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2.29.(日曜日) “당신의 애간장이 끊어진 적 있습니까?”
(<마가복음> 공부 시작, 2025년 1월 11일, 10주)
인류는 자비를 통해 진화해왔다. 자비가 없는 기술, 특히 ai와 같은 기술은, ai의 아버지인 힌튼박사가 경고한것처럼, 인류의 멸종을 이어질 가능성이 농후하다. 인류는 점점 절벽으로 달려가는 돼지떼처럼, 누군가의 깃발을 보고 다수가 굴종하는 말종이 되었다. 인류기술의 본격적인 시작은 기원전 8500년경에 시작한 농업의 발견이다. 이 발견은 비어고던이란 인류학자가 말한대로, ‘신석기 혁명’으로 땅을 깊게 팔 수 있는 도구의 발명과 인간진화의 도약이 아니라, 우연히 비옥한 초승달 지역에서 밀과 보리가 자라는 것을 보고 재배를 시작하였다. 인간이 씨를 파종한다고 곡식을 거두는 것이 아니다. 자연의 섭리, 공기, 안개, 물, 공기, 기후와 같은 수많은 것들을 자연이 느닷없는 선물로 줘야한다. 인간이 자연에 대한 경외심, 신비, 감사가 인류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 주었다.
농업의 발견으로 잉여자본이 생겨, 유산계급과 무산계급이 생기고, 사회의 안정을 통해 법을 통제할 수 있는 왕권과 그가 치리하는 도시가 기원전 4000년경에 등장하였다. 친족과 부족을 넘어선 타인과 공존해야하기에, 이들이 제한된 장소에서 공생하기 위해서는 타인의 입장에서 정책을 세우는, 역지사지가 도시생존의 핵심이 되었다. 왕권이 판을 치는 오리엔트 문명은, 이제 개인의 장점을 살리려는 정치제도인 민주주의를 실험하는 아테네도 그 중심을 옮긴다. 민주주의가 선동정치나 인기영합주의로 빠지지 않기 위해, 시민들이 각자가 타인의 입장에 서보는 문화가 절실했다. 그 문화가 바로 그리스 비극이었다.
기원전 472년, 야심한 정치가 페리클레스와 천재적인 작가 아이스킬로스는 <페르시아인>이란 비극작품을 무대에 올린다. 대부분의 아테네 시민들은 8년전에 일어난 살라미스 해전에서 자신들이 강대국 페르시아를 어떻게 이겼는지, 그 영광스런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러나, 이 비극작품에 그리스사람은 등장하지 않는다. 패장이 된 페르시아의 왕, 크세르크세스가 고향 수사로 돌아와 자신의 전투에서 패한 이유, 즉 자신의 오만에 대해 애통해 하는 모습을 무대에 올렸다. 신기하게, 아테네 시민들도 자신들의 아버지와 아들을 죽인 패장의 우는 모습을 보고 자신도 함께 울었다. 그들은 이 비극작품을 통해, 진정한 제국은 상대방의 어려움을 공감하는 연민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이 연민을 경전에서는 자비慈悲, 인仁, 혹은 ‘사랑’이란 단어로 설명한다. 특히 신약성서에 등장하는 예수의 최고의 장점은 사도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우는 자와 함께 울 수 있는’ 능력 때문이다. 예수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는 아이로 태어났다. 언제부터인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여겼다. 그가 신의 아들로, 후에는 신으로 존경을 받을 수 있는 이유는, 동정녀 탄생도 아니고, 기적도 아니고, 3일만의 부활도 아니다. 이 기적적인 현상들은, 순간을 살며 죽음을 알고 있는 인간에게 너무나도 먼 나라 이야기다. 예수가 신인 이유는, 예수가 신으로 추앙된 이유는, 고통을 받는 인간의 심정을 자신의 심정으로 헤아려 그들의 고통은 자신의 고통으로,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동일시하는 최고의 가치인 자비 때문이다. 자비는 사실 종교인들이 생각하는 전지전능한 신의 속성인 권력, 명예, 영생, 진리와 상관이 없다. 올림포스산에 사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에게 자비는, 별로 하찮은 신의 속성이다.
심지어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타생명의 고통은 자신의 고통으로 여기는 가치는 경쟁사회에서 강점이 아니라 약점이다. 특히 기원전 3세기에 등장한 헬레니즘 철학의 한 분파인 스토아철학에서 자신의 마음에 평정을 유지하기 위해서, 타인의 희로애락은 제거해야 할 걸림돌일 뿐이다. 자비는 그리스도교가 신을 이해하는 핵심교리이지만, 언젠가부터 돈벌이 수단이나 말장난으로 전락하였다. 오늘날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자비는, 자신이 신봉하는 그리스도교 교리를 강요하기 위해 수단이며, 자신의 지상성공과 사후영생을 위한 적금이다.
자비는 타인이 좀처럼 보여주지 않는 그 사람만의 고통속으로 바로 들어가는 능력이며, 사도바울이 말한대로, “우는 자와 함께 우는” 능력이다. 그리스도교는 이 연약해 보이는 가치로, 인류의 기둥이 되었다. 교육은 다양한 책과 독서를 통해, 자신의 임무를 발견하고 다양한 인간들이 처한 환경을 간접적으로 경험하여, 인간의 마음속에 숨겨진 신의 불꽃인 자비를 일깨우는 체계적인 자극이다. 대한민국의 미래리더는 5000천만 국민의 슬픔과 기쁨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자비의 화신이어야한다. 우리가 지금 처한 계엄, 탄핵, 무정부상태는 대부분의 내각이, ‘교육을 제대로 받는 적이 없는’ 무식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물질적인 풍요와 세속적인 권력을 위해, 골방에서 과학공식이나 법조항을 달달 외운 자들이 국민의 운명을 정하는 자리에 앉아 있어, 개인의 영달을 위한 정책을 남발하니, 대한민국이 오징어게임판일 수 밖에 없다. 오징어게임도 한번 성공하지, 두 번째 오징어게임을, 참신한 스토리가 부재하여, 참사로 끝날 수 밖에 없다.
구약성서에서 신의 다양한 속성가운데 가장 중요한 특징은 히브리어로 ‘레훔마’rehuma다. 레훔마는 어머니가 자신이 낳은 자식에 대한 절대적인 순수한 사랑이다. 어머니는 갓난 아이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어줄 수 있다. 신약성서에서 레훔마가 그리스어로 ‘아가페’agape가 되었다. 예수는, 이 아가페를 몸으로 실천한 자다. 자신이 타인의 고통을, 마치 갓난 아이의 치병적인 병을 자신의 병으로 온전하게 수용하게 함께 아픈 어머니의 고통으로 느끼는 자비의 화신이다. 신약성서에서 예수는 고통받는 자의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자신이 똑같이 육체적으로 감정적으로 하나가 된다. 예수는 고통받느 자들과 하나가 되는 능력을 ‘나와 아버지, 즉 신과 하나다’라고 표현하였다. 예수에게 고통당하는 사회의 약자들이 마치 목자가 없는 양떼처럼 불쌍해 보였기 때문이다.
여기 피부가 계속해서 벗겨지고 진물이 계속 흘러나오는 나병환자 (한센병, 문둥병) 하나가 예수를 찾아왔다. <마가복음> 1장 40절-42절에 등장하는 장면이다. 그리스어, 히브리어, 그리고 한글 번역이다.
40절. Καὶ ἔρχεται πρὸς αὐτὸν λεπρὸς παρακαλῶν αὐτὸν καὶ γονυπετῶν λέγων αὐτῷ ὅτι Ἐὰν θέλῃς δύνασαί με καθαρίσαι.
ויבוא אליו איש מצרע ויתחנן אליו ויכרע על ברכיו ויאמר לו אם תרצה תוכל לטהרני׃
Then a man with a serious skin disease came to Him and, on his knees, begged Him: "If You are willing, You can make me clean.
“그때, 심각한 피부병이 걸린 사람, 즉 나병환자가 그에게 와서, 간절하게 도움을 청하면서 무릎을 꿇고 그에게 말했다. ”당신이 저를 고치고 싶은 의지가 있다면, 저를 깨끗하게 고칠 수 있습니다.”
(해설)
마가복음은 복음서 가운데 가장 먼저 쓰여진 원-복음서와 가까운 예수의 진짜 어록이 담겼다. 여기에는 예수의 탄생이야기가 없이 바로 세례요한의 등장과 제자들을 선발하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 후에 1장의 말미에 당시 신의 저주라고 알려진 나병(한센병) 환자를 치유하는 내용이 등장한다. 나병은, 피부가 자꾸자꾸 벗겨지면서 진물이 나는 고약한 피부병으로, 구약성서에서는 욥도 고통을 받았던 병이다. 이 병을 얻은 자는 신의 저주를 받았기 때문에, 사회로부터 격리되어 소록도와 같은 특별한 지역에서 감금되어 살았다. 나병은, 은유적으로 자신의 모습을 끊임없이 타인에게 보여주려는 자기노출과 자기PR병이기도 하다. 인간은 자신의 잘난 모습을 치장하여 끊임없이 타인에게 인정을 받고 싶어한다. 자기노출병이라는 정신적인 암에 걸리면 치료가 불가능한다.
그가 예수에게 와서 간절하게 도움을 청한다. 무릅을 꿇고 진심으로 간청한다. “당신이 저를 고치고 싶은 의지가 있다면, 저를 깨끗하게 고칠 수 있습니다.” 이 문장에서 ‘고친다’는 의미를 지닌 그리스 단어 ‘카싸리사이καθαρίσαι’ 우리가 아는 카타르시스catharsis의 어원이 되는 단어다. 카타르시스는 몸안에 담고 있으면 결국 불치의 병이 되는 종량으로 반드시, 정기적으로 제거해야한다. 카타르시스는 인간의 욕심으로 매일 아침, 걸러내야 온전한 사회생활을 유지할 수 있다. 이 용어는 원래 의학용어로 여성들이 생명을 잉태할 수 있는 증거이자 매달 배출해야함 하는 ‘월경’을 의미한다. 죽은 피를 내 보내야지만, 새로운 피를 통해, 생명을 잉태시킬 수 있다. 이 나병환자는 죽은 피로 가능한 자로, 더 이상 인간으로 살 수 없는 자였다. 그는 예수를 통해, 자신이 다시 새로운 인간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고 믿었다.
41절 καὶ σπλαγχνισθεὶς ἐκτείνας τὴν χεῖρα αὐτοῦ ἥψατο καὶ λέγει αὐτῷ Θέλω, καθαρίσθητι.
וירחם עליו וישלח את ידו ויגע בו ויאמר רצה אנכי טהר׃
Suffering from tearing down entails, Jesus reached out His hand and touched him.
“I am willing,” He told him. “Be made clean.”
예수가 애간장이 끊어지는 아픔을 느끼시고, 자신의 손을 뻗어 그를 어루만지면서 말했다:
“제가 당신을 고치고 싶습니다. 깨끗하게 되십시오.”
(해설)
그를 보고 예수는 바로 극심한 고통을 느꼈다. 히브리어로는 단순히 ‘라함’raham인데, 그리스어로는 극적인 단어가 사용되었다. 스팔라그크니쎄이스σπλαγχνισθεὶς는 오장육부를 의미하는 σπλάγχνον (splagchnon)에서 유래했다. 예수는 나병환자를 보고, 그 즉시 애간장이 끊어지는 아픔을 느꼈다. 그런 후, 있을 수 없는 행위를 한다. 그는 아픔에 동참하여 온몸으로 그를 감싼 것이다. 이 행위를 한 후에, 말한다. “제가 당신을 고치고 싶습니다. 깨끗하게 되십시오.” 예수는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먼저 보여주었다. 예수가 신으로 추앙받는 이유는 바로 이 연민과 자비 때문이다.
42절
καὶ εὐθὺς ἀπῆλθεν ἀπ’ αὐτοῦ ἡ λέπρα, καὶ ἐκαθερίσθη.
עודנו מדבר והצרעת סרה ממנו ויטהר׃
Immediately the disease left him, and he was healed.
그 즉시 심각한 피부병이 그에게서 떠났다. 그는 치유되었다.
참으로, 경이로운 순간이다. 나병환자는 유대교에서 신체적으로 영적으로 더럽혀진 사람으로 여겨졌다. 우리가 어릴 때, 종종 얼굴과 몸이 뭉그러져 집을 찾아와 대문을 두드리며 구걸하는 거지들이 있었다. 당시엔 이들과 접촉하면, 우리가 그 피부병에 감염이 된다고 생각하여, 쌀 한 공기를 퍼다 그들이 내민 보자기에 얼굴도 보지 않고 쏟아부었다. 우리도 과거에 그들을 소록도에 감금했다.
당시 유대인들은, 이들을 극단적으로 신으로부터 저주를 받은 사람들이라고 여겼다. 누구근지, 이들과의 접촉하면, 그 사람도 신체적으로 영적으로 감염된다고 믿었다. 이들은 이웃으로부터 신체적으로 고립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고립된 사람들이다. 사람들은 그들이 나쁜 행실로 신으로부터 저주를 받았다고 생각했다. 예수는 나병환자를 고쳤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어루만졌다. 유대교법에 의하면, 그 즉시 예수도 나병환자가 된 것이다. 그들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애간장이 끊어지는 고통으로 일체화했기 때문에, 예수는 자연스럽게 그들을 어루만질 수 있었다. 예수의 접촉은 사실 병을 치료하기 위해 불필요한 행동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행동은, 나병환자가 일생동안 자신의 삶에 깊이 새겨진, 창피함, 외로움, 따돌림, 혐오를 치유하기 위한, 최고의 치료방법이었다. 아니, 말을 하지 않아도 그를 껴안은 행위로, 이 병은 이미 치유된 것이다.
2025년 1월 11부터 <마가복음>을 10주동안 공부할 예정이다. 매시간, 그리스 원전 번역과 더불어 카라바조의 그림 1장, 엔도 슈카코의 평전, 레오 톨스토이의 에세이, 호주 시인 레스 머리의 시 한수를 함께 공부한다. 혼돈의 시대 빛줄기가 되는 줌수업이 되면 좋겠습다. 2025년 1월 4일 오전 10시엔 <마가복음 줌수업>의 첫 수업을 공개강좌로 진행할 예정이다.
사진
<요한복음> 11장 35절
ἐδάκρυσεν ὁ Ἰησοῦς.
ויבך ישוע׃
예수가 우셨다,
제임스 티솟 (1836-1902)
구아슈, 17.1cm x 22.7cm
뉴욕, 브루클린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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