왜 예수는 이들과 함께 사람들을 만나, 내가 부활했다고 자신을 보여주지 않았을까? 나는 두 가지 이유에서 누가가 그렇게 기록했다고 상상했다. 첫째는, 이 두 제자가 부활한 예수를 모시고 자신들만이 부활한 예수를 만났고, 그 예수만이 진짜라고 주장할 오만을 보았을 것이다. 한마디로 종교 장사할 가능성이 많았다. 둘째, 누가는 부활한 예수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부활한 예수는 그들이 길에서 마주친 낯선 자였다. 두 제자가 낯선 자를 그냥 지나쳤다면, 그들은 영원히 예수를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이 종교시설이나 종교교리에 갇힌 예수에 익숙했다면 그런 예수는 이미 십자가에서 죽었다. 누가는 부활한 예수를 이렇게 묘사했다. 두 제자가 생면무지의 낯선 자에게 분에 넘치는 호의를 보였을 때, 그 낯선 자는 더 이상 낯선 자가 아니라 부활한 예수다.

     

부활한 예수는 종교시설에 안주하고나 설교나 교리에 의해 정의되지 않는다. 그는 자비를 베풀 때 언제나 어디서나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낯선 자다. 낯선 자는 잠재적인 부활한 예수다. 그는 인간이 자비를 베풀 때, 잠시 등장했다 사라지는 자다. 그리스도교는 이 간결하지만 강력한 사랑의 실천으로 지난 2000년 동안 유지해왔다.

     

오늘날 종교 대부분은 철이 지난 ‘교리’를 산소마스크로 생각한다. 이젠 종교의 시대가 아니라, 개인에게 삶의 의미를 선물해 주는 영성의 시대다. 장폴 사르트르는 ‘타인은 지옥이다’라고 현대 실존주의 철학을 주장하지만, 성서는 ‘타인이 천국이다’라고 말한다. 대한민국 그리스도교가, 오래된 관습을 유기하고, 자신의 내면에 구원이 있다고 각성하고, 사랑의 실천을 발견하는 개안이 일어나면 좋겠다. 종교가 삶의 의미를 주고 교육이 살맛을 맛보게 하면, 출산율이 올라갈 수도 있다.

     

김종훈 감독님과 젊은 목사님들을 조만간 만나, 내가 지난 5년동안 실험해온 영시-한국시 암송, 글쓰기, 발표하기를 이번 여름성경학교에 감리교 몇몇교회에서 실천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기로 했다.

     

사진

<한국목회자 아카메미 2024년 봄 세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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