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2.9.(月曜日) “빛과 실”
혼돈을 품어야 춤추는 별이 탄생한다고 니체는 말하지만, 혼돈이 한동안 지속되어 우리를 다시 야만인으로 전락시킬까, 심히 걱정되는 아침이다. 권력이라는 뿌리칠 수 없는 최악의 중독이 여기저기서 독버섯처럼 일어나고 있다. 이 기회를 잡아, 권력을 탐닉하고 싶은 인간의 본성이 칼춤을 추고 있는 대한민국에 희망이 있는가? 인간이란 종이, 특히 호모 코리아나Homo koreana라는 인종은 맘몬momon, 즉 돈이란 신과 맘몬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권력인 바일Baal이 되기 위해 싸우고 있는 각축전이다. 자신이 생각이 정의라고 주장하는 정치인들은 많지만, 자신을 돌아보고, 우리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나름의 진리를 감동적으로 전달하는 사람은 드물다. 앞으로 한동안 지속 될, 이 지옥에서 우리는 빛을 발견할 수 있는가? 우리의 마음을 하나로 이어줄 수 있는 빛나는 실을 마련할 수 있는가?
한강이 12월 7일, 스웨덴 스톡홀름 한림원에서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강연하였다. ...과감하게 폐기해야 통과할 수 있는 문이다. 내가 그 문에 서서 입을 열어 변화된 자신을 고백해야 들어갈 수 있는 새로운 경내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해, 제대로 걷을 수 없는 괴물怪物이 있었다. 누군가의 음모로 태어나자마자 이족보행을 할 수 없도록 두 발이 꽁꽁 묶여 태어났다고 해서, 이 아이의 이름은 그리스어로 ‘오이디(퉁퉁부은) 푸스(발)’이었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다. 자신의 아버지를 죽일 운명을 지니고 태어났다는 점쟁이의 말을 듣고 고향을 떠나 갈림길에서 낯선 자 일행을 만나, 사소한 일로 다투다 그 사람을 살해한다. 그 낯선 자가 오이디푸스의 친부였다. 역병이 돌고 있는 테베라는 도시 입구에 스핑크스가 길을 막아서면서 질문한다. “아침엔 네 발, 점심에 두 발, 저녁엔 세 발로 걷는 존재가 무엇이냐?” 오이디푸스는 일생 아픈 발을 견디며 걸었기 때문에, 이 질문에 쉽게 대답한다. “아이는 네발로, 청년 두 발로, 노인은 지팡이 의지하여 세 발로 걷는다‘라고 대답한다. 인간은 자신이 누구인지 알 때,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다.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만이 그 사람을 그 사람답게 만느는 질이 된다. 우주 안에 존재하는 만물은 각자의 질이 있다. 나무는 뿌리를 지구 중심에 내려 중력을 거슬려 하늘 높이 오르려는 특징이 있고, 새는 날개짓하며 자신이 가고 싶은 곳을 향해 나를 수 있는 개성이 있다. 다른 동물과 식물들은 자신에게 운명적으로 주어진 고유한 임무가 있지만, 인간은, 장 폴 사르트르의 말대로, 자신에게 어울리는 임무를 찾도록 ’자유‘라는 천벌이 주어진 동물이다. 인간은 자유의지로 자신이 원하는 인간으로 매일 변모하는 존재다.
한강은 최근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를 제주도에서 월세방을 얻고 2017넌부터 2년동안 집필하였다. 이 소설을 쓰면서 다음과 같은 메모를 끄적였다:
생명生命은 살고자 한다. 생명을 따뜻하다,
죽는다는 것을 차가워 지는 것. 얼굴에 쌓인 눈이 녹지 않는 것.
죽인다는 것은 차갑게 만드는 것,
역사 속에서의 인간과 우주 속에서의 인간.
바람과 해류. 전세계를 잇는 물과 바람의 순환.
우리는 연결되어 있다. 연결되어있다. 부디.
한강의 메모에 담긴 ’부디‘에 담긴 간절함은 풀어줄 수 있는 해답은 우리 모두가 지니고 있는 심장의 가장 깊은 곳에 담겨져 있다. 예수가 자신의 길을 찾지 못해 우울증을 앓고 있는 군중들과 산에 올랐다. 그들이 힘들어 헐떡거리는 심장을 움켜잡고 언덕에 앉자 <마태복음> 5장 3절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Μακάριοι οἱ πτωχοὶ τῷ πνεύματι, ὅτι αὐτῶν ἐστιν ἡ βασιλεία τῶν οὐρανῶν.
אשרי עניי רוח כי להם מלכות השמים׃
“영혼이 고통가운에 있는 자는 복이 있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소유다.”
흔히 산상수훈의 첫 번째 문장을 ‘마음이 가난한 자’라 번역하는데, 오해의 소지가 있다. 이 문장에 등장하는 그리스어 ‘프뉴마’(πνεύματι)와 히브리어 ‘루아흐’(רוח)는 ‘마음’이나 ‘정신’이 아니라 ‘영혼’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부모를 통해 신체를 부여받고, 선생이나 책을 통해 정신을 훈련받는다. 그러나 영혼은, 생명을 지닌 존재라면 누구나 이미 지니고 있는, 그 존재를 존재답게 만드는 신적인 불꽃divine spark이다. 이 생명은 우주가 만들어질 때, 태어난 빛이며 만물을 이어주는 금빛 실이다. 인간은 때가 되면, 자신을 자기답게 만드는 영혼을 찾기 시작한다. 스스로 자신이 되기 위해, 이제 자신을 응시하게 된다. 이 영혼을 회복하기 위해, 이런저런 파란만장의 경험을 한 후에, 자신을 찾는 여정을 시작합니다. ‘괴롭다’라는 그리스어 프토코이(πτωχοὶ)와 히브리어 아니(עניי)는 인생 경험을 통해, 마음속에 가득한 에고라는 자아를 살해하고, 텅 빈 공허한 상태다. 인간은 이 공허에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인 사랑을 발굴할 것이다.
한강이 12월 7일, 스웨덴 스톡홀름 한림원에서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강연하였다. 강연 제목이 '빛과 실'이다. 그녀의 빛과 실을 우리에게 마련해 줄수 있는 칼릴 지브란의 시 '자기앎에 관하여'라는 시를 번역해 보았다:
On Self-Knowledge by Khalil Gibran
자기-앎에 관하여, 칼릴 지브란
And a man said,
"Speak to us of Self-Knowledge."
And he answered, saying:
사람이 말했다.
“자기 앎에 관해 말해주십시오.”
그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Your hearts know in silence the secrets of the days and the nights.
But your ears thirst for the sound of your heart's knowledge.
You would know in words that which you have always know in thought.
You would touch with your fingers the naked body of your dreams.
And it is well you should.
“당신의 심장은 침묵 가운데, 밤낮의 비밀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귀는 심장의 지식에서 나오는 소리에 목말라합니다.
당신은 항상 생각에서 알고 있는 것을 단어로 알 것입니다.
당신은 꿈에 나타난 나신을 당신의 손가락으로 만질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합니다.”
The hidden well-spring of your soul
must needs rise and run murmuring to the sea;
And the treasure of your infinite depths would be revealed to your eyes.
But let there be no scales to weigh your unknown treasure;
And seek not the depths of your knowledge with staff or sounding line.
For self is a sea boundless and measureless.
“당신 영혼의 숨겨진 샘물은 분출하여
바다로 중얼거리며 달려가야 합니다.
당신의 무한한 심연에 있는 보물이 당신의 눈에 드러날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의 알려지지 않는 보물의 무게를 잴 저울이 없어야 합니다.
당신의 지식의 깊이를 측량대나 측연선으로 측정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자아自我는 경계가 없고 측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Say not, "I have found the truth,"
but rather, "I have found a truth."
Say not, "I have found the path of the soul."
Say rather, "I have met the soul walking upon my path."
For the soul walks upon all paths.
The soul walks not upon a line, neither does it grow like a reed.
The soul unfolds itself, like a lotus of countless petals.
“내가 유일한 진리를 찾았다”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대신 “내가 여러 가지중 한가지 진리를 찾았다”라고 말하십시오.
“내가 영혼의 길을 찾았다”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대신 “내가 길 위에 걷고 있는 동안 영혼은 만났다”라고 말하십시오.
왜냐하면, 영혼은 모든 길에서 걷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혼은 선 위에서 걷지 않고 갈대처럼 자라지 않습니다.
영혼은 셀 수 없는 꽃잎을 지닌 연꽃처럼 스스로 펼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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