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2024.4.22. (月曜日) “예쁜이”

2024.4.22. (月曜日) “예쁜이”

     

내가 가평으로 이사 온 지 12년이 되었다. 그동안 삶은 파란만장하다. 글을 쓰겠다고 왔지만, 글 보다는 서울에서는 꿈도 꿀 수 없는 값진 경험을 쌓게 되었다. 이 거친 가평 삶의 중심을 잡을 수 있도록 도와준 스승들이 있다. 집에서 동거동락하는 세 마리 반려견이고, 우리 부부가 임시로 정성껏 마련한 쉘터에 살고 있는 16마리 학대견들이다. 언젠가 자연속에서 이들과 함께 지내면서, 생명교육을 할 수 있는 멋진 공간이 마련되면 좋겠다.

     

누군가 새벽에 나를 응시하고 있다. 샤갈이 두 발과 엉덩이를 바닥에 대고 앉아, 내 배에 오른 손을 얹고 말한다. ‘신나는 새 날이 왔어요. 숲으로 가서, 돋는 해를 봐요!’ 샤갈은 이렇게 새벽 점호를 실시한다. 몸집이 가장 큰 진돗개 샤갈은 12살이다. 그 옆에는 아직도 2살처럼 젊음을 유지하는 12살 진돗개벨라와, 9살 믹스견 예쁜이가 서 있다. 이들은 나를 간절한 눈망울로 나를 쳐다 본다. 나는 이들과 아침을 열기 위해, 먼저 트레드밀에 올라간다. 아직도 멍한 상태인 신체와 정신을 일깨우고 찬물 샤워를 마치면 정신이 난다.

     

또 다른 의례가 하나 남아있다. 공부방에 가면 나를 하늘로 인도할 무함마드의 백마 부룩과 같은 흰 방석이 놓여있다. 내가 가만히 몸을 올려놓고 들숨과 날숨을 고르면, 나만의 ‘통곡의 벽’이 등장하고 ‘파트네논 신전’이 나타난다. 그리고 기도한다. “내가 오늘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은 무엇인가? 그 하나를 알려주십시오!” 이 기도를 12년째 하지만 아직도 그 not-to-do 리스트를 채우지 못했다. 맨 처음에는 ‘하지 말아야 할 것들’알려달라는 기도를 한다가, 몇 년전부터는 이 기도문에 부사副詞가 하나 들어가, ‘굳이 하지 말아야 할 것’이 되었다. ‘굳이’는 오늘을 인생의 초보자로 살겠다는 결의와 오늘을 인생의 마지막 날로 살겠다는 체념이 모두 담겨 있는 바다다.

     

나 삶에 최고의 행운은 샤갈, 벨라, 예쁜이라는 인생의 스승을 만난 것이다, 8년 전, 2016년 3월 초였다. 때 늦은 눈이 내려와 제법 추운 봄날 오후였다. 샤갈과 벨라가 갑자기 대문을 향해 짖기 시작했다. 반려견들은 낯선 자들의 침입 미리 감지하고 멍멍 짖으며 알려준다. 빙하기 시대부터 익힌 습관이다. 누군가 낯선 이가 밖에 온 것이 분명하다. 우편 배달부가 오거나 길을 잘못 찾아 우연히 온 사람이 아니라면, 이 아이들이 그렇게 짖어댈 리가 없다.

     

아이들의 성화에 나는 현관을 열고 대문을 열 참이었다.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심상치 않다. 용달차의 드렁드렁거리는 소리가 난다. 과연 문을 열러보니, 왠 조그만 용달이 온 것이다. 그리고 집밖에 괴기한 광경이 펼쳐졌다. 읍내에 나갔던 아내가 조그만 용달 트럭에서 외간남자와 내리는 것이 아닌가! 순간 나는 글쓴답시고 아내를 소원하게 만들어, 이 사단이 났다고 생각했다. 순간 ‘아내에게 잘해줄걸’이란 생각이 스쳤다. 그런 사사로운 심정은 트럭 뒤 짐칸에 서 있는 이상한 생명체를 보고 금방 사라졌다.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한 채 벌벌 떨고 있는 개를 발견하였다. 그 개는 신기하게 가만히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나의 인격을 시험하는 이집트 사자의 서에 등장하는 ‘암무트’ 괴물 같았다.

     

나는 이토록 처참한 모습의 개를 본 적이 없었다. 보기가 민망하여 고개가 저절로 돌아가는 존재였다. 온몸에 핏물이 흐르고 털은 진물로 굳어 있으며 목은 상처로 깊이 패여 있고 꼬리는 한없이 배속으로 감아 보이지 않았다. 백구이지만 깡마른 하이에나처럼 보였다. 그 순간, 나는 아내를 쳐다보았다. 나는 눈길에 한없는 불만과 협박을 담아 보냈다. ‘당신, 혹시 개를 집으로 데리고 온거에요? 미쳤어요! 집안에 진돗개 두 마리가 있는데! 해도 해도 너무해요. 당신의 과유불급을 타의 추종을 불허해요. 이제 이혼합시다!’ 그러자 아내가 먼저 눈으로 공손하게 말을 걸어왔지만, 나는 그 눈길을 매정하게 피했다. 그러곤, 마치 집으로 들어와 옷을 주섬주섬 입고, 혼자 중엉거리며, 차를 몰고 서울로 가버렸다. 내 결혼생활의 첫 번째 가출이다.

     

나는 당시 ‘위대한 개인’ 시리즈로 <심연>을 출간하였고 <수련>을 탈고한 후, ‘정적’이란 글을 쓰고 있었다. 정적을 향유하기 위해, 시골로 이주해온 내 삶에 이 흉측한 개는 분명 나 삶의 걸림돌이고 생각했다 나는 그 다음 날 아침 조용히 집으로 돌아왔다. 모든 한국 남자들이 그렇듯이 달리 갈 데가 없었다. 집은 쥐죽은 듯이 고요했다. 샤갈과 벨라도 그런 싸한 분위기에 그 탐스러운 하얀 꼬리를 천천히 움직이며 반긴다. 그리고 나에게 말한다. ‘엄마가 화났어요. 몸조심하세요!’ 내가 집으로 돌아와 보니, 그 유기견은 ‘다행이’ 집에 없었다. 얼마나 안심이던지! 나는 어제 읽고 쓰는 고상한 지적인 놀이를 지속할 수 있을 것 같이 행복했다. 싸늘한 표정의 아내가 나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커피 한잔을 나를 위해, 식탁에 올려놓고 조용히 말한다. “당신은 가짜에요. 사람들에게는 컴패션이나 자비니 설교는 하는데, 실제로는 실천하지 않는 거짓말쟁이죠. 실망이에요.” 아내의 지적에 한마디도 대응하지 못했다,

     

나는 서재로 내려와 컴패션의 내용을 곰곰이 그 내용을 떠 올려보았다. 인류문명, 기술, 문화의 핵심은 타존재를 이해하고 배려하고 심지어 함께 고통을 감내하는 자비다. 이젠, 인류가 자비를 인간이라는 종에게만 적용하지 않고, 다른 동물에게도 적용할 시점이 도래했다. 인류는 예전에 다른 인종을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해왔다. 인종차별을 극복하느데 오랜 시간이 결렸다. 아직도 완전히 극복한 것은 아니다. 21세기 인류는, 한단계 넘어서야한다. 이제 다른 종, 예들 들어, 개나 고양이와 같은 동물을 차별하는 ‘종차별’의 잘못을 인정하고 극복해야 한다. 위대한 가르침의 핵심은 타인의, 타동물의 고통을 이해하고 감지하는 마음의 고양이다. 종차별 극복은 환경운동과 깊이 연관되어있다.

     

모든 생명은 지구라는 터전에서 자신의 고유한 위치를 찾기 위해 ‘고통’을 받는다. 영어단어 ‘패션’passion은 흔히 ‘열정熱情’으로 번역되는데, ‘고통을 받다’라는 라틴어 단어 ‘파티오르’patior에서 유래했다. 다른 존재의 고통(passion)을 민감하게 자신의 고통으로 함께(com) 여기는 마음이 ‘컴패션’compassion이다. 우리 주위의 고통을 받는 이웃, 더 나이가 고통 받는 동물에 대한 경각심이 ‘컴패션’이다. 패션과 컴패션은 인간의 품위를 지켜온 문법이자 혁신의 발판이다. 컴패션을 한자로는 표현하자면 ‘자비慈悲’이다. ‘사랑 자’慈는 상대방과 나와 간격이 가물가물해져 사라지고, 내가 상대방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배려다. 가물가물하다는 의미를 지닌 ‘현’玄이 두 개나 있다. 사랑은 내가 상대방한데 나의 감정을 토로하는 폭력이 아니라, 상대방의 처지를 깊이 헤아리고, 상대방이 행복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헌신이다. ‘슬플 비’悲는 상대방의 슬픈 처지와 운명에 악어눈물을 잠시 흘리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온전히 자신의 일을 찾아 행복할 수 있도록 애쓰는 마음이다. 그 사람은 내가 삶이라는 비행을 위해 꼭 필요한 다른 날개非이기 때문이다.

     

아내는 유기견을 보는 나의 시선이 반인문학적일 뿐만 아니라, 반종교적이며, 반인륜적이라고 지적한다. 나는 유기견의 처지를 자비의 마음으로 볼, 추호의 여지도 두지 않고 집을 나가버린 비겁자卑怯者였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에서 자신의 생명을 구해준 유대인(벤 킹슬리)가 쉰들러(리암 니슨)에게 건내 준 반지에 새겨진 탈무드 문구가 생각났다. “한 영혼을 구하는 것이 온 세상을 구하는 것이다.” 이 문구에서 ‘영혼’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네페쉬’로 사람뿐만 아니라, 생명이 부여된 모든 생물을 의미하는 단어다.

     

아내의 유기견 사건 이후 3개월이 무료하게 흘러갔다. 어느 날 아내는 그 유기견 이야기를 다시 꺼내었다. 그녀가 그 유기견을 읍내 마트 옆에서 먹을 것이 없어 스치로풀을 뜯어먹고 돌아다는 것을 보았다. 너무 비참하여 읍내 사람들로 돌을 던지는 그런 개였다. 아내가 그 개를 보고, 자리에서 가만히 앉아 불렀다. ‘아이야, 너무 아프지. 이리로 와 보세요!’ 눈물을 머금고 아내가 몇 번 이렇게 부르니, 놀랍게도 그 개가 다가왔다. 개는 영물이다. 사람의 진심을 바로 알아 차린다. 4만년전부터 인간과 함께 살았기 때문에, 눈치가 백단이다. 그 순간, 아내를 그 개를 구조하여 자식처럼 키워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남편인 나를 충분히 설득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즉시 개집을 구입하고 동네 트럭 운전사를 수소문하여, 개를 태우고 집에 온 것이다.

     

그녀가 나에게 숨긴 사실 하나를 고백했다. 그동안 아내는 나에게 말하지 않고 이 아이를 치료해주고 키운 것이다. 그녀는 아이 이름을 역설적으로 ‘예쁜이’라고 지어주었다. 그리고 나에게 다가오는 자기 생일날, 예쁜이를 선물로 받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동의하였다. 예쁜이가 진돗개 두 마리와 한집에 살기 시작했다. 예쁜이 오자, 샤갈과 벨라에 숨겨진 늑대 본능이 깨어났다. 그 뒤로 파란만장한 드라마가 펼쳐지기 시작하였다.

     

     

     

사진

<발견 당시 예쁜이와 요즘 예쁜이>










     

Comments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