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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3.12.(火曜日) “beyond”

2024.3.12.(火曜日) “beyond”

     

뒷산 산책길에 우리의 진입을 막는 괴물들이 있다. 지난 겨울 폭설에 넘어진 전나무들이다. 두 그루가 넘어져 있다. 나는 우리가 통과할 수 있도록, 가지들을 제거하였다. 반려견들을 쉽게 통과하지만, 나는 몸을 구부려, 기어서 통과해야만, 산책이란 사치를 누릴 수 있다. 그 경계를 넘어도 가파른 경사의 야산이 등장하지만, 이 나무들은 산책을 위한 첫관문이다.

     

첫관문은 그 다음 너머 세계를 가기 위한 첩경이다. 영어 전치사 ’비욘드‘는 ’너머‘를 상징하는 전치사다. 비욘드는 진화이며 전진이고 구원이다. 새끼 거북이가 자신이 마련한 임시 치아로 알을 깨고 나오지 못한다면, 죽음이다. 지구에 살고 있는 모든 동물이나 식물은, 자신이 뿌리는 내린 어두운 장소를 떠나 박차고 나오지 않는다면, 죽는다. 그 경계는 높고 험해, 선택된 영웅만이, 넘어갈 수 있다. 영웅이란, 자신의 안주에 불만을 느끼고, 그 아지트를 떠나 높다란 경계 성벽을 넘기 위해, 준비하는 자다.

     

모세는 자신의 고향 이집트에서 살인을 저지르고 시내반도를 지나, 미디안으로 땅으로 들어와 정착하였다. 그곳에서 장가도 가고 자식을 낳았지만, 정착할 수 없었다. 그는 목동으로 40년간 광야에서 지나면서, 천체의 움직임과 사막에서 살고 있는 동물과 식물들의 생존방식을 관찰하였다. 그에겐 이제, 모든 것이 섭리이고 기적이었다. 풀 한포기도 기적이고, 야생 염소의 뿔도 신의 조각품이었다. 그는 이제 넘어가야만 한다. 출애굽기 3장은 모세의 넘기를 통해 발견한 자연속에 감춰진 신비를 기록한다. 1절은 이렇게 시작한다.

     

1행. “모세는 미디안의 사제인 이드로의 양떼를 치는 목동이었다. 그가 광야의 뒤편으로 양떼를 몰고 갔을 때, 그는 하나님의 산, 호렙 안으로 들어갔다.”

     

*모세는 파라오가 지배하는 이집트를 떠나, 미지의 땅 미디안으로 들어가, 다시 낯선 자로 살게 되었다. 그는 낯선자의 신세에서 다시 이중적으로 낯선 자가 되었다. 인간은 그런 곳에서, 주위와 자신을 생경한 눈으로 관찰할 수 있다. 모세는 그곳에서 우주와 자연의 섭리를 관찰하고, 이것들을 작동시키고 약동시키는 무명의 신을 ‘친구’로 섬기는 사제, ‘루우엘’의 환대를 받고, 그의 딸 십보라와 결혼하여 아이를 낳았다. 십보라는 늘 지저귀는 새와 같은 여인이었다.

     

모세는 아침이면 이드로의 양떼를 몰고 나가 저녁이면 돌아오는 미디안 광야의 목동이었다. 하루하루 매일 하는 일이 모세의 품격品格을 만들었다. 모세는 이 경계의 땅에서 40년간 지내면서, 자신으로부터 다시 태어나고 있었다. 그는 나일강 위에 애처럼고 위험하게 떠 있던 바구니에서 육신의 존재로 태어났지만, 미디안 광야에서 40년동안, 서서히 변모하기 시작하였다. 이집트의 왕자로 주어진 운명이 아니라, 자신이 발견해야 할 자기-자신을 발견하고 발굴하는 자기-혁명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런 수련의 길에 들어선 사람에게 40년은 순간이다. 아니 인생도 순간이다.

     

어느 날, 갑자기, 양떼를 몰고 매일 가는 광야에 난 길로부터 이탈한다. 지난 40년동안 자신과 양떼가 풀을 찾아 가던 지상의 오아시스로 가는 길에서 떠난다. 그가 새로운 길에 들어선 것이다. 단테가 말하는 ‘어두운 숲’ 속으로 진입하여, 자신을 찾기 시작하였다. 아득한 벌판인 ‘광야曠野’는 범인에게는 타부의 공간이다. 이웃이나 친구가 있어야 외롭지 않는 사람에겐 광야는 지옥이다. 지옥은 수치스러운 자신을 마주하는 시공간이다. 그 지옥은 자기정화의 연옥으로 가는 유일한 길이며, 내가 도달해야 할 천국으로 가기 위한 피할 수 없는 정거장이다.

     

광야는 위험하다. 작열하는 햇빛을 막아줄 그늘이 없고, 들짐승은 호시탐탐 양떼를 습격하기 때문이다. 예수는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광야에서 악마로부터 통과의례 시험을 치러야했다. 모세가 초원을 찾아 나오면, 적어도 10일 이상 고되게 돌아다녔다.

     

‘광야’라는 히브리단어는 ‘미드바르’란 ‘다바르’dabar가 있는 공간mi이란 뜻이다. ‘다발’이란 ‘신의 말씀’이란 뜻과 ‘그 말씀이 실제로 일어난 현실’이란 뜻을 모두 포함한다. 광야란 ‘머나먼 땅’으로, 자신이 지니고 있는 과거 정체성을 벗어버리고, 무명씨가 되어, 자신의 이름을 바꾸는 혁명의 장소다. 광야는 자신으로 다시 태어나는 시공간이다. 모세는 이곳에 홀로 온 것이 아니다. 갈 길을 알지 못하는 양떼에게 꼴을 먹이기 위해 왔다. 자신만 잘 먹고 잘살겠다는 이기적인 이유로 진입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믿고 따르는 무리를 위해 목숨을 내걸었다.

     

모세가 양떼들에게 말했다. “이제 우리가 저 광야를 넘어서, 그 끝에 있는 산에 올라가 보자!” 모세는 양떼를 이끌고, 광야를 넘어 ‘그 뒤편’으로 진입하였다. ‘그 뒤편’을 의미하는 ‘아할’이란 히브리어 전치사는 일상공간과 타부공간을 구분 짓는 높다란 담벼락이며, 한치의 빛도 한 점의 소리도 존재하지 않는 어두운 숲이다. 모세가 광야의 끝을 넘어서 이상한 공간으로 들어갔다.

     

그 너머에는 누구도 입장해 본 적이 없는,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산인 ‘하르 하-엘로힘’ 즉 ‘그 하나님의 산’이 나온다. 모세는 한순간도 정지하지 않고 넘실대는 6,500km 나일강에 떠 있는 바구니에서 태어났지만, 이젠, 나일강의 길이보다 더 높은 산으로 등산해야 한다. ‘그 하나님의 산’을 다시 번역하면, ‘지상에게 가장 높은 산’ 혹은 ‘인간이 진입할 수 없는 산’이다. 이 산의 뿌리는 땅속 깊이 있으면서, 그 정상은 하늘에 있다.

     

성서 저자는 이 산을 ‘호렙’이라고 불렀다. ‘호렙’은 ‘작열하는 태양열로 바싹 마른, 뜨거운 장소’라는 뜻이다. 혹은 ‘태양’이란 의미도 있다. ‘호렙산’은 다른 저자에 의해 ’시내산‘으로도 불린다. 시내산은 바빌로니아 달의 신인 ’신Sin’에서 유래했다. 광야를 낮에는 태양인 ‘호렙’이 지배하고, 밤에는 달인 ‘시나이’가 지배한다. 모세는 과거에 가장 낮은 곳인 ‘나일강’에서 태어났지만, 이젠 그가 가장 높은 곳인 ‘호렙산’으로 들어갔다. 40년의 광야생활을 통해, 모세가 정신적으로 고양되고 영적으로 승화된 것이다.

     

이 산은 지도에서는 찾을 수 없는 ‘테라 인코그니타’terra incognita다. 그곳에는 상상하지도 못하는 짐승이 등장하여, 그의 목숨을 앗아갈 수도 있다. <길가메시서사시>에 등장하는 레바논산의 훔바바처럼, 거룩하지도 않으면서 거룩한 산에 진입하려는 인간을 죽일 것이다. 이 산은 에베레트스 산보다 더 높고, 나일 강보다 더 긴, 우리 마음 속 가장 깊은 장소, 심연에 은닉된 ‘인식되지 않는 경지’다. 그 경지를 거룩하게 만드는 요소는, 경지의 존재를 깨달아 믿는 계사다. 장소는 고정된 장소가 아니라, 내가 어디에 있던지, 마음 속에서 발견될 수 있는 ‘마음의 호렙산’이다.

     

그렇게 오른 산엔 일상에서는 볼수 없는 존재가 등장하기 마련이다. 아니, 개안된 눈으로 그런 존재를 오감이 아닌, 영감으로 마주하게 된다. 출애굽기 3장 2절은 다음과 같다:

     

2. “야훼의 전령이 그에게 가시덤불 가운데 불꽃에서 나타났다. 그가 보니 가시덤불이 불에 휩쌓였지만, 그 가시덤불은 타 들어가지 않았다.”

     

*모세는 금지된 공간으로 들어갔다. 거기는 에덴동산이다. 그곳에는 인간들이 만든 위-아래, 상하좌우 구별이 없다. 하늘이 땅이고 땅이 하늘이다. 신이 인간이고 인간이 신이다. 나가 타인이고 타인이 나다. 이 모든 것을 하나로 연결시켜주는 것이 사랑이다. 위 구절에서 등장하는 ‘ 신의 의중을 전달하는 전령’도 동시에 신이다. 모세가 양떼를 데리고, 산을 오르기 시작한다.

거기에 훔바바와 같은 문지기인 ‘야훼가 보낸 전령’이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다. ‘야훼가 보낸 전령’이란 표현은 소위 완곡어법이다. 야훼가 아직 수련이 되지 않은 모세를 직접 만나는 것이 가당치 않기 때문이다, 성서 저자는 ‘야훼의 천사’가 모세를 만났다고 기록한다. ‘야훼의 전령’은 결국 ‘야훼’라는 뜻이다.

     

야훼가 모세를 만나기 위해서 정한 장소가 놀랍다. 그는 모세를 이도로 사제의 신전이나, 이스라엘 족장인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관련이 있는 지역에서 조우하지 않았다. 야훼는 그 장소를 바람이 불면 이리저리 날라 다니는 사막의 가시덤불로 정했다. ‘가시덤불’은 물이 한방울도 나지 않는 사막이나 산에 자라나는 rubus santus다.

     

이전의 족장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모두 돌을 가지고 제단이나 돌 기둥을 만들고 성소를 구축하였다(창세기 12.9; 28.18-22). 돌은 영속적인 장소를 표시하는 물건이다. 야곱은 ‘마째바’라는 돌 기념물을 다음 세장소에 만들었다: 베델 (하나님의 집), 갈에드 (증언의 언덕), 그리고 라헬이 죽고 묻힌 베들레헴(곡창지대). 이 장소는 모두 후에 성소가 된다. 모세도 시내산에 제단과 12개 돌을 시내산에 세우지만 (출애굽기 24.4), 예배를 위한 영속적인 장소는 아니다. 가시덤불은 일시적이다. 결국 말라 비틀어져 죽기 때문이다. 가시덤불은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들 수 있는 장소가 아니다.

     

위 문장에서 ‘가시덤불’을 의미하는 히브리 단어 ‘스네’가 네 번 등장하였다. ‘스네’는 시내산동음이어homonym다. 가시덤불은 최소한의 물으로 생존하기 위해, 잎을 줄이고 줄여 딱딱하고 날카로운 가시로 변모시킨다. 야훼는 그 가시덤불의 붙은 불의 끝에 달려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불꽃은 살아 있으면서도 한가지 모양으로 고정되어 있지 않다. 야훼는 가시덤불의 가시을 자신의 거주자로 삼고, 불꽃에 강림하셨다.

     

여기에 신기한 현상이 등장한다. 가시범불이 타들어 가지 않았다. 야훼를 상징하는 불이 히브리인들과 그들의 견뎌야하는 고통을 상징하는 가시에 붙었지만, 가시덤불을 태우지는 않는다. <시편> 91.15에 “히브리인들이 환난을 당할 때에, 내가 그와 함께 하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할 것이다”라는 구절처럼, 야훼가 그들과 함께 강력한 불로 임재하지만, 그들을 해치지 않는다는 상징이다. 이불은 <출애굽기> 24.17에 다시 등장한다: “야훼의 영광이 이스라엘인들이 보는 가운데, 맹렬한 불로 나타나셨다.”

     

가시덤불은 우리의 보잘것없은 히브리인들과 그들의 일상을 상징한다. 가시덤불은 광야에서 살아남기 위해 과거에 물이 흘렀던 와디에 뿌리를 내리고 기적적으로 생존한다. 야훼는 그곳에 찾아와 터전을 잡는다. <출애굽기> 2.25절에서 이미 말한대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인들 마치 자식처럼 마음에 두고 하루 종일 노심초사 걱정한다. 모세는 이 신비한 현상을 감지하고 호기심이 발동하여, 가시덤불 뒤편으로 돌아갈 참이다. 출애굽기 3장 3절은 다음과 같다:

     

3. “모세가 말했다. “내가 돌아가서 이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광경을 봐야겠다.

‘왜, 저 가시덤불은 불타없어지지 않는 것일까?’”

     

모세는 불이 붙었는데 불타 없어지지 않는 가시덤불을 마침내 보게 되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과학을 넘어선 세계를 처음으로 보게된 것이다. 이 세상에는 인간이 도저히 알 수 없는 사실로 가득차 있다. 왜 137억년전에 빅뱅으로 우주가 생겨났는지? 왜 50억년전에 원-화성이 지구와 부딪혀, 지구는 기울어지고, 그 때 떨어져나간 돌들이 중력으로 뭉쳐 달이 되어, 지구가 생물이 살 수 있는 유일한 행성이 되었는지, 왜 6500만년전에 거대한 돌이 지구에 떨어져, 당시 우글거리던 공룡이 사라지고, 후에 인간이란 종이 번식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했는지? 왜 1억5천만km나 떨어진 햇빛이 매일 아침 나를 찾아와 새벽을 선물하는지? 왜 인간은 잠을 자야하는지? 왜 남자는 화성에서 오고 여자는 금성에서 왔어야만 하는지? 왜 원수는 자식으로 태어나, 우리에게 자비를 수련하라고 하는지? 어떻게 나무와 꽃이 생기는지? 어떻게 새끼거북이가 알을 스스로 깨고 나오라고 임시치아를 스스로 장착했는지?

     

모세는 광야에서 40년동안 양을 치면서, 자연의 섭리를 조금씩 보게 되었다. 그는 이제 호렙산 뒤편에 오를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소크라테스처럼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고 고백하면서, 질문質問하기 시작한다. 질문이란 자신의 가장 소중한 목숨을 내놓고, 문을 통과할 때, 스스로에게 중엉거리는 고백이다. 모세는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일상을 새로 발견하고, 그 경계 위에 올라선 것이다. 그 경계에 올라설 때, 자신의 가슴에 솟구치는 감정이 숭고崇高다,

     

‘숭고’라는 단어와 그 단어가 품은 가치는 18세기에 등장하여, 근대와 현대인의 삶을 규정하고 상승시키는 개념이 되었다. 영어로는 ‘서브라임’sublime이라고 부르는데, 그 어원적인 의미는 ‘리멘’(limen) ‘아래서’(sub)이 혹은 ‘넘어서’(super)라는 의미다. 새로우면서 낯선 자신을 발견하고 그것에 놀라 불안한 상태를 의미하는 단어가 ‘리멘’limen이다. 리멘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장소인 ‘현관玄關’과 같다. 불안하지만 반드시 거쳐야하는 마음의 상태다. 그런 불안한 자신을 응시하고 자신 안에서 최선을 찾으려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은 이미 숭고하다. 그는 자신만의 별을 발견하고 묵묵히 걸어가기 때문이다.

     

‘숭고’는 인간이 인식 가능한 경계를 너머 선 어떤 것, 흔히 ‘위대함’을 바라본다. 숭고는 오감을 통해 그 일부를 느낄 수 있고, 도덕적이거나 이성적으로 인정할 수도 있고, 형이상학적이나 미적으로 감지될 수 있고, 예술적이나 영적으로 매력적인 어떤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숭고는 인간의 숫자와 언어를 통해 측량되거나 표현될 수 없고 더욱이 흉내 낼 수 없는 묘한 것이다.

     

영국의 보수주의 정치가이며 사상가인 에드먼드 버크(1729년-1797년)는 <숭고한 것과 아름다운 것에 관한 우리의 관념 기원에 대한 철학적 고찰>(1756)이란 저작에서 서양철학의 핵심주제인 ‘아름다움’에서 ‘숭고’라는 개념을 별로도 분리하여 구분하기 시작하였다. 아름다움은 빛이 어떤 대상에 비추어 객관적인 정보를 제공한다. 그러나 빛의 부재인 어둠은 대상의 관찰 자체를 제거해 무의미와 혼동을 야기하고 그 대상에 대한 경외와 공포를 조장한다. 숭고와 아름다움의 관계는 상호배타적이지만, 이 둘 다 쾌락을 제공한다. 숭고는 공포를 자아내지만, 자신이 그 대상에 관한 인식이 조작됐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만들어 유쾌를 선사한다.

     

버크는 이전 철학자들의 주장을 전복시킨다. 특히 플라톤이 <향연>에서 정의한 ‘아름다움은 즐거운 경험’이라는 명제를 뒤엎는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예술형태의 기능은 관찰자의 즐거움을 고양시킨다고 말한다. 그는 또한 ‘추함’이란 개념을 만들어 추한 작품은 관찰자에게 고통을 준다고 기록했다. 그는 <시학>에서 고대 그리스 비극작품들을 분석했다. 비극적인 이야기는 인간에게 공포와 연민이라는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자신들 안에 숨겨진 제거해야 할 감정들을 배설하는 쾌락인 ‘카타르시스’를 경험시킨다. 아리스텔레스의 추함 개념을 이어받아 로마 신학자 어거스틴은 아름다움을 창조물 안에 존재하는 신의 은총으로, 추함을 은총의 부재로 설명했다. 버크는 숭고가 가져다주는 생리적인 반응, 즉 그 대상에 대한 공포와 동시에 그 대상에 대한 ‘매력’이라는 이중적인 감정을 연구했다. 그는 숭고를 ‘아픔이 부재한 상태’라고 설명한다. 그는 이 상태를 ‘즐거움(delight)'이란 단어를 통해 표현했다. ‘즐거움’이란 숭고한 대상과의 만남을 통해 야기되는 고통의 제거에서 드러난다. 즐거움은 사적이며 나만의 취미다.

     

독일철학자 쇼펜하우어는 버크의 ‘숭고’개념을 발전시킨다. 그는 <의지와 표상으로서 세계> (1818년)라는 책 단락 39에서 ‘아름다움’과 ‘숭고’와의 관계, 전이과정 그리고 차이에 주목했다. 아름다움이라는 감정은 관찰자를 그 자신의 개인성을 초월하여 관찰대상으로 다가오기를 바라는 친절한 초대에 기꺼이 반응할 때 생기는 어떤 것이다. 그러나 숭고의 감정은 관찰대상이 관찰자를 초대하지 않는다. 그 대상은 스스로에게 몰입되어 있어 외부의 관심이나 시선엔 아랑곳하지 않는다. 오히려 관찰자의 경계 안으로 무단으로 침입해 그가 지닌 외부를 인식하는 체계를 허문다.

     

숭고의 감정을 일으키는 대상은 인간이 이해하기엔 너무 광대하고 강력해 관찰자를 파괴하고 우주 안에 존재하는 한낱 먼지로 전락시킨다. 우리가 광활한 사막 한가운데에서 밤하늘의 셀 수 없는 별들을 보았을 때 느끼는 감정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육체적 자극과는 달리, 미적인 묵상을 순간에 요구하고 이내 사라져버린다. 그는 아름다움과 숭고의 감정을 다음 여섯 단계로 구분하여 설명했다. 첫째, 미적인 감정은 관찰자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상냥한 대상을 단순히 볼 때 생긴다. 빛이 장미를 비춰, 관찰자의 눈으로 들어올 때 생기는 감정이 아름다움이다. 둘째, 숭고의 약한 감정은 빛이 돌을 반영할 때 생긴다. 관찰자가 자신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 돌을 본다. 이 돌은 장미와는 달리 무생물로 스스로 변화하지 않고 외부의 환경에 의해 변한다. 셋째, 숭고의 약한 감정은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드넓은 사막이다. 사막은 관찰자의 삶을 유지할 수 없는 물건이다. 넷째, 변화하는 자연이 주는 숭고다. 인간은 자신에게 불편함이라 공포를 자아내지 않는 자연, 예를 들어 강이 굽이쳐 흐르고 동물들이 초원에서 유유자적 뛰노는 광경을 볼 때 생기는 감정이다. 다섯번째, 파괴적이며 압도적인 자연이 주는 숭고다. 예를 들어 이과수 폭포수 밑에서 온몸으로 물을 받을 때 느끼는 감정이다. 여섯째, 온전한 숭고의 감정으로, 예를 들어 루이 암스트롱이 달에 도착한 후 지구를 보았을 때 느낀 감정과 같은 것이다.

     

세상은 객관적인, 측량할 수 있는 ‘아름다움’을 넘어선 주관적이며, 측량할 수 없는 ‘숭고’로 가득 차있다. 마당에 파릇파릇 머리를 내밀기 시작한 풀이 신비하다. 온갖 추위와 먼지를 이기고 빛을 보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핸드폰 넘어 들려오는 어머니의 ‘잘 있지’라는 목소리가 숭고하다. 아들에 대한 간절한 사랑이 들어있다. 오늘 저녁에는 총총 올라오는 별들을 나의 응시를 기다린다. 그리고 아낌없이 숭고라는 감정을 선물한다.

     

숭고는 인간에게 다음 세가지를 선물한다. 모세가 본 ‘이 엄청난 광경’은 신적인 아우라 세자기를 지녔다. 그 첫 번째 초월적인 힘은 신비神祕mysterium이다. 신비는 무한한 우주의 정체성이자, 자연과 생명에 대한 경외의 표식이다. 인간은 이성 안에서 세상을 헤아리려 노력한다. 그리고 이성 안에서 수학적 공식으로 정리할 수 있는 것을 참이라고 가정한다. 그러나, 그 정리 밖을 거짓이라고 추정한다. 그러나 무한한 자연과 우주는 인간의 숫자안에 갇힐 수 없다. 인간의 숫자를 초월하는 무한한 우주 안에서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무한한 세계가 있다. 만일 이 동물이, 신비를 망각하고, 자신이 우연히 안 세계가 진리하고 주장하기 시작하면, 그는 과학근본주의자로 타락한다.

     

모세는 일상의 오랜 수련을 통해, ‘그 넘어’에 진입할 수 있었다. 그 너머의 신비한 세계는, 일상의 오랜 수련이 가져다주는 신의 선물이다.

     

사진

     

<산책을 막는 전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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