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2.3. (土曜日) “요셉의 눈물과 미소”
(요셉이야기 줌수업을 마치며)
오늘은 지난 10주동안 진행한 <요셉이야기> 줌수업의 마지막 날이다. 특별히 대면수업으로 진행하였다. 지난번처럼 서초동 강남성모병원대강당에서 진행하였다. 수강생 중 의사 부부의 배려로 장소를 그곳에 잡았다. 지난번 대면 수업에 늦게 도착하여 미안했다. 오늘은 일찍 나섰다. 집에서 서울까지는 먼 길이지만, 나에게 9번의 에세이 글로 자신의 삶의 진솔한 이야기를 들려준 도반들을 만나고 싶어 단숨에 달려갔다. 오늘 수업에 외부인들을 참여할 수 있도록 공지하였다. 도착하니, 강혜순 선생님과 여러분들이 커피를 준비하고 있고 배원기원장님이 줌수업을 위해 분주하게 컴퓨터 장비를 정돈하고 있었다.
가르치는 일을 오랫동안 해온 사람으로, 이 수업만큼 만족스런 수업이 없었다. 성서는, 10%만 알려준다. 나머지는 자신의 삶의 희로애락이 마중물이 될 때, 마음 속에 새겨진 삶의 등불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수강생들이 제출한 글들이 성서다. 이들의 글을 읽으면서, 나의 역할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세상에 있는 성당과 교회가, 매주일 성경말씀을 자신의 삶의 이야기로 전환하는 ‘글쓰기’학교와 그것을 여러사람들에게 나누는 ‘발표장’이 되다면, 교회에 희망이 있다. 아마도 그것이 유일한 희망일지 모른다. 루터나 칼뱅도 하지 못한, 자신의 삶을 성서이야기로 고백할 때, 21세기 종교개혁이 일어날 것이다.
오늘 특별한 분이 참석하신다. 나에게 단테 신곡 <인페르노>강의와 <욥기> 강의를 하도록 영적으로 부추킨 김광선대표님께서 천안에서 오신다. 내가 그를 인터넷 공간에서 5년전에 처음 만났다. 그가 세브란스병원에서 혈액암으로 조혈모세포 이식 수술을 기다리고 있는 절망적인 상태였다. 그 이전에 암을 두 개나 극복하는 분이다. 그가 나에게 덤덤하게 말했다. “‘10년만 살려주시면, 하나님앞에서 잘 살겠습니다!’라고 기도했는데, 딱 10년후에, 하나님이 혈액암을 선물로 주시네요.” 그 분은 1000명정도만이 경험할 수 있는 고통을 이겨내고 살아계신 희망의 상징이다. 그분이 천명이다. 오랜만이 건명원 제자 조은지도 참석한다고 연락이 왔다. 몇 년전 보았던 은지인지, 그 얼굴이 궁금하다.
오늘는 창세기 46-50장 내용을 다룬다. 드디어 야곱이 요셉을 만나고, 파라오까지 만난 후, 자신의 삶을 마감하는 감동적인 이야기다. 이 내용 중 다음 두 구절은 감동적이고 신비하다. <창세기> 46장 29절에 요셉이 아버지 야곱을 만나가 고센지역, 오늘날 카이로 주변 삼각주 지역으로 가는 장면이다.
וַיֶּאְסֹ֤ר יֹוסֵף֙ מֶרְכַּבְתֹּ֔ו וַיַּ֛עַל לִקְרַֽאת־יִשְׂרָאֵ֥ל אָבִ֖יו גֹּ֑שְׁנָה וַיֵּרָ֣א אֵלָ֗יו וַיִּפֹּל֙ עַל־צַוָּארָ֔יו וַיֵּ֥בְךְּ עַל־צַוָּארָ֖יו עֹֽוד׃
“요셉이 자기 아버지 이스라엘을 맞으려고, 병거를 갖추어서 고센으로 갔다.
요셉이 아버지 이스라엘에게 자신을 보이고, 목을 껴안고 한참 울다가는, 다시 목을 꼭 껴안았다.”
요셉은 파라오가 특별하게 마련한 운송수단인 마차( מֶרְכַּבְתֹּ֔ו)를 타고 고센으로 간다. ‘마차’를 의미하는 ‘메르카바’는 후에 엘리야가 승천하기 위해 올라탄 전차다. 요셉은 자신을 팔아넘긴 형들을 용서하고, 꿈에도 그리운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이 전차에 몸을 실었다. 그가 야곱을 만나고 가장 먼저 한 일이 있다. 자신을 보이는 일일이다. 그가 아버지를 떠난지 수십년이 되었기 때문에, 자신이 누구인지, 야곱이 스스로 확인하도록, 마차에서 내린 후, 자신을 아버지에게 보였다.
나이가 130살이 된 야곱이, 그를 한번에 알아볼 수 없었을 것이다. 렘브란트의 <탕자의 귀환>에 등장하는 아버지처럼, 앞이 안보여, 두 팔로 요셉을 앉아봐야, 확인할 수 있었다. 요셉은 전차에서 내려 걸음 거리조차 힘든 야곱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그의 가느다란 목에 자신의 머리를 떨구었다. 쏟아지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뜨거운 눈물이 야곱의 목을 적시자, 야곱이 입을 열어 말한다. “네가 정말 요셉이란 말이냐?” 요셉은 “네. 제가 바로 요셉입니다.”
그리고 요셉은 ‘울었다’. 생명은 인간으로 태어날 때 운다. 모든 인간은 어머니 뱃속에서 나올 때, 운다. 울지 않으면 죽는다. 입에 담긴 양수를 걷어내고 숨통을 터야, 지상에서 인간으로서의 여정을 시작한다. 그 눈물은 혼돈과 정화의 상징이다. 요셉이 아버지의 목을 잡고 한참 운 다음, 이것이 생시인지 확인하기 위해 다시 한번, 그의 목을 잡아당기고 울었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의 장례를 치뤘다. 요셉의 형들은 아직도 불안하다. 야곱이 죽었기 때문에, 요셉이 이젠 자신들에게 복수할 수도 있다고 두려워한다. 요셉은 시련과 고통으로 가득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이젠 형들을 온전히 용서할 수 있었다. 요셉은 벌벌 떠는 형들에게 <창세기> 50장 20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וְאַתֶּ֕ם חֲשַׁבְתֶּ֥ם עָלַ֖י רָעָ֑ה אֱלֹהִים֙ חֲשָׁבָ֣הּ לְטֹבָ֔ה לְמַ֗עַן עֲשֹׂ֛ה כַּיֹּ֥ום הַזֶּ֖ה לְהַחֲיֹ֥ת עַם־רָֽב׃
“형님들은 나를 해치려고 악을 고안하였지만,
하느님은 오히려 그것을 선으로 고안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오늘과 같이,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에 잔인한 인생을 푸는 단계가 숨겨져 있다. 첫째, 인간이라면 누구나 ‘악’으로 여겨지는 고통을 겪는다. 그 악을 악으로만 여기면, 그를 파괴하고 악으로 여기지만, 그 악은 선으로 가기 위한 징검다리라고 여기는 마음이 필요하다. 형들이 요셉의 건방과 오만을 견디다 못해 악을 행하게 만들었다. 어쩌면, 형들의 악이 아니라, 요셉이 악을 자초했을 것이다. 요셉이 악을 인내하고 수련하며, 인생의 섭리를 알기 시작한다. 둘째, 그 악은, 자신을 신뢰하고 품격을 수련하는 자에겐 선이 된다. 하느님이 오히려, 그 악을 선으로, 고통을 기쁨으로 만드시기 때문이다. ‘고안하다’(하사브)라는 단어가 동일하게 사용되었다. 셋째, 이 모든 일의 배후에 숨겨진 비밀이 있다. 많은 이들에게 생명을 살 맛나게 만드시기 위해서다.
칼린 지브란의 시 <눈물과 미소>처럼, 눈물은 미소로 가는 유일한 길이다. 중절모를 쓰고 가운데 앉으신 김광선대표님의 목소리에 힘이 있다. 더 건강해 지셨다. 은지의 얼굴이 천사처럼 변했다. 자신의 괴물과 싸워 승리한 얼굴이다. 지난 10주동아 요셉과 함께 자신의 삶을 자세하게 살펴본 도반들이 모두 자신이 올가가야 할 산을 찾은 것 같다. 함께 앞으로도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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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쓰는 동안, 오랜만에 뵙 김광선 대표님의 문자가 날라왔다. 그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그의 문자와 나의 답신을 올린다:
배철현 교수님.
어제는 환대해 주시고 특별히 세워 주셔서 어쩔줄 모르는 서울 나들이였습니다.
이런 자리에 초대받는 느낌이 있었던지, 지난 며칠 동안에 《람세스》를 읽고 막 나폴레옹으로 건너고 있었습니다.
강의소식을 듣고 다시 《신의 위대한 질문》을 정독하고, 《Message from Shagall》을 어제 새벽까지 들춰 보고 교수님을 뵈었습니다.
저를 나무라시는듯한 강의에 젖었다가 나오고 나니,
늘 부끄럽고 송구스러운 제 마음이 평온해졌습니다
올해는,
어떤 버켓리스트보다 제 속에 있는 '창의력'.을 찾아내려는 염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하소설 류를 읽으려고 목록(대개는 다시 읽는 책들)을 만들었더니, 거의 100권을 넘어섰습니다.
중간중간에 이현세의 《천국의 신화》나 야로 아베의
《심야식당》그리고 고우영의 《십팔사략》등의 만화가 끼어 있으니 지루하거나 포기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교수님 덕분에 도끼자루를 천정에 매달아 놓고 독서를 하려는 각오는 섰는데 '글쓰기'에는 언제 쯤 자유로워 질까요?
교수님덕분에
인생 마지막 열차의 마지막 칸에, 게다가 무임승차하는 행복함에 늘 감사드립니다.
좋은 분들과 함께하고 좋은 말씀을 나눈 어제.
처마에서 떨어지는 봄비가 허공에 매달린듯이 영롱하고 향기로운 날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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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선 대표님,
대표님은 1000명이십니오. 하나님께서 대표님을 통해 인간의 한계를 측정하려고, 선택하신, 21세기 욥이십니다. 장편소설을 읽기 하셨군요. 저의 버킷 리스트이기도 합니다. 제 책상 위에는 모비딕, 율리시스, 그리스도의 마지막 유혹, 카파마조프의 형제들, 전쟁과 평화가 나를 노려보고 ‘너 나 언제 읽을래!’라고 호통치고 있습니다. 장편소설은 우리의 삶을 도저히 경험할 수 없는 음침한 골짜기로 인도하여,훈련 시킵니다. 김대표님의 삶이 더 파란만장합니다. 대하소설을 읽으실 뿐만 아니라, 자신을 주인공으로 하여 소설을 쓰셔야 합니다. 인생 마지막 열차의 마지막 칸이 아니라, 그 첫 번째 칸의 첫 자리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우리를 위해 자신의 노래를 들려 주셔야합니다. 어제 김대표님의 영롱한 목소리를 듣고, 예수의 부활이 사실이라고 확신하였습니다. 곧 찾아 뵙겠습니다.
배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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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0번째 대면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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