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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4.14. (日曜日) “멍때리기”

     

2024.4.14. (日曜日) “멍때리기”

     

(송길원목사님께서 오래전에 ‘비욘드 명상’이라 책을 쓰시면서 글을 하나 부탁하셨는데, 차일피일 미루다 거의 1년이 지났습니다. 이제야 ‘멍때리기’라는 글을 써보았습니다. 제가 진행하고 있는 ‘출애굽기성경공부’의 마지막 수업을 송목사님이 주관하시는 하이패밀리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 기도 양평군 서종면 잠실2길 35-55)에서 진행합니다)

     

멍이란 단어가 있다. 그 어원을 추적할 수 없는 신기한 단어다. 이 단어의 품사는 명사인 것 같다. 예를 들어 ‘너는 멍청해’라든지, ‘너, 지금 멍을 때리고 있는거야?’와 같은 문장에서 ‘멍’이란 단어는 동사를 부리고 있기 때문이다. ‘멍하다’라는 말은, 어떤 사람이 일상적인 대화가 불가능할 정도로, 정신 줄을 놓은, 반이성적인 상태를 의미한다. ‘멍’이 지닌 의미를 파악하기에 좀 더 많은 정보를 주는 문구인 ‘멍때리다’를 들여다봐야 한다. 이 문장은 우리 몸에 숨어있는 한 부분인 ‘멍’을 작동시킨다는 의미다.

     

위에서 언급한 비가시적인 멍과는 다른 눈으로 볼 수 있는 가시적인 ‘멍’이 있다. ‘팔에 멍이 들었어!’와 같은 문장에 사용된 멍이다. 이 멍은 외상을 통해 피부에 상처를 입었을 때, 피가 스며들어 세포조직에 일어나는 내출혈이다. 이 멍은 신체적인 상처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충격으로 남아있는 마음의 후유증을 지칭할 때도 사용된다. 예들 들어, ‘너의 막말은 내 마음을 멍들게 해’와 같은 문장이다. 신체적인 멍이나 마음의 멍은, 피해자가 스스로 원래 상태로 회복하려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멍때리기’는 누구나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멍을 자신도 모르게 가만히 바라보는 내면응시內面凝視다. 이것은 온전한 인간으로 거듭나기 위한, 자연스러운 몸부림이다. 이 멍은 시간이 지나면서 무의식의 세계로 하강하여,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다. 인간이 이 멍을 잘 다스리면, 면역력이 생겨 이전보다 건강해진다. 그러나 이 멍을 숨기면 마음의 병이 되어, 건강한 자신을 해치는 괴물이 된다. 이 괴물은 번뇌가 되어 좀처럼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마음의 미로에 숨어, 사사건건 그 사람의 발목을 잡는다.

     

성서에 정신적으로 발뒤굼치를 잡혀, 일생 고통스럽게 산 한 인간이 등장한다. 야곱이다. ‘야곱’은 히브리어로 ‘발뒤꿈치’다. 항상 뒷전에서 남이 시키는 대로만 행동하는 수동적인 인간이다. 어머니 레베카의 편애 대상이 되어, 그녀가 시키는 대로, 아버지를 속이고 일생 도망자로 살았다. 그는 수십년전에 아버지 이삭을 속여 형 에서에게 마땅히 가야 할, 재산과 명예를 훔쳤다.

     

 그는 인생 말년에 자신의 어두운 과거의 대면하고 형의 용서를 구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형 에서의 용서를 얻기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재산과 심지어 가족까지 미리 보내, 형의 분노를 누그려 뜨리려서 시도하였다. 그는 홀로 그 강가에 앉아, 자신이 누구인지 깊이 고민하기 시작하였다. 한마디로 가만히 ‘멍’을 때리고 있었다. 밤하늘에 별이 총총 등장하고 노란 보름달은 야곱의 불안을 가중시켰다. 멀리서 들려오는 늑대의 울음소리는 그를 불안에 떨게 만들었다. 야곱이 가만히 자신의 과거를 주마간산처럼 뒤 돌아 보았다. 형 에서를 속인 사건은 일생 그에게 일생 치유할 수 없는 멍이었고 거의 암덩이가 되었다.

     

야곱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자리잡은, 이 열등감과 죄책감과 마주하였다. 그 순간에, ‘한 존재’가 갑자기 등장한다. 일상에서는 볼 수 없는 존재다. ‘멍을 때려야만’ 나오는 존재다. 우리는 이 존재를 천사 혹은 신이라고 부른다. 야곱은 이 존재와 새벽까지 씨름한다. 야곱은 자신이 ‘발뒤꿈치’가 아니라 ‘누군가’가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콤플렉스를 잡고 씨름한 것이다. 그 존재는 자신을 붙잡고 놓아 주지 않는 야곱에게 새로운 이름을 준다. ‘이스라엘’이다. 이스라엘은 ‘신과 씨름하여 이긴 자’라는 뜻이다.

     

야곱이 이스라엘이 변모하기 위한 과정에 얍복강가에서 자신을 가만히 응시하는 관조, 즉 ‘멍때리기’가 있다. ‘멍때리기’의 다른 이름은 명상冥想과 묵상默想이다. 멍때리기는 빛과 소리가 거의 사라진 어두운 시간과 장소(冥)로 들어가, 고요히 자신이 되고 싶은 자신을 상상하는 연습이다. 멍때리기는 변모를 간절하게 원하는 자를 방해하기 위해 무시무시한 개(默)가 등장하여 짖어도 가만히 앉아, 자신이 되어야만 하는 인간을 상상하는 것이다. 멍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멍은 자신의 잠재력을 회복하려는 간절한 ‘여유餘裕’의 장소다. 멍은 일상이라는 소용돌이에 몰리다 보면, 정작 내가 완수해야 하는 일을 망각했을 때, 자신도 모르게 찾는 공간이다. 모든 인간은 어머니 뱃속에서 눈을 감은 채 어머니의 심장 소리만 들으면서 10개월을 지낸다. 멍은 다시 어머니 뱃속으로 들어간 깊은 잠을 청하고 싶은 모든 인간의 원초적인 열망이다. 멍은 인간의 마음속 깊이 숨겨져 있는 진주와 같다. 바다 표면에 출렁이는 파도를 잠재우지 않으면, 그 안에 진주를 찾을 여유도 없고 찾을 힘도 없다. 멍은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출렁이는 마음을 잠잠하게 만들어 그 진주를 찾으려는 준비다.

     

이 여유는 마치 투우장에 나서기 전 투우가 쉬는 공간인 ‘퀘렌시아’(querencia)다. 소설가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투우를 통해 공포와 패기를 찬양했던 <오후의 죽음>이란 책에서 나오는 용어다. 헤밍웨이는 말한다. “퀘렌시아는 황소가 자신도 모르게 들어가고 싶은 장소, 원 모양의 구별된 공간이다. 이곳은 황소가 투우 과정에서 자연히 만들어지는 장소다. 퀘렌시아는 당장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싸움이 진행되면서 황소의 머리에 자연히 떠오르는 곳이다. 지친 황소는, 그곳으로 달려가, 가만히 자신의 등을 기댈 수 있다. 이 고요한 퀘렌시아에서, 황소는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힘을 지녀, 투우사가 도저히 살해할 수 없는 괴물이 된다.” ‘퀘렌시아’의 어원을 찾아보면 그 의미를 추측할 수 있다. 퀘렌시아는 ‘추구하다; 찾아 나서다’란 의미를 지닌 ‘퀘스트’와 같은 어원에서 왔다. 황소는 자신의 심연에 숨겨진 자신만의 보물을 발견하고 새 힘을 얻고, 그것을 위해 목숨을 내놓고 찾아 나선다. 멍은 인간을 초인으로 변신시키는 자신만의 퀘렌시아다.

     

둘째, 멍은 간절한 ‘빈둥거리기’의 시간이다. 19세기 미국은 유럽과는 다른 철학이 필요했다. 미국만의 새로운 문화를 구축하기 위해 초등학교 밖에 나오지 않는 훨트 휘트먼이 미국 정신의 독립선언서를 ‘자기 자신을 위한 노래’(Song of Myself)란 시로 표현한다. 그는 이 시의 첫 단락에서 자신만의 ‘멍때리기’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I loafe and invite my soul.

I lean and loafe at my ease observing a spear of summer grass.

‘나는 빈둥거리다가 내 영혼을 초대합니다.

나는 편하게 풀밭에 기대어 빈둥거리다가, 여름 풀잎을 관찰합니다.”

     

’빈둥거리기‘는 타인이 부과한 일을 하루종일 처리하느라 지친 몸을 이끌고 마침내, 자신만의 시공간에서 정신을 추스르고, 자신이 해야 할 한 가지를 자연스럽게 떠올리는 영혼을 작동시키는 운동이다. 사람이 파란만장이라는 인생학교에서 수련을 하면, 자신의 시선을 외부가 아니라 내부로 돌린다. 그런 후, 자신과는 상관이 없는 신이나 이념을 숭배하지 않고, 자기-자신이 칭찬의 대상인지 혹은 비난의 대상인지를 가만히 살펴보기 시작한다. 타인과의 화는 이해를 증진시키지만, 침묵은 천재天才를 양성하는 학교다. 천재적인 시인, 성인, 소설가, 작곡자 그리고 화가와 조각가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홀로 지낸다. 사람들은 흔히 다른 사람들과의 교재와 친분이 행복을 가져다 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천재들의 삶을 살펴보면, 정반대다. 고독은 그들에게 천재성을 키워주는 천사다.

     

인간은 누구나, 천재다. 다만, 자신에게 주어진 유일무이한 임무를 찾지 못해 주위가 좋다고 세뇌를 시킨 일을 반복적으로 한다. 진정한 행복을 위한 신명神明이 그들에게 일어나지 않는다. 신명과 조우하지 못한 보통 인간이 시간을 허비하는 방식은 ’나태懶怠‘다. 나태는 흉내와 부러움에 중독된 인간이 하루를 흘려보내는 방식이다. 인간이 자기혁신을 위해 구별된 공간과 시간에 들어가, 마음 속 깊은 곳에 은닉된 괴물이자 천사인 자기자신自己自身을 깨워야 한다. 멍때리기는, 자기-자신을 일깨우는 준비다.

     

휘트먼은 이 준비는 ’로프‘loafe라는 영어단어로 표현하였다. 흔히 ’빈둥거리다‘라고 번역되는데, 그 의미는 더 심오하다. ’로프‘는 ’빵 한 뭉치‘를 의미하는 ’로프‘loaf와 같은 어원에서 조어되었다. ’빈등거림‘은 자신의 신체, 정신, 영혼을 유지할 수 있는 일용한 양식을 획득하기 위한 수련이다.

     

셋째, 멍은 영생의 경험이다. 영생은 온전한 인간으로 거듭나기 위해서, 누구나 진입해야 할 심연深淵에서 경험할 수 있는 순간이다. 인간 문명과 문화는 이야기가 만들어 낸 예술작품이다. 인류가 만들어낸 최고의 이야기는 기원전 26세기 우룩의 왕이었던 ’길가메시‘에 관한 이야기다. 길가메시는 신이 되고 싶었다. 그는 신만이 소유한 불멸不滅을 찾아 바닷속 깊은 곳에 있다는 죽음의 세계로 내려간다. 그가 우여곡절 끝에 지하세계로 내려가 대홍수에서 살아남아 신처럼 영생을 살고있는 ‘우트나피시팀’을 만난다. 우트나피시팀은 야곱에게 7일동안 잠을 물리치고 깨어있을 수 있다면,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지하세계로 내려오면서 탈진한 길가메시는 7일동안 쿨쿨잔다. 우트니피시팀은 잠에서 깨어난 길가메시를 보고 측은하게 여겨, 페르시아만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불로초의 존재를 알려준다.

     

길가메시는 뱃사공 우르샤나비와 함께 페르시아만 한가운데로 가서, 자신의 말에 돌을 묶고 바닷물이 처음 생성된 그 심연으로 내려가 불초노를 딴다. 길가메시가, 물에서 나오자 마자, 불로초를 먹었다면, 우트나피시팀 다음으로 영생을 누리는 자가 되었을 것이다. 길가메시는 우룩으로 돌아와 나이가 들고 기력이 쇠해지면 먹겠다고 다짐한다, 그가 우룩으로 돌아오는 길은 멀었다. 그는 작열하는 햇빛을 피해, 오아시스로 들어가 잠시 목욕을 즐긴다. 그때, 뱀이 등장하여, 물가에 남겨준 옷가지 옆에 놓인 불로초를 먹고 껍질만 남긴 채 사라져버렸다. 길가메시는 영생은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라, 순간을 영원처럼 만드는 기술이란 사실을 깨닫는다.

     

12개의 토판문서로 구성된 <길가메시 서사시>의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한다:

     

“나라의 기초인 심연深淵을 경험한 사람”

     

길가메시가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옷을 벗고 깊은 바다로 잠수하였다. 아무것도 들이지 않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심연이 바로 멍이다. 심연은 길가메시가 다시 태어나기 위한 어머니 뱃속이다. 그는 그곳으로 들어가 다시 태어난다. 불로초는, 모든 것을 희생해서라도, 그것을 획득하려는 사람의 간절한 바램과 행동이다. 불로초는 불로초를 쟁취하려는 시도이자 과정이다.

     

인간의 많은 문제들은 고독하지 않고 침묵하지 않기 때문에 생긴다. 요즘과 같은 SNS시대에는 더욱 그렇다. 우리 모두가 지금이라도 구별된 시간과 공간에서 자신을 응시하여 ‘멍’이란 아픈 자신을 감싸고 우리의 천재성이 잠자고 있는 ‘멍’을 고요하게 때릴 시간이다.

     

사진

<야산에서 황홀경을 경험하고 있는 수피>

이란 이스파인 무명화가 1650-1660

잉크와 수채화, 27.4 × 17.3 cm

Los Angeles County Museum of Art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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