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2.26. (木曜日, 300th/365) “기적奇蹟이란 무엇인가?”
기적은 초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것이다. 기적은 자연 안에서 발견되길 기다리는 숨겨진 보물이다. 어제, 크리스마스 저녁 6시에 샤갈과 예쁜이를 데리고 저녁산책을 수행하였다. 자동차를 오랫동안 운행하지 않아,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요즘 아침 기온이 영하 13-15도로 떨어져, 며칠 자동차를 운행하지 않고 서리에 방치하면, 시동이 걸리지 않는다. 우리는, 걸어서, 동네 한 바퀴를 돌았다. 샤갈은 야생동물이 등장하면, 달려드는 습성이 있어 리드줄을 매야 한다. 예쁜이는 줄을 굳지 매지 않아도 잘 따라온다. 예쁜이는 어린 시절, 주인으로부터 버림받은 기억이 있어, 줄이 없어도 나를 졸졸 따라온다. 미끄러운 비탈 길을 내려간 후, 축 처진채 봄을 기다리는 포도밭을 지나 논밭이 있는 들판으로 내려갔다.
이곳은 저녁 5시 반이면, 암흑이다. 가로등이 없어 더욱 그렇다. 우리는 빙판이 된 도로를 걷다, 밤이 와도 그렇게 어둡지 않은 이유는, 별 때문이다. 초저녁 남서쪽 하늘에 별중의 별이라고 불리는 시리우스가 등장하였다. 하늘에서 내려온 용과 같은 천량성天狼星이 우리를 쳐다보고 있다. 8.59광년이나 떨어진 저 행성이 크리스마스 다음날 왜 우리를 찾아왔는가? 나에게 무슨 볼일이 있어 이렇게 강림했는가? 기적중에 기적奇蹟이다.
내가 요즘 공부하고 있는 <마태복음>에 기적에 관한 내용이 등장한다. 예수에게 지속적으로 ‘기적’을 보여달라고 조르는 인간들이 등장한다. 그 당시 지식인들이다. 그들은 지적으로 자신들보다 더 나을 것이 없는 초라한 예수의 카리스마에 끌려 그의 제자가 되고 싶었다. 그들은 지적인 허영을 무너뜨릴 강력한 기적을 보여달라고 예수에게 요구한다. 이들은 유대경전을 공부하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다. 율법학자들은 모세오경 히브리어 원전을 연구하는 자들이고, 바리새인들은 히브리어 원전에 대한 구전을 공부하는 사람들이다. 당대 최고 지식인들도, 예수에게 초자연적인 기적을 요구하였다. <마태복음> 12장 38-40절은 그 내용이다:
38. 그 때에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 가운데 몇 사람이 예수께 대답하여 말하였다. “선생님, 우리는 당신으로부터 표적을 보고 싶습니다.”
39.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요구하지만, 이 세대는 예언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아무 표적도 받지 못할 것이다.
40. 요나가 사흘 낮과 사흘 밤 동안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과 같이, 인자도 사흘 낮과 사흘 밤 동안을 땅속에 있을 것이다.
예수는 기적을 요구하는 세대를 ‘악하고 음란한 세대’(Γενεὰ πονηρὰ καὶ μοιχαλὶς)라고 말한다. 왜 예수는 기적을 요구하는 세대를 ‘악하고 음란하다’라고 말했는가? ‘악’이란 나쁜 습관이 쌓여 자신도 모르게 쌓이는 언행이며, 그 언행이 세상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삼는다. 심지어, 자신과 다른 언행을 하는 사람들을 배척하고 악으로 규정한다. 그는 외부로부터 오는, 그의 시선을 매료시키는 대상을 선으로 규정하고 기꺼이 그 팬이 된다. 자신의 개성을 몰살하고, 그 대상을 자신의 시선을 통해 자신의 욕망을 투영하기에 그자는 ‘음란’하다.
예수는, 요나 이야기를 통해, 인간이 다시 태어날 수 있는 방식을 알려준다. 요나는 사흘 밤낮을 큰 물고기 뱃속에서 지내는 동안, 오래된 자아를 살해하고 새로운 자아를 지닌 자로 다시 태어났다. 예수는 이 비유를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예시로 설명하였다. 기적이란 초자연적인 현상이 아니라, 각성을 통해 이전에 보던 세계를 생경한 눈으로 발견하는 세계다.
오늘 아침에 숲으로 들어가니, 태양에 저 멀리서 나를 향해 광선을 비춰 어김없이 찾아왔다. 신선한 바람이 산책하는 내 몸을 감싼다. 산등선 오솔길엔 솔방울들이 떨어져 있고, 소나무와 전나무에서는 송진이 흘러나와 겨울의 고통을 감내하며, 솔잎은 가지에서 낙하하여, 내가 걸을 때마다, ‘한해가 저물었습니다’라고 외친다. 내가 등을 땅에 대고 누워, 하늘을 응시하며 아이폰 카메라를 하늘에 대자, 나무들이 중으로 몰려오고, 그 위에선 낯선 새가 겨울 노래를 부른다. 갑자기 등장한 고라니는 우리의 침입에 놀라 숭고한 몸집을 들어 올려, 점프를 하더니 순식간에 산등선을 넘어간다. 습지에서는 저 지구 중심으로부터 끌어올라온 샘물이 추위에 굴복지 않고, 넘쳐 흐른다. 눈과 귀를 기우리는 모든 곳은 기적의 시간이자 장소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는 귀를 틀어 말고 눈을 가리면서 기적을 요구한다. 그들은 볼 수 있는 눈이 없고 들을 수 있는 귀가 없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안달하면서 핸드폰을 통해, 자신의 귀와 눈을 만족시킬 기적을 찾아 헤맨다. 우리가 눈을 돌리면 언제나 어디서나 기적을 발견할 수 있지만, 인간들은 자신의 눈을 볼 수 있는 초자연적인 현상만이 기적이라고 말한다. 초자연적인 현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자연적인 현상이지만 다만 우리가 볼 수 있는 눈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기적이 일어나는 시대가 지났다고 불평하지만, 정적 기적을 발견할 수 있는 마음을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에, 기적을 볼 수 없다. 자신의 눈을 욕심이라는 시커먼 물감으로 덕지덕지 칠했기 때문에, 기적을 볼 수도 경험할 수도 없다.
우리가 깨어있어야, 공중의 새와 들에 핀 백합화를 보고 감탄할 수 있다. 기적은 자연 안에서 우리의 응시와 긱성을 기다리는 자연이다. 종교, 특히 그리스도교가 초자연적인 현상을 은유가 아닌 역사적인 사실로 고집하고 고백을 강요한다면, 철이 지난 미신으로 전락할지도 모른다. 공중의 새, 백합화, 밤하늘의 별들을 응시하여, 자연이 기적을 품고 있는 각성의 대상이란 사실을 알려야할 시점이다.
사진
<12월 25일 저녁 6시, 가평 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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