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2.31. (火曜日, 365th/365) “예수가 울었다”
2024년 마지막 날이다. 무안참사 유가족에게 깊은 애도를 전한다. 그들의 고통을 함께하는 성서구절이 있다. 성서에서 가장 짧은 구절이다. <요한복음> 11장 35절에 등장하는 문장 “예수가 울었다”다. <요한복음> 11장엔 마리아와 마르다의 동생이며 예수가 사랑했던 친구인 나사로가 치명적인 전염병에 걸린 이야기로 시작한다. 예수가 베다니에 도착했을 때, 나사로는 이미 죽어 매장된 지 나흘이나 지났다. 나흘은 육신이 죽어 영혼이 떠나는 삼일을 지난 후, 그러니 다시는 생명을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을 의미한다.
예수가 베다니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마리아는 집에서 뛰쳐나와 예수를 길에서 만났다. 그녀는 그의 발에 엎드려, “당신이 여기에 있었더라면, 제 동생 나사로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마리아와 그녀를 따라온 유대인들이 울기 시작한다. 이 문장엔 예수의 대한 믿음, 예수와 나사로간의 우정과 사랑이, 그리고 늦게 온 예수에 대한 원망과 안타까움이 스며있다. 이 때, 신적이며 영웅적인 예수라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울지마라. 내가 당장 나사로를 살리겠다. 무덤으로 가자.”
예수가 이렇게 반응했다면, 마리아와 그를 따라온 사람들은, 예수의 기적과 은총만을 바라는 노예로 전락했을 것이다. 예수는 우리가 예수라고 마음속에 나름대로 만든 허상을 쫓아가는 우상숭배자사 되길 바라지 않는다. 그랬다면, 그리스도교는 아에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예수는 이들이 슬퍼하는 모습을 보고, 참으로 인간적으로 반응한다. <요한복음> 11장 33절 그리스어 히브리어 원문과 그 번역이다.
Ἰησοῦς οὖν ὡς εἶδεν αὐτὴν κλαίουσαν καὶ τοὺς συνελθόντας αὐτῇ Ἰουδαίους κλαίοντας,
ἐνεβριμήσατο τῷ πνεύματι καὶ ἐτάραξεν ἑαυτόν,
ויהי כראות ישוע אתה בכיה וגם היהודים אשר באו אתה בכים ותזעם רוחו ויהי מרעיד׃
“예수는 마리아의 말을 들은 후에, 그녀가 슬픔을 참지 못하고 큰 소리로 통곡하는 것을 보시고, 그녀와 함께 온 유대인들로 큰 소리로 통곡하는 것을 보셨다. 그러자 예수는 마치 고통스러운 말이 코를 불며 거친 숨을 거칠게 내쉬는 것같이, 그의 영혼이 비통하여, 괴로운 몸을 비틀며 왔다갔다하셨다.”
예수가 마리아와 유대인들이 통곡하는 것을 보고, 그들의 심정과 하나가 되었다. 그는 마치 심한 상처를 입어 고통스러워하는 말이 코를 불며 거친 숨을 내쉬는 것같이, 씩씩거리셨다. 요한복음 저자 사용한 단어는 엠브리마오마이ἐμβριμάομαι가 그런 뜻이다 이 단어는 그리스-로마 세계에서 타인의 고통을 진정으로 이해할 뿐만 아니라, 그 고통을 자신에게 적용시켜 함께 괴로워하는 진정성을 품고 있다. 말이 고통스런 상처를 입었다면, 씩씩대면서 코와 입으로 숨을 거칠게 몰아 쉰다. 예수의 반응은 조용히 눈물을 흘려 손수건으로 남몰래 눈물을 닦지 않았다. 심지어 그는 마리아의 고통을 온전히 자신의 고통으로 느껴, 온몸을 비틀며 자신도 괴로워했다. 요한복음 저자가 사용한 타랏소ταράσσω가 그런 뜻이다. 몸을 주체하지 못하고 안절부절하여 왔다갔다할 때 사용하는 단어다. 심연으로부터 올라온 고통이 그를 마치 얼빠진 사람처럼 몸을 주체하지 못하고 혼란에 빠뜨린 것이다.
그런 후, 예수는 그들에게 이렇게 물었다. <요한복음> 11장 34절이다:
καὶ εἶπεν Ποῦ τεθείκατε αὐτόν;
λέγουσιν αὐτῷ Κύριε, ἔρχου καὶ ἴδε.
ויאמר איפה שמתם אתו ויאמרו אליו אדני בא וראה׃
예수가 말했다. “너희는 그를 어디에 두었느냐?”
그들이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주님, 와서 보십시오.”
마리아와 유대인들이 예수에게 직접 와서 보라고 말했다. 그러자 성서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이 등장한다. 아마도 그리스도교의 핵심이 담겨있는 성서에서 가장 짧은 문장이다. <요한복음> 11장 35절이다:
ἐδάκρυσεν ὁ Ἰησοῦς.
ויבך ישוע׃
Jesus wept.
예수가 울었다.
“예수가 울었다”라는 말은 성서에 등장하는 가장 심오하고 강력한 문장이다. 겨우 두 단어일 뿐이지만, 그리스도의 핵심을 담고 있다. 그는 아직 무덤에 가지도 않았다. 마리아가 나사로가 죽었으니 이제 함께 무덤으로 가서 그의 시신을 보자고 요청하였다. 그 때 예수의 반응은 ‘함께 우는 행위했다,’ 예수는 왜 울었는가? 마리아가 우는 모습을 보고 감정이 북받쳐 전염되어 울었는가? 예수가 나사로를 다시 못볼 것 같아, 아쉬워 운 것인가? 예수는, 그 순간에 마리아와 마르다의 고통속으로 들어갔다. 그들 고통을 온몸이 흔들릴 정도로 함께 느꼈고, 눈물은 그 자연스런 반응이었다.
예수는, 이 순간에 타인의 아픔을 진정으로 자신의 아픔으로 여기고 실제로 자신의 신체로 반응하고 그 대상의 아픔을 경감하기 위해 애쓰는 ‘공감의 혁명’을 일으켰다. 임마누엘, 즉 신이 우리와 함께 있다는 말은 은유나 빈말이 니라, 실제로 우리의 아픔을 신이 함께 느낀다는 의미다. <시편> 34년 18절에 다음과 같이 신의 마음을 표현하였다:
קָרֹ֣וב יְ֭הוָה לְנִשְׁבְּרֵי־לֵ֑ב
“야훼는 심장이 찢어진 자, 근처에 계신다.”
한해를 마무리하면서, 우리가 마리아와 마르다처럼, 자식을 잃고 심장이 찢어지는 유가족들의 슬픔을 제대로 나누지 못한 우리의 잘못을 고백한다. 지금은 이태원참사와 무안참사 유가족의 슬픔에 동참하여 조용히 눈물을 흘릴 때다. 여기 레바논 시인 칼릴 지브란의 묵상한 눈물에 관한 시가 있다. 그는 탈레스가 말하는 혼돈과 정화의 상징인 물을 머금은 우리의 눈물이 시간이 지나면 미소가 된다고 노래한다. 2025년은 미소가 많아지면 좋겠다.
A Tear and A Smile/눈물과 미소
칼릴 지브란
I would not exchange the sorrows of my heart
For the joys of the multitude.
And I would not have the tears that sadness makes
To flow from my every part turn into laughter.
저는 심장이 애이는 슬픔을
대중의 기쁨과 바꾸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슬픔이 제 모든 부분에서 흘러내리도록 만드는
눈물이 실없는 웃음으로 변질되는 것을 방치하지 않겠습니다.
I would that my life remain a tear and a smile.
A tear to purify my heart and give me understanding
Of life's secrets and hidden things.
A smile to draw me nigh to the sons of my kind and
To be a symbol of my glorification of the gods.
저는 제 삶이 눈물과 미소로 남았으면 좋겠습니다.
제 심장을 정화하고
삶의 비밀과 숨겨진 것들을 이해하는 눈물.
미소는 저를 동료인간들에게 다가가게하고
미소는 제 방식으로 신에게 영광을 올리는 상징입니다.
A tear to unite me with those of broken heart;
A smile to be a sign of my joy in existence.
I would rather that I died in yearning and longing
than that I live Weary and despairing.
눈물은 아픈 심장을 지닌 자들과 저를 하나로 만듭니다.
미소는 제 존재 자체를 기뻐하는 표식입니다.
저는 차라리 지치고 절망하며 사는 것보다,
그리워하고 바라다 죽겠습니다.
I want the hunger for love and beauty to be in the
Depths of my spirit, for I have seen those who are
Satisfied the most wretched of people.
I have heard the sigh of those in yearning and Longing,
and it is sweeter than the sweetest melody.
저는 제 영혼의 깊은 곳에서 사랑과 아름다움에
굶주리길 원합니다. 왜냐하면 저는 삶에 만족한 사람들이
가장 불쌍한 사람들이란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리워하고 바라는 사람들의 한숨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 소리는 가장 달콤한 선율보다 달콤합니다.
With evening's coming the flower folds her petals
And sleeps, embracing her longing.
At morning's approach she opens her lips to meet
The sun's kiss.
The life of a flower is longing and fulfilment.
A tear and a smile.
저녁이 다가오면, 꽃은 자신의 그리움을 껴안고,
자신의 잎을 접고 잠에 듭니다.
아침이 다가오면, 그녀는 잎을 열고
태양과 입을 맞춥니다.
꽃의 삶은 희구와 성취입니다.
눈물과 미소입니다.
The waters of the sea become vapor and rise and come
Together and are a cloud.
And the cloud floats above the hills and valleys
Until it meets the gentle breeze, then falls weeping
To the fields and joins with brooks and rivers
to Return to the sea, its home.
The life of clouds is a parting and a meeting.
A tear and a smile.
바다의 물은 수증기가 되어 올라
함께 모여 구름이 됩니다.
그리고 구름은 친절한 산들바람을 만날 때까지
언덕과 계곡 위에 둥둥 떠 있습니다.
그런 후 들판 위로 울면서 떨어져 시냇물과 강물과 합류하여
바다로 돌아옵니다. 바다가 고향입니다.
구름의 삶은 떠남과 만남입니다.
눈물과 미소입니다.
And so does the spirit become separated from
The greater spirit to move in the world of matter
And pass as a cloud over the mountain of sorrow
And the plains of joy to meet the breeze of death
And return whence it came.
마찬가지로 영혼도 위대한 영혼으로부터 분리되어
물질세계로 움직입니다.
구름으로 슬픔의 산을 지나고
기쁨의 평원을 지나 죽음의 산들바람을 만나
자신이 온 곳으로 돌아갑니다.
To the ocean of Love and Beauty-to God.
사랑과 아름다움이란 바라로, 신으로 돌아갑니다.
사진
<소년과 까마귀>
핀란드 화가 악셀리 갈렌 칼레라(1865?1931)
유화, 1884, 72 cm x 86 cm
헬싱키 아테네움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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