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3.11.(月曜日) “수水”
오늘 아침 산책코스는 화전민터다. 연인산 지류, 야산 언덕에 화전민이 떠난 터만 남겨져 있다. 시바 믹스견인 ‘예쁜이’는 7살인데, 차에 오르는 것이 힘들었는지, 승차하지 않겠다고 마당에서 버틴다. 예쁜이의 의견을 존중하고 오늘은 우리 셋만 아침 의례儀禮를 떠났다. 마당에 깔린 나무 데크에 하얀 서리가 내려앉아 미끄러웠다. 봄은 왔는데, 이 산골에는 아직 새벽에는 겨울이다. 나는 샤갈과 벨라를 뒷좌석에 태우고 6.5km 시골 도로를 달렸다. 집에서 떠날 때 온도는 0도였는데 도로로 내려오니 금방 영상 3도가 되었다.
샤갈이 승차하면, 항상 뒷좌석 창문 밖으로 머리를 내민다. 지난밤에 이 거리에서 일어난 일들을 코로 상상하면서 눈썹과 첫눈보다 흰털을 날리며, 자신의 행복한 지금을 만끽한다. 벨라는 주위를 볼 틈이 없다. 언제나 정면을 응시한다. 전형적인 진돗개다. 우리가 가는 곳이 안전한지 알아보기 위해, 두 발을, 자동차 팔거리 위에 가지런히 놓고, 도로에 우리의 여정을 그방해하는 다른 동물이 있는지 정찰한다.
우리는 자동차를 연인산 입구에 정차시키고, 도로를 따라 한참 내려왔다. 이젠 이 야산에도 쌓인 눈을 거의 볼 수 없다. 저 높은 산 정상으로부터 물이 되어 졸졸 흘러내려 온다. 노자가 말한 ‘상선약수’라는 말은 언제나 진리다. 에베소 철학자 헤라클리투스가 말한대로 ‘만물은 흘러간다.’ 그러기에 내가 본 이 흘러가는 물은 두 번 다시 볼수 없다.
이 물은 하염없이 흘러간다. ‘하염’이란 작정을 하고 덤비는 의도된 일인데, 그것이 없이 자연스럽게 마음대로 떠나간다. 내가 아이폰을 들고 촬영하는대로, 금방 사라진다. 낮은 곳으로 가는것이 당연하고 진리란다. 나에게 연연해 하지 말하고 말한다. 노자는 이 진리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上善은若水하니
水善利萬物而
不爭하며
處衆人之所惡라.
故幾於道니라.
“내가 깨달은 인생의 최고의 선은 물과 같습니다. 물은 만물에 차별을 두지 않고 모두를 이롭게 합니다.
인간도 물처럼, 세상을 구성하는 모든 이들을 개선할 수 있도록 도와야합니다. 물은 자신이 더 낫다고 다투는 적이 없습니다. 다른 물이 와도, 구정물이 와도, 자신과 합류시켜 하나가 됩니다. 상대방이 나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가져온 주전자에 맞추어 몸을 변형시키고, 날씨가 변하면, 물은 심지어, 얼음도 되고, 수증기가 됩니다. 변모의 귀재입니다. 물은 뭇사람들이 싫어하는 곳, 마다하는 곳만 갑니다. 그것은 낮은 곳입니다. 사람들을 높은 곳이 좋은 줄 알고 거기로 달려갑니다. 뭇사람들이 싫어하는 일을 마다하지 않고 힘들고, 후미진 곳을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찾아갑니다. 물이 그곳으로 찾아갈 수 있는 이유는 나와 너, 주인과 손님, 위와 아래, 처음과 나중의 구별이 없는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나’가 없고 내가 너이며, 동시에 우리가 그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싸우지 않고, 상대방의 다른 점을 축하하고 인정해줍니다.
그러기 때문에 인간은 각자 가야할 길이 있습니다. 길은 처음과 중간, 그리고 끝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구별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합니다. 초월한다고 과거-현재-미래를, 저기-여기-거기를 소홀하게 대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들을 모두 소중하게 포월하고, 지금-여기에서 최선을 경주한다는 말입니다. 그 도는 우리가 가진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은유와 직유를 사용합니다. 도는 물과 같습니다. 만일 누가 자신만이 도를 안다고, 진리를 깨달았다고 주장하면, 그는 사이비似而非입니다. 진짜인척하는 사람은 언제나 가짜입니다. 세상에서 최고의 권력자, 최고의 부자가 되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그곳은 분명 지옥입니다.”
居善地하며
心善淵하며
與善仁하며
言善信하며
正善治하며
事善能하며
動善時하여
夫唯不爭이라故無尤니라.
“물과 같은 사람은 다음과 같이 일곱가지 최고의 마음을 지닌 자입니다. 첫째, 머무름이 자신의 처지處地와 어울리는 사람입니다. 저 높은 곳에서 흘러내려 온 물은, 앞에 바위가 있어도, 웅덩이가 있어도, 나무가 있어도, 심지어 인간이 만든 거대한 댐이 있어도, 불평하지 않고 그 안에 머뭅니다. 한마디로 아모르 파티amor fati,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수용하고, 그 안에서 가장 효율적으로 적응하는 자입니다. 그가 있는 장소가 메카이고 예루살렘입니다. 아브라함이 신으로 부터 ‘그곳’을 향해 가라는 침묵의 소리를 들었을 때, 그는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 아이들 이삭을 데리고 그곳으로 갑니다. ‘모리야’라는 산은, 신의 명령을 듣고 광야에서 사흘 밤낮을 견뎠을 때, 비로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나는’ 산입니다. ‘모리야’라는 히브리 단어가 그런 뜻입니다. 도인은 자신의 마음을 하늘이 아니라, 땅에, 내가 지금 발을 두고 있는 여기 이곳에, 두는 자입니다.
둘째, 최선의 마음가짐은 심연深淵입니다. 깊은 연못이란 의미의 심연深淵은, 고요한 마음인 심연心淵입니다. 바닷물을 멀리서 보면 고요한 것 같으나, 가까이 가 보면, 그 표면은 끊임없이 흔들립니다. 흔들림은 고요와 정적을 가져오기 위한 떨림입니다. 파탄잘리는 <요가수트라: 삼매품>에서 요가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요가는 한순간도 정지하지 못하고 마음속에서 요동치는 잡념을 점점 소멸하게 만드는 수련이다.” 출렁이는 파도도, 그 가장 깊은 심연으로 내려가면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아무것도 볼 수 없고, 모든 것을 눌러, 거의 ‘없음’으로 만드는 시공간이 있습니다.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나오는 아버지 쿠퍼가 웜홀로 들어가 딸 머피를 만드는 곳입니다. 자신의 심연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을 신뢰해야합니다. 이 심연은 인류 최초의 영웅 길가메시가 경험한 그곳 ‘나끄바’naqba다. 나끄바는 빅뱅의 싱귤레러티처럼, 우주를 적신 처음 물처럼, 만물을 만든 모수母水입니다.
셋째, 최선의 마음가짐은 이웃과 더불어 지낼 때, 나로부터 나오는 어짐입니다. 인仁이다. 인이란 유교에서 말하는 학습을 통해, 공동체의 일원으로 생존하기 위한 ‘인의예지仁義禮智’가 아닙니다. 그것은 살구의 껍데기를 베껴 낸 후, 그 씨 안에 존재하는 배胚와 배젖으로, 한마디로 행인杏仁입니다. 모든 생명은, 인간을 날 때 부터 자신의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고 그것을 유지하려는 자연스러운 힘이 있습니다. 인간이 자신이 되어야 할 자신, 인격이나 품격이 바로 어짐입니다. 이 어짐을 플라톤은 ‘다이몬DAIMON’이라고 불렀습니다. 다이몬은, 그 사람을 악마로 만들기도 하고, 천사로 만들기도 한다. 다이몬은 한마디로 ‘귀신이 강림하는 상태’로 괴테나 모차르트와 같은 인간들을 통해 만든 작품의 원동력입니다.
넷째, 최선의 마음가짐은 믿음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격을 입을 통해 말하고 행위를 통해 완성합니다. 곧 말이 행위이고 행위가 곧 말입니다. ‘믿음’을 풀어서 설명하자면, 신의信義입니다. 자신이 한 말을 받드시 지키고, 완벽하게 완성하려는 수고입니다. 믿음을 져버리지 않기 위해서는 자기희생인 ‘의義’가 필수적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믿음을 ‘프락시스praxis’라고 불렀습니다. 프락시스는 연습을 통해, 생각과 말을 숭고한 행동으로 옮기는 과정입니다. 그의 영향을 받은 <요한복음> 저자는 ‘맨 처음에 말씀이 있었다“라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말씀이란 인간의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실제를 의미입니다. 자신의 삶에서 해야 할 한 가지를 찾아, 그것을 사랑하는 결심이 바로 ’믿음‘입니다. 영어단어 be-lieve라는 단어는 ’진짜 사랑하기‘란 의미입니다.
다섯째, 최선의 마음가짐은 자신의 임무를 삶을 영위하는 원칙으로 삼습니다. 세상엔 객관적인 옳음이란 원래 없습니다. 과거에는 힘이 있는 사람이나 스스로 똑똑하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법을 만들어 타인을 억압해 왔습니다. 이제는 외부가 아니라 내 마음의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양심의 소리를 법으로 만듭니다. 옯바름이란, 무심코 하는 일들을 멈춘 뒤, 드러나는 하나의 원칙입니다. 그것을 자신의 삶의 나침반으로 삼으려는 용기입니다. 20세기초 대중문화는 전체주의와 공산주의, 그리고 왜곡된 민주주의를 배태시킨 후, 양심의 소리에 복종하려는 사람들을 정신병원과 교도소에 격리시켜 왔다. 사회가 목동이 인도하는 장소로 가는 양 떼가 있어야지, 안정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사자처럼, 자유를 주장하면, 더 큰 괴물이 ’법‘을 등에 지고 등장하는 용이 등장한다. 이럴 때, 과감하고 거룩하게 ’아니요‘라고 말할 수 있는 개인이 되어야합니다.
여섯째, 최선의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일, 직업을 곰처럼 영약하고 강력하게 추진하는 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착한 것은 겸손이나 자비를 실천하는 자가 아니라, 힘을 가지고,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효과적으로 확실하게 처리하는 사람입니다. 능력能力이 있는 사람은, 자신이 맡은 일을 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쳐야합니다. 먼저, 많은 것 가운데, 자신에게 어울리는 한 가지를 선택하는 자입니다. 그는 그 한 가지에 집중하고, 몰입하여, 자신이 그 일을 하는 줄도 모르게 자신의 본성으로, 자신의 일부가 만듭니다.
일곱 번째, 최선의 인간은 모든 움직임이 적시適時여야 합니다. 그것은 테니스 선수 나달이, 네트를 넘어 먼지를 내며 클레이 코트로부터 강력하게 튀어 오르는 테니스공을 응시합니다. 그리고 자신 들고 있는 라켓의 정중앙으로 정확하게 맞춰, 상대방의 허를 찌는 장소로 칩니다. 적시는 우연이 필연이 되고, 일상의 순간이 운명의 순간이 되는 기적입니다. 요가 수련을 오래한 사람은, 일상에서 걷는 모습이 다르고 말하는 입모양이 다르고, 목소리 톤이 다릅니다. 항상 적재적소에 힘을 쓰기 때문에 겸손과 위험이 함께 존재합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 이 산골짝 물은 노자가 말한 일곱가지 특징을 모두 가지고 있다. 물처럼 살고 싶은 오늘이다.
<동영상>
연인산 지류 시냇물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